소설리스트

테라포밍-107화 (108/497)

Chapter 107 - 107. 자매 (1)

쿵! 쿵! 쿵!

거센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에 어지럽게 울린다.

쿵! 쿵! 쿵!

나무 인간들의 거친 발걸음 소리가 귓가를 강하게 울린다.

[끼아아아아악!]

나무 인간들의 괴성이 귓가에 메아리처럼 남아 요동친다.

"······."

"······."

"······."

수십의 나무 인간들과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있는 공간을 나누는 기준은 고작 엉성한 넝쿨 벽 하나.

우리는 서로에게 기댄 채 불안감을 달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해진 하늘이 우리를 품어 주고 있다는 것일까.

혹여 바닥에 있는 돌 부스러기도 밟지 않기 위해 망부석처럼 몸을 바싹 굳힌 채 서 있기만 했다.

그저 하염없이.

체감상 시간이 10분 정도 흘렀을 무렵.

···쿵! ······쿵! ·········쿵!

[크아···아······악]

다행히 나무 인간들의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멀어져서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하아···."

"아직 앉으면 안 돼."

나는 주저앉으려는 지수를 끌어안아 앉지 못하게 만들었다. 넝쿨 담벼락 안쪽이기는 했지만 우리는 건물 바깥에 있는 건 여전했으니까 아직 쉬어서는 안 되었다.

"흐아···. 아저씨···."

그런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수는 흐느적거리며 오히려 내게 기댔다.

가만히 두었다가는 그대로 넘어지겠다 싶어서 그녀를 좀 더 끌어안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락된 상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 같았다.

"흐으읍!"

"······? 뭐하는 거야?!"

"충저어언···."

하필 몸이 땀에 푹 젖어 있을 때, 지수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영 찝찝한 기분에 그녀를 급하게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지수를 밀어낼 힘도 없었다.

"하아으···."

옆에서 한세아가 죽어 가는 소리를 토해냈다. 그녀의 눈은 해롱해롱 돌고 있었다.

땀에 젖은 적색 머리카락이 한세아의 볼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저 이제 내려주세요.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빠."

"아냐. 너 무릎 상태가 어떨지 모르니까 함부로 움직이지 말자. 그냥 편하게 안겨 있어. 가벼워서 괜찮아."

"네에."

다들 기진맥진한 상황에 혼자 내게 안겨 있는 것이 불편한지 그렇게 말하는 예린이었지만 나는 내려줄 생각이 없었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전력 질주를 하던 중에 넘어진 예린이 괜찮은지 알 수 없었으니, 당분간은 휴식을 취하면서 상태를 지켜봐야 했다.

혹여 아이의 여린 뼈에 금이라도 갔으면 큰일이니까.

물론, 그전에 우리가 들어가야 할 주민센터가 안전한지 확인부터 해야 했지만 말이다.

"다들 힘든 건 알겠지만 다시 힘내서 움직여봅시다. 쉬는 건 주민센터 내부 확인하고 쉬어도 늦지 않아요."

"알고 있어···."

"넵···. 아! 현우씨, 예린이 저한테 주세요. 제가 안고 갈게요."

"괜찮으시겠어요? 많이 힘들어 보이시는데."

한세아의 눈은 오늘 아침 출발할 때와 비교하면 많이 흐려져 있었다. 얼굴 가득 피로감이 쌓여 있기도 했다. 가만 보니 다리도 후들거리고 있어서 언제 넘어져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뿐이니까요.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데 현우씨는 지수씨 도와야죠."

"알겠습니다. 조금만 더 힘내주십쇼, 세아씨."

내가 예린을 한세아에게 조심스럽게 건네주고 있을 그때.

"저 걸을 수 있다니까요! 이거 봐요! 악···!"

짐처럼 옮겨지는 자신이 부끄러운지 걸을 수 있다며 바닥에 발을 올려본 예린이었지만, 다리가 제 역할하지 못해서 예린의 몸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예린아! 조심해야지. 너도 좀만 더 참아. 지수랑 같이 건물이 안전한지 확인해 보고 무릎에 약 발라줄 테니까."

내가 제때 잡아주지 못했다면 예린은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예린을 들어 한세아의 품에 넘겨 주었다.

"넘어져서 죄송해요···."

그녀의 품에 안긴 예린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의 귀와 꼬리도 기운 없이 축 쳐졌다.

"아냐. 괜찮아. 자세 불편하진 않지?"

"네에···."

한세아가 예린의 등을 쓸어 주며 위로 했다. 그녀의 앞뒤는 예린과 도구 가방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거북이처럼 보였다.

"예린아, 혹시 이 건물 위험해 보이지는 않지?"

나는 주민센터 건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예린에게 물었다. 혹시라도 검은 입자가 보인다거나 한다면 매우 큰 일이었으니까.

예린은 고양이 눈을 부릅뜨며 어둠이 내려앉은 건물을 훑어보았다.

"검은 입자는 안 보여요, 오빠."

내게 말을 한 예린은 능력을 쓴 반동으로 머리가 핑 도는지 고개를 비틀거리며 한세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학교에서 탈출한 이후로 변화가 생긴 예린의 눈은 상시 발동이 아닌 스스로가 원할 때만 입자를 볼 수 있게 된데다가 입자를 볼 수 있는 확률도 올라간 듯 해보였다.

다만 횟수에 제한이 생겼을 따름이었다.

"현우씨, 손전등 꺼낼까요?"

"아뇨. 아직 완전히 어두워진 것도 아니니 그냥 가는 게 낫겠습니다. 새어 나간 빛이 나무 인간들을 유인할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뒤로 돌아 도구 가방을 들이미는 한세아를 제지했다.

확실히 손전등으로 내부 이곳저곳을 비춘다면, 무엇이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겠지만 우리가 들어가려는 건물 전면부가 통유리로 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유리를 뚫고 나간 빛이 나무 인간들을 주민 센터로 끌고 오기라도 한다면, 기껏 이곳에 숨은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가자, 아저씨. 나 약간 회복했어. 눈도 잘 보이고. 근데 귀가 먹먹해서 잘 안 들려. 아까 포터에 있을 때 비명 소리를 바로 앞에서 맞아서 그런가 봐, 미안."

"미안해 할 필요 없어. 괜찮아. 더 조심하면 되니까. 귀가 막 아픈 건 아니지?"

"응. 조금 쉬면 괜찮아질 것 같아."

"다행이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가 앞장설게. 다들 잘 따라오십쇼."

나는 닫혀 있는 유리문을 향해 걸었다. 망치 자루를 쥐었다가 풀면서 언제든지 휘두를 준비를 마쳤다.

저벅- 저벅-

이윽고,

나는 문 앞에 도착했고, 문 손잡이를 잡아 천천히 앞으로 밀었다.

스스슥-

바닥을 스치며 열리는 주민 센터 정문.

잠겨 있을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문은 열려 있었다.

잠금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것인지 누가 열어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여차하면 유리를 깰 생각도 하고 있었던 나였기에 문이 열려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없나?'

나는 고개를 살며시 안으로 밀어 넣어 내부를 살펴보았다.

어느새 어둠에 익은 눈은 뚜렷하지는 않지만 사물의 실루엣만큼은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민원실.

민원실로 들어가는 유리문 너머로 대기석과 업무석이 보였다.

파란 쿠션을 가진 금속 의자들, 벽에 붙어 있는 각종 안내문, 서랍장 위에 놓인 여러 팜플렛들, 불이 꺼진 전광판.

대부분 물건들은 멀쩡해 보였지만 지진의 여파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지 민원실 내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 있지 않고 넘어지거나 흩뿌려져 있었다.

그래도 지금 세상에서 이 정도면 매우 잘 보존된 편에 속했다.

먼지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기는 해도 그동안 보아온 건물들에 비하면 선녀라고 할 수 있었다. 비집고 들어온 넝쿨도 없고, 나무 인간의 흔적도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일단 주민센터 1층에 나무 인간의 흔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손짓으로 일행을 불러들였다.

저벅- 저벅-

-달칵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지수와 한세아. 예린은 한세아의 품에 잘 안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지수는 정문을 확실하게 닫고 들어왔다.

그녀들은 내 옆에 바싹 붙어 섰다.

"켈록! 먼지가 엄청 많네. 콜록!"

냄새를 맡으려던 지수가 공기와 바닥에 가득히 떠다니는 먼지를 먹고 기침하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상태를 보니 후각으로 위험을 알아차리는 것도 무리인 것 같았다.

"억지로 냄새 맡으려고 하지 않아도 돼.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니까."

"알았어. 하지만 방심은 금물인 거. 알지?"

"그럼. 걱정 하지마."

나와 지수는 민원실을 지나쳐 일자로 된 복도를 걸었다. 뒤에서 한세아가 천천히 따라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층별 안내>

- 5F: 대회의실

- 4F: 부곡글고운도서관

- 3F: 다목적체육실 / 어린이체육실

- 2F: 주민자치사무실 / 컴퓨터교육장

- 1F: 민원실 / 사회복지상담실 / 휴게실

- B1: 주차장

우리는 층별 안내도가 적힌 판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각 층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는 안내판. 나는 5층에 있는 대회의실을 보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보통 주민센터는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주민들을 보호하는 대피소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들어온 이곳은 그러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공간이 협소한 것도 아니건만, 주민센터가 대피소로 활용되지 못했다는 것은 활용도가 높지 않았거나, 이곳에 올 여유조차 없었거나,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나오지 않았거나 등등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가 역에서 멀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군인들이 철도를 통해 이동했다고 했으니 의왕역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여기 주민 센터에는 사람들이 몰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몰리는 것은 생존자들뿐이 아니었겠지.

바로 그때.

"현우씨. 시간도 너무 늦었고, 여기를 다 뒤져볼 수도 없으니까 4층에서 쉬는 건 어때요? 도서관이던데. 1층에 휴게실이 있기는 하지만 벽이 다 유리로 되어 있어서 불안하잖아요."

한세아가 지친 얼굴로 의견을 말해 왔다.

그녀의 말마따나 생각보다 큰 이 건물을 전부 확인하고 다닐 수는 없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체력이 더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도서관이라···."

잡다한 책들이 가득한 도서관.

책은 마음의 양식이다.

하지만 마음의 양식은 결국 마음의 양식에 불과할 뿐, 실제로 배를 부르게 만들지는 못한다.

일반 서점도 아닌 주민 센터에 존재하는 도서관이니 오직 책만 있겠지. 안전 다음으로 우선시되는 식량을 구할 수 없는 도서관에는 사람이 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책을 장작으로 삼아 불을 태우지도 못 하는 상황에는 더욱 그렇다.

당장 살아남기 급급한데 마음의 양식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좋습니다. 엘리베이터는 못 타니까 옆에 있는 비상구로 올라가면 되겠네요."

생각을 마친 나는 한세아의 의견에 동의했다. 지수도 말하지는 않았으나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크흥. 켕!"

그녀에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지수는 먼지 때문에 많이 힘들어 보였기 때문에 서둘러 올라가는 것이 나아 보였다.

뿌연 먼지가 가득한 1층에서 벗어나면 숨 쉬는 게 좀 편해지겠지.

덜컥- 끼이이익-

단단한 금속으로 된 비상구 문을 천천히 열었다. 고요한 비상계단의 위아래로 문 열리는 소리가 멀리 퍼졌다.

"조심해서 올라오세요. 넘어지지 마시고."

나는 한 발자국 계단 위로 올리며 일행에게 말했다. 속삭이듯 작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소리가 메아리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 뒤로,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말없이 계단을 올라 목표한 도서관이 있는 4층을 향해 끊임없이 걸었다.

터벅-

터벅-

최대한 조용히 내딛는 발걸음 소리가 비상구에 울린다.

터벅-

완전히 어두워진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이 희미하게나마 우리가 다음 발을 내디딜 수 있게 비춰준다.

이윽고.

우리는 부곡글고운도서관의 글자 간판이 붙어 있는 곳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

"어?!"

선두에 있던 나와 지수는 흠칫 놀라며 황급히 도끼와 망치를 앞세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들어간 도서관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록색 머리칼의 여성과 반으로 접힌 강아지 귀를 가진 여성이,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침입자인 나, 지수, 예린, 한세아를 향해서,

손에 들린 목줄을 언제든지 놓을 준비를 하며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외쳤다.

"멍! 처음 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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