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9 - 109. 자매 (3)
"친구는-"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탓인지 계속해서 말하려고 하는 초록 머리 여자.
"아니 아니. 알아들었으니까 그만 말하십쇼."
나는 진이 다 빠진 얼굴로 그 여자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가만두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할 기세였으니까.
"아무튼, 저희가 태도를 어떻게 바꿀지 모르니 여기서 쉬라는 말 아닙니까."
"맞아요."
"알겠습니다. 어차피 다른 데 갈 힘도 없고, 저도 그쪽하고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말이 통해서 좋네요. 많이 힘들어 보이시는데 편한 곳에서 쉬세요."
"하아···."
나는 납처럼 무거워진 팔을 겨우 들어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기껏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건물에서 마주친 넝쿨을 조종하는 여자와 사람보다 개에 더 가까운 여자.
어떻게 넝쿨을 조종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하는 의문은 아니었고, 현재 최우선 과제는 지수, 예린, 한세아를 쉬게 하는 것이었다.
"다들 들으셨죠.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갑시다. 괜찮지, 지수야?"
"···알았어. 우린 좀 더 깊숙이 들어가서 쉬자."
나는 데스크 쪽에 자리 잡은 여자들을 지나치면서 일행을 도서관 안쪽으로 이끌었다. 그 여자들은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는 우리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터벅- 터벅-
우리는 아킬레스건이 내지르는 비명을 애써 무시한 채 걸으며 내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달이 뿜어내는 빛이 도서관으로 들어와 내부를 밝혀주고 있었다.
주민센터에 위치한 부곡글고운도서관.
확실히 주민센터에 있는 도서관이라 그런지 내부는 어른보다는 아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인테리어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천장을 떠받치는 두터운 원기둥 주변에 설치된 소파, 중앙에 설치된 아이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기차 형태의 일체형 책걸상, 아이의 키 높이에 맞춰진 낮은 책장과 간이 책상들.
어른 크기에 맞춰진 가구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수는 상대적으로 많이 적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앙을 나누는 기준인 기차 모양의 테이블을 지나쳤을 때.
"세아씨, 예린이는 여기 앉혀 두면 될 것 같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지수야, 나는 예린이 상태 좀 볼 테니까 너는 세아씨 가방에서 연고랑 반창고 좀 갖다줘. 그리고 너도 고생했다."
원기둥을 둘러싼 형태로 되어 있는 소파를 가리키며 지수와 한세아에게 해야 할 일을 하나씩 말해주었다.
"네. 하아아···."
품에 안고 있던 예린을 조심스럽게 소파 위에 앉히자마자 한세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완전히 허물어졌다.
"알았어, 아저씨. 언니 예린이 안고 오느라 수고했어요. 가방 이리 주세요. ···언니? 언니 팔 좀 들어봐요···! 끄응···."
"흐아아···. 5분만요···. 아니, 1분만···."
"땡! 1분 지났어요."
"···벌써요? 흐윽, 알았어요···. 으아! 살살 해 줘요···."
부스럭- 부스럭-
지수는 축 늘어진 한세아에게서 가방을 낑낑거리며 벗겨 내었고, 지퍼를 열어 연고를 찾기 시작했다.
다들 얼굴에 힘든 기색이 가득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고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일사불란하게 내 지시대로 움직여주고 있었다.
···꼼짝도 못 하고 있는 한세아를 지수가 일방적으로 다루는 것 같은 느낌은 분명 착각일 것이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나는 예린의 눈높이에 맞게 몸을 낮췄다.
상황이 워낙 긴박하게 이어져서 이제서야 예린의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된 것이다.
'크게 다친 게 아니면 좋겠는데.'
그러기를 바라며 나는 예린의 어깨를 살살 흔들었다.
"예린아, 잠깐 일어나 봐. 다리 굽혔다가 필 수 있겠어?"
"핫! 저 안 잤어요! 눈만 감은 거예요!"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예린이 화들짝 놀라면서 답했다. 아이의 입가에는 침이 흥건하게 흘러 있었다. 문득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냐, 자도 괜찮아. 많이 피곤하지? 근데 무릎 상처 덧나면 안 되니까 연고랑 반창고만 붙이고 자자."
"네···."
예린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아이는 내가 시킨 대로 상처가 있는 다리를 굽혔다 피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악!"
콕콕 찔러 보기도 하고.
"누르면 아파?"
"···살짝? 근데 쉬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근육이 놀란 건가? 뼈에 금은 안 간 것 같은데."
피가 굳어 생긴 딱지가 다리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잡아당겨지니 아픔이 느껴진 듯 얼굴을 찡그린 예린이었지만, 나는 아이의 다리 뼈에 큰 이상이 없는 것 같아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바로 그때.
"아저씨, 여기 연고랑 붕대. 반창고는 못 찾았어."
"고마워."
지수가 내게 한세아의 가방에서 꺼내온 물건들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가 내민 것들을 받으며 슬쩍 한세아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괴한에게 당한 것처럼 몸을 둥굴게 말고 미동도 없는 한세아.
'···죽은 건 아니겠지?'
순간 흠칫 놀랐지만, 상체가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걸 보니 숨도 잘 쉬고 있었고 잠깐 기절한 것으로 보였다.
"아저씨, 예린이 상태는 어때? 크게 다친 건 아니지?"
"어풉! 언, 헙! 언, ···니! 차라리 내가! 내가 닦을게! 내가 할 수 있어!"
"쓰읍, 가만히 있어. 해 줄 때 받아. 어허. 손 떼, 손 떼라고 했다. 언니 말 들어."
"으앙!"
지수가 어느새 챙겨 온 물티슈로 예린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주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내게 물었다.
그녀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예린의 얼굴이 찰흙처럼 뭉개지고 있었다. 예린은 발버둥 쳤지만,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지수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중이었다.
나는 예린이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아이의 무릎 상처에 연고를 살살 발라주었다. 조심스럽게 연고를 펴 바른 후 상처에서 나온 진물이 새지 않도록 붕대를 감아주었다. 자는 동안 피가 통하지 않으면 큰일 나니 너무 꽉 감지는 않았다.
"어어. 근육이 아직 놀라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충분히 쉬면 괜찮아질 것 같아. 예린이가 다 나을 때까지 한동안 쉬어야겠어."
나는 간단하게 세안을 마치고 소파에 기절하듯 축 늘어진 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째 지수의 손만 닿았다 하면 엉망진창으로 변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이 역시 착각일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바닥에 엎어져 있는 한세아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타인의 손길이 느껴지자 눈을 힘겹게 뜬 그녀는 손길의 주인이 나인 것을 확인하자 안심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 아니, 세아씨. 눈을 다시 감으면 어떡합니까. 세아씨? 저기요?"
"5분만요···."
내 부축에 따라 일어날 줄 알았건만, 오히려 내게 몸을 기대버리는 모습에 나는 당황하며 어깨를 살살 흔들었다. 그러나 한세아는 뭐라 웅얼거릴 뿐, 눈을 뜨지 못했다.
결국,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소파에 앉혀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흐···."
한세아는 앓는 소리를 내더니 옆에 있는 예린을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편안한 자세를 찾은 듯 편안한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도 말끔해진 걸 보니 지수가 한세아를 예린처럼 물티슈로 간단하게 닦아준 것 같았다.
"···많이 힘들었나 보네."
하긴, 오늘 아침에 출발해서 해가 질 때까지 쉬지 않고 움직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걷고, 걷고, 또 걷고.
뛰고, 뛰고, 또 뛰고.
오히려 피곤하기는 했으나 아직 어떻게든 움직일 여력이 남아 있는 나와 지수가 비정상이라고 볼 수 있겠지.
나야 갈수록 체력이 좋아지고 있어서 그렇다고 쳐도 지수의 체력은 정말 감탄이 나올 만큼 좋은 것 같았다.
역시 위험한 이 세상에서 어린 동생을 데리고 도끼 하나로 살아남은 생존자 다웠다.
"쯧. 지금 상황에 잠이 오나?"
"······."
도롱도롱 숨소리를 내는 예린과 한세아를 보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린 지수에게 '네가 기절시켰잖아.'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 기절 당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왜 그렇게 봐?"
내 시선에 담긴 떨떠름한 감정을 알아차린 지수가 내게 바싹 다가왔다.
"어? 아니, 그냥···."
"그것보다 아저씨, 저 사람들 어떻게 할 거야?"
지수가 좀 더 바싹 붙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의 말에 도서관 생존자들에게 눈길이 향했다. 책이 꽉 차 있는 책장 탓에 그 여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별다른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걸 보니 우리보다 먼저 자고 있을 수도 있고.
"뭘 어떡해?"
내가 멍하니 되묻자,
"아니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개 흉내를 내는 여자나 넝쿨을 조종하는 여자나!"
지수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녀가 말한 점은 나도 계속 생각하고 있던 점이지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처는 계속 경계하는 것밖에 없었다.
"음···. 뭐 딱히 우리가 할 게 없잖아. 지수, 네 말대로 이상하긴 해도 당신들 뭐야!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조용한 거 보니까 지금 자는 것 같구만."
나는 어쩔 수 없지 않냐 라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도 저 사람들한테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일단 아침이 되어야 이야기할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지수 너도 오늘 무리했으니까 푹 쉬고. 정 걱정이 되면 나랑 같이 번갈아 가면서 불침번 서면 되잖아. 안 그래도 우리 식량 가방도 잃어 버렸는데 지금 쉬어야 내일 또 움직이지."
"그렇긴 하지만···. 어째 아저씨 좀 저 여자들한테 유한 느낌이다? 응? 아까 아저씨 냄새 맡던 그 여자가 그렇게 좋았어?"
"······예?"
왜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는 거지?
분명 나는 지수가 걱정되어서 한 말이건만, 그녀는 뭔가 오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말을 잘못 했나 싶은 마음에 지수에게 한 말을 하나씩 곱씹어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실수한 적은 없었다.
여자들이 자는 것 같다고 말한 부분?
우리도 쉬어 둬야 한다고 말한 부분?
그래야 내일 식량을 찾는다고 한 부분?
어느 부분에서 오해를 샀는지 전혀 모르겠다.
전부 지수와 일행을 걱정하는 이야기들이지 않은가.
"···아저씨."
지수가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
"응?"
"혹시 그런 취향이야?"
"뭐가? 아니, 아까부터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뜬금없이 내 취향을 묻는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지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후우···."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지은 지수는 심호흡을 한 뒤 무언가 마음먹은 얼굴로 손을 들었고, 움켜잡는 듯한 손 모양을 만들었다.
"머, 멍?"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니, 내뱉었다.
바로 그때.
"멍?"
나와 지수가 눈치도 못 챌 정도로 조용하게 다가온 강아지 귀 여자가 뒤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화들짝 놀란 지수가 펄쩍 뛰었다.
"히야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