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1 - 111. 자매 (5)
초록 머리 여자 아니, 신아현은 테이블 위에 팔을 걸치며 자신들을 소개했다. 처음 만났을 때 네 발로 걷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신아진은 뜻밖에 바닥이 아닌 의자에 멀쩡하게 앉아 있었다.
냉기가 흐르는 바닥에 앉기 싫어서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곳으로 일부러 왔으니까 의자에 앉아야 하는 게 당연한 모습이건만.
신아진이 보여 준 첫인상이 워낙 강렬했던 터라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서요? 당신들은요?"
신아현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치며 물었다.
"아, 저는 이현우라고 합니다. 제 옆은···."
나는 내 이름을 말하면서 지수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선이 신아진을 향해 있는 것을 보니 아직 앙금이 남아 있는 듯했다.
"···김지수."
자기 이름만 툭 내뱉는 지수.
"···지금 자는 두 사람은 한세아와 최예린이고요."
나는 기절한 한세아와 예린을 대신해 간단하게 이름 정도만 소개해 주었다.
이 자리가 소개팅 자리도 아니고, 구태여 취미나 취향 같은 자질구레한 것들은 말할 필요가 없었으니.
"좋아요. 통성명도 했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죠. 피차 서로 묻고 싶은 게 많잖아요? 이야기도 길어질 것 같으니까···. 언니, 여기 두 사람 몫까지 해서 물 좀 가져다줄래?"
"알았어!"
신아현이 시키는 대로 쌩 하니 달려 나가는 신아진. 그녀의 목줄은 어느새 풀려 있었다.
신아현과 신아진. 동일한 성씨에 언니, 동생이라고 칭하는 걸 보니 둘은 친자매인 게 확실했다.
토도도도도-
"여기, 물!"
쌩 하니 사라진 것만큼이나 순식간에 쌩 하고 돌아온 신아진은 품에 한가득 생수병을 들고 돌아왔다.
우르르···
그녀는 테이블 위에 들고 온 생수병들을 쏟아 내더니 알아서 목걸이에 줄을 다시 연결했고, 무언가를 바라는 듯 신아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잘했어, 언니."
신아현은 언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신아진은 복슬복슬한 꼬리를 살랑거리며 동생이 주는 칭찬을 한껏 즐겼다.
"······."
"······."
나와 지수는 어색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괜스레 민망한 마음이 들었고, 뭔가 좀 그랬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가 자매를 둘러싸고 있었다.
언니인 신아진은 목줄로 붙들려 있어도 크게 괘념치 않아 보였다. 아니, 오히려 묶여 있다는 것에 안정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자진해서 개 목걸이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신아진이 만족할 만큼 칭찬을 충분히 즐겼을 때.
"우선 당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외부에서 사람이 들어온 것은 오랜만이거든요."
신아현은 고개를 돌려 나와 지수를, 특히 내 쪽을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요? 저희말고 아래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까?"
나는 우리 말고 다른 외부인들이 있었다는 소리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군인들이 올라왔었죠. 오래 머물지는 않았지만요. 의왕역에 잠시 머물다 간 군인들은 곧장 위로 올라갔거든요."
"아···."
군인들.
지수가 내게 말해주었던 이야기처럼 군인들이 철도를 따라 길을 정리하면서 의왕역을 지나쳤나보다.
내가 기대했던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군인들이 철도를 타고 이동했다는 지수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게 증명된 것을 위안 삼기로 했다.
"뭐, 군인들하고 당신들 말고 다른 사람들이 왔을 수도 있겠죠. 근데 살아서 도착한 사람들은 군인을 제외하고 당신들이 유일하다고 해도 무방해요. 그쪽도 알다시피 도로가 많이 위험했잖아요?"
"······."
"여기에서 빠져나가려는 사람들, 가족을 찾기 위해 사지로 발을 들이민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한둘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다 어디서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대부분 빠져나가지 못하고 도로에서 죽었겠죠. 사람들이 죽으면 죽을수록 도로는 점점 위험해졌을 거고."
나는 도로에 수없이 방치되어 있던 차량들과 그 밑에 숨어 있던 수많은 나무 인간들을 떠올리며 답했다.
"맞아요. 그러니까 알려주세요. 바깥은 어떻게 되었고, 당신들은 왜 이곳으로 들어왔는지. 그럼 저랑 언니가 알고 있는 것을 다 알려드릴게요. 어때요? 이 정도면 정당한 거래라고 생각하는데. 현우씨라고 했던가요? 현우씨도 궁금하잖아요? 제가 어떻게 넝쿨을 조종하는지, 또 여기 의왕시는 어떤 상황인지."
그렇게 말한 신아현은 손을 살짝 들어 손가락을 까딱거렸고, 그녀의 옆에 놓여 있던 상자에서 넝쿨이 고개를 들었다. 신아현이 들고 온 상자에는 넝쿨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순간 흠칫 놀란 지수는 내 옆에 좀 더 바싹 붙어 앉았고, 내게 모든 걸 맡긴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전적으로 나를 믿는다는 태도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는···."
본격적인 정보 교환이 이루어질 시간이었다.
***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이기도하고, 갑자기 스케일이 커진 느낌이지만. ······용사같네요, 당신."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지금까지 겪은 경험을 요약한 이야기를 들은 신아진이 내뱉은 감상이었다.
"예? 용사?"
나는 갑자기 튀어나온 거창한 단어에 얼떨떨했다.
어린이 도서관에서 지내다보니 마음이 동심으로 되돌아간 것인가?
세상이 뒤바뀌기 전, 내가 아직 군인으로서 살고 있을 때.
서로 다른 부대의 병사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용사님이라고 정해진 적이 있었지만, 누가 그런 단어를 쓰겠는가.
다들 아저씨라고 부르거나, 간혹 전우님이라고 부르는 병사들만 있을 뿐이었지.
내가 사회에 나와서 누군가 나를 용사라고 부를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꾸준히 불린 게 아니라 오늘 처음 들은 것이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지금도 아저씨라고 불리는 구나···.'
문득 든 생각에 침울해지는 것도 잠시, 나는 말을 잇는 신아현을 바라보았다.
"동화에 나오잖아요. 마왕성에 있는 괴물을 해치우고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요. 남산은 마왕성이고, 그 안에 있는 괴물을 무찌르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당신이 용사인 거죠."
"아하하···."
묘하게 눈을 반짝이는 그녀의 반응에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흐음···. '남산에 있는 연구소로 가면 세상을 원래대로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 그래서 군인들이 바쁘게 위로 올라간 건가? 아직까지 변한 게 없는 걸 보면 실패했다고 보는 게 맞겠고···."
신아현은 침음을 흘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곰곰이 생각하는 모양새에 나는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한 번에 많은 정보를 건네주었으니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아직 신아현이 내가 한 이야기를 믿는지, 믿지 않는지 확신할 수 없으나 구태여 내가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믿어 달라는 듯이 말을 계속 이어 나가거나 이야기를 믿어 달라며 어필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이겠지.
그래, 내가 저 여자를 억지로 납득시킬 필요는 없었다.
나는 신아현에게 외부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신아현은 나에게 의왕시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서로 교환할 뿐이었으니까.
이윽고,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희망찬 이야기네요. 정말로 희망찬 이야기예요."
"제 말을 믿어 주는 겁니까?"
"음. 믿느냐 믿지 않느냐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거라면. 믿어요."
"솔직히 믿기 어려운 말 아닙니까. 제가 허풍만 늘어놓은 사기꾼일수도 있고요."
신아현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인간이 터무니없는 말을 믿는 것은 멍청해서가 아니에요. ···간절하기 때문이죠."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도 일단 믿어보는 거예요. 그렇게 믿고 싶은 거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믿으며, 절망적인 이야기를 불신하죠."
-그게 사람이니까.
신아진은 작은 목소리로 뒷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
"당신은 실제로 수원에서 이곳으로 올라왔잖아요. 온갖 위험을 뚫고. 확실히 당신이 말한 이야기는 진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정작 남산에 있는 연구소로 힘들게 갔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하지만 현우씨 당신은, 적어도 그게 진실이라고 믿고 움직인 것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후후, 거 봐요. 저는 이야기를 듣는 입장에 불과할 뿐인데, 제가 뭐라고 '당신은 틀렸어! 당신이 한 말은 다 거짓말이야!' 같은 말을 하겠어요? 또 당신은 생각보다 믿을 만한 사람인 것 같으니까요."
"예? 제가요?"
나는 신아현의 말에 다시 한번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만난 지 하루조차, 반나절조차 되지 않았는데 대체 뭘 보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신아현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옆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것은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기절하듯 잠에 빠진 지수였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눈치 챘는지 지수의 귀가 미약하게 쫑긋거렸다. 잠에서 깨진 않았지만.
내 옆에 앉아 있던 지수는 잠이 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다가 끝내 밀려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내 어깨에 기대 패배를 선언하고 말았던 것이다.
낯선 사람이 있을 때는 쉽사리 잠이 들지 않고 날밤을 새워서라도 경계하는 지수였건만, 오늘은 그녀에게도 매우 고단한 하루였던 듯 버티기 힘들었나 보다.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버틴 것이 용했다.
"저분 이름이··· 지수씨? 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한 성깔 하는 것 같더라고요. 저희를 엄청 경계하기도 했고. 근데 그런 사람이 당신을 믿고 자고 있잖아요.
당신이 정말 사기꾼이거나 악인이라면 여기 있는 지수씨도 그렇고, 저기 자는 두 사람이 쉽게 자지는 않을 것 같거든요.
뭐, 가장 큰 이유는 당신이 예린이라고 하는 아이를 데리고 있다는 점이지만요. 그렇잖아요? 요즘 같은 세상에 어린아이는 보기 힘든 편이니까. 특히나 살아 있는 어린아이는.
"
"······."
나는 말없이 지수가 불편하지 않도록 자세를 고쳐 잡아주었다. 마침 팔걸이가 없는 의자였기 때문에 별 탈 없이 그녀의 머리를 내 허벅지에 눕히게 만들 수 있었다.
그녀의 목이 좀 심하게 꺾여 있었기 때문에 지금 자세를 고쳐주지 않으면 아침에 근육통이 심하게 올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으···."
머리를 내 허벅지에 베고 있는 지수는 앓는 소리를 내더니 몸을 둥굴게 말았다. 그녀의 꼬리는 다리 사이로 들어가 말렸다.
잠시 나를 지켜보던 신아현은 얌전히 앉아 있는 신아진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신아진의 꼬리가 붕붕 휘둘렸다.
"앞에서 믿는다 어쩐다고 했지만, 죄송하게도 저는 동참은 못 하겠네요. 당신에게 지켜야 할 것이 있듯이 저도 지켜야 할 것이 있거든요. 사랑하는 사람 말이에요. 그렇지, 언니?"
"멍! 맞아!"
신아진은 늦은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아현의 물음에 생생한 얼굴로 대답했다.
"부디 원하시는 일 이루시길 바라요."
"맞아, 꼭 이뤄!"
"오히려 이런 점은 망해서 괜찮을지도···."
자기 손에 얼굴을 비비는 언니를 바라보는 신아현은 질척하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 있었다.
어딘가 비틀린 사람이 가진 특유의 눈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