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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110화 (111/497)

Chapter 110 - 110. 자매 (4)

"······!"

나도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여자를 보고 심장이 쿵 떨어질 정도로 놀랐지만 지수의 입을 막는 게 우선이었다.

문도 닫혀 있고, 열려 있는 창문도 없었지만 적막이 내려앉은 밤에는 소리가 좀 더 멀리 퍼지니까.

"읍! 으읍!"

지수는 엄청나게 놀랐는지 꼬리털이 바싹 곤두서 있었고, 도끼를 높게 들려고 하고 있었다. 내가 급하게 그녀의 손을 붙들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대참사가 벌어질 뻔했다.

"지수야! 진정! 괜찮아 괜찮아. 아까 그 여자 중 하나야."

"흐읍-, 흐읍-."

"천천히- 천천히 숨 쉬어. 천천히···."

나는 차마 바짝 곤두선 지수의 꼬리를 만지지는 못했다. 대신 그녀의 등을 토닥이면서 놀란 지수의 심장을 안심시켰다.

"흐우으으······."

내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지수.

하지만 그녀의 호박색 눈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그 시선은 가만히 서 있는 강아지 여자를 향하고 있었다.

얼추 상황이 진정되었다고 느낀 나는 피곤한 눈두덩이를 주무르며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나와 지수가 눈치도 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하게 다가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를 어찌어찌 해보려고 접근한 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강아지 여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지수가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하아. 여기는 왜 온 겁니까? 감시하러? 서로 피해가지 않게 지내자고 했던 것 같은데요."

내가 지친 얼굴로 여자에게 말하자,

"멍, 그게 아니라. 아현이 이거! 주고 오랬어."

여자는 우리가 또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 있던 것은 손바닥 크기의 습윤 밴드. 한세아의 도구 가방에 들어 있던 붕대보다 상위 호환인 의료품이었다.

여자가 말한 아현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초록 머리 여자를 지칭하는 거겠지.

"···밴드?"

"응! 이거로 다친 아이 치료! 피 냄새 막아! 화해! 그리고 시간 괜찮으면 이야기 하자고 했어!"

나는 암호 같은 말을 하는 여자의 말을 속으로 곰곰이 정리해 본 후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주는 밴드로 무릎 상처 치료해서 피 냄새가 나는 것을 막고, 당장 잠을 자지 않을 거면 대화하자는 것. 이런 말하고 싶은 거 맞습니까? 화해는 아까 있었던 일 말하는 것 같고."

"···멍. 맞아. 그래서, 어떡할 셈?"

"일단 주신 밴드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꼭 필요했거든요. 그럼 저희가 그쪽으로 가야 합니까? 대화를 나누려면요."

"아니! 괜찮다면 아현이 데리고 여기서 이야기!"

나도 나와 지수가 이동하는 것보다 한세아와 예린이 자는 모습이 보이는 이곳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아, 침 흐른다.'

한세아와 예린을 깨워서 데려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둘의 상태는 어깨를 흔들면서 깨우려고 해도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가장 큰 이유는 그녀들이 내 시선이 닿는 곳에 있어야 내가 비교적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었지만.

"좋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이참에 서로 궁금한 거 물어보면 되겠네요."

나는 옷 소매로 한세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멍, 알았어!"

여자는 반쯤 접힌 귀가 순간 펴질 정도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더니, 그녀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강아지 여자는 아까부터 반말을 하고 있었지만 굳이 지적할 기운도 없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 와서 지적한다고 해도 저 여자가 말투를 고칠 것 같지도 않고, 괜히 먼저 말을 꺼내 봐야 꼰대 취급밖에 더 받겠는가.

그리고.

이것보라. 지수도 아무 말하지 않는 걸 보니 그녀도 그다지 신경-

"저기 잠깐만요. 근데 왜 반말하세요?"

···아니네.

아까부터 신경 쓰고 있었구나.

"멍? 반말?"

"네. 왜 반말하시냐구요. 저희 초면 아닌가요? 그리고 아까부터 그, 멍 소리는 왜 하는 거예요? 누구 놀려요?"

지수는 짧은 사이에 쌓인 게 좀 있는 듯 개 목걸이 여자를 향해 말을 다다다 쏟아 냈다. 화난 어조는 아니었으나 오히려 담담한 어조였기에 지수가 가진 불만이 확 와 닿았다.

지수의 말을 들은 여자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어려운 말. 잘 몰라."

"뭐라고요?"

"그리고."

"······?"

"나만, 멍 한 거 아니야. 너도 멍, 했어. 멍멍!"

개 목걸이 여자는 조금 전에 지수가 했던, 무언가 움켜잡는 자세를 취하며 멍, 소리를 냈다.

그리고 킥킥 웃으면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여자의 복슬복슬한 꼬리가 기분이 좋은 듯 살랑거리고 있었다.

"······!!"

"아, 안 돼! 네가 참아, 지수야!"

괜히 시비를 걸었다가 본전도 찾지 못한 지수를 말리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몸을 부들부들 떠는 그녀를 다시 한번 꽉 붙잡았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수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씨이, 진짜 내가 몸 상태만 괜찮았어도··· 안 들켰을 텐데."

한동안 분에 겨워 씩씩거렸던 지수는 내 팔을 끌어안으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귀는 힘없이 축 처져 현재 기분을 알려주고 있었다. 꼬리도 마찬가지였다.

강아지 여자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돌아간 것과 정반대되는 모습.

"음···."

순간 그 여자가 지수를 놀리며 취했던 자세가 떠올랐다. 웃음이 터질 뻔한 걸 이를 악물어서 겨우 막을 수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지수 앞에서 내가 갑자기 웃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나는 도끼눈을 뜬 그녀에게 깨물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절대로 웃어서는···.

"크흡!"

"아저씨?"

지수가 고개를 들어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이왕 웃음이 새어 나왔으니 시원하게 웃기로 했다.

일행을 무사히 안전한 곳에 데려왔다는 생각에 드는 안도감.

재롱을 부린 지수의 수치심에 물든 얼굴을 보며 생긴 즐거움.

섣불리 확정 짓지는 않겠으나 새로 만난 생존자들의 심성이 나쁘지 않은 것 같은 직감.

그 모든 것들이 내 몸에 가득 찼던 긴장을 조금씩 풀어 주고 있던 것이었다.

물론.

"크흐흑-, 으하하학! 멍, 이래. 멍! 으핫-아아악! 아파! 지수야, 손! 끄으윽!"

내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 손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 지수가 목표를 바꿔 내 옆구리를 꼬집었기 때문이다.

"지금 웃음이 나와? 어? 내가 지금 우울해 하는데?! 웃어? 웃음이 나오냐고! 어디 지금도 한 번 웃어봐! 웃어 보라고!"

"아아악······! 미안해···!"

나는 바로 꼬리를 내리며 사과했다. 내릴 꼬리가 없는 나는 꼬리 대신 허리를 숙였다. 허리를 숙인 건 옆구리가 비틀리는 고통에 숙여진 것이긴 하지만.

꽈악-

"웃어 보라니까? 어떻게 아저씨도 날 놀릴 수가 있어? 씨이, 기껏 생각해 줘서 해줬더니! 내가 웃겨?!"

"미안···! 내가 잘못, 했어! 그리고 네가 웃겨서 그런 거 아니야! 맞아, 귀여워서. 귀여워서 그랬어! 그러니까 이 손 좀!"

"······그래?"

"그래!"

필사적인 내 애원에 지수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지만, 내 옆구리를 비틀고 있던 손은 내려주었다.

"하아아···."

나는 급하게 옆구리를 더듬었고, 별다른 상처가 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지수였건만, 대체 어디서 이런 힘이 솟은 건지 모르겠다. 그녀의 손은 떨어졌지만 아직도 타는 듯한 얼얼함이 남아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터벅- 터벅- 풀썩-

지수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예린과 한세아가 누워 있는 소파에 앉았다. 예린과 한세아는 도롱도롱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지수의 옆에 따라 앉았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이야기를 하자던 여자들이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예린과 한세아를 두고 그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고, 이참에 가만히 앉아서 쉬기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나와 지수도 휴식을 취할 시간을 가지긴 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쪽이 먼저 이야기를 제안했으니 어련히 알아서 오지 않겠는가.

바로 그때.

"아저씨, 미안."

지수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작게 말했다.

"뭐가? 내 옆구리 꼬집은 거? 아냐, 이건 내가 잘못한 거지. 웃어서 미안."

"아니, 그거 말고. 그건 아저씨가 잘못한 게 맞아."

"그럼?"

"하아, 개 흉내 내는 여자가 가까이 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잖아. 내가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지수는 한숨을 폭폭 내쉬며 자책했다.

그동안 강화된 후각과 청각으로 일행에게 미리 위험을 알려주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의왕시 진입 도로에서 마주친 나무 인간의 괴성에 직격당한 이후 몸이 아직 피해를 회복하지 못한 것 같았다.

물론, 피로가 가득하다는 것도 한몫 했겠지만 말이다.

"아직 귀가 많이 안 좋아? 좀 만져 줘? 마사지해주면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어?! 귀가 좀 멍하긴 한데···. 마, 마사지? 귀를?"

"응, 너 꼬리는 예민해도 귀 정도는 내가 손대도 괜찮을 것 같던데. 싫으면 말고."

"아니! 해 줘! 마사지!"

지수가 얼굴에 화색을 띠며 말했다. 그녀의 꼬리는 천천히 살랑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내가 지수의 귀를 만지기 위해 손을 올리려던 그 순간.

"죄송해요. 조금 오래 걸렸죠? 이것저것 좀 챙겨 오느라 늦었어요."

초록 머리 여자와 강아지 여자가 무언가 한아름 들고 오며 말을 걸었다.

그림자가 지는 부분에 있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핏 드러나는 윤곽을 살펴보니 물건을 담아 놓는 상자인 듯했다. 손목에 매인 줄은 그녀의 옆에 서 있는 개 목걸이 여자와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밤 산책을 나온 주인과 개의 모습.

그래도 몇 번 본 탓인지 내 뇌는 그다지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저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할 뿐.

"아···."

지수는 탄식을 내뱉었다. 조금씩 살랑거리려던 꼬리도 움직임을 완전히 멈췄다.

귀 마사지를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아 안타까웠지만 여자들이 온 이상 달콤한 휴식 시간은 끝이었다.

"여기보다는 옆에 있는 테이블로 가서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요? 차가운 바닥보다는 의자에 앉는 게 낫지 않겠어요? 원기둥 소파에 앉을 수는 있지만 대화를 하려면 마주 보면서 해야죠."

초록 머리 여자는 주변을 둘러보며 제안했다.

"그러시죠. 가자, 지수야. 귀는 나중에 마사지해 줄게."

"응······."

나 또한 바닥보다는 의자가 편했기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리고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지수를 살살 달래며 일으켜 세웠다.

이윽고.

나와 지수, 초록 머리 여자와 개 목걸이 여자는 창가 근처에 마련된 테이블과 의자에 앉았다.

밝은 달빛이 숨소리만 울려 퍼지는 도서관의 내부를 조용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그 덕분에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예린과 한세아가 자는 곳 바로 근처라서 그녀들의 모습도 계속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누가 먼저 입을 열지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그때.

초록 머리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로 할 말이 많겠지만, 우선 통성명부터 하죠. 저는 동생인 신아현, 이쪽은 언니인 신아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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