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3 - 113. 자매 (7)
"네! 그게 끝!"
"······."
"그럼 저랑 언니는 이제 자러 가 볼게요. 당신도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얼른 자야 할 것 같고요. 뭐, 제 이야기 들으셔서 알겠지만 의왕역이나 물류 센터 쪽은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캠프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을 수도 있고, 만약 들키면 당신들을 붙잡으려고 혈안이 될 테니까. 남자 하나에 여자 둘 그리고 아이 하나라니···. 잡히면 좋은 꼴은 절대 못 볼 걸요.
"
신아현은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린다는 듯 질색하는 얼굴을 띠어 보였다. 그녀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신아진을 살살 달래며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아현이 길게 하품하며 눈가를 마사지하고 있을 때.
"당신들은 내일 여기를 떠난다고 했죠? 어디로 갈 겁니까?"
나는 그녀들이 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 서둘러 물었다. 신아현과 신아진이 어디로 가는 지 알아 둬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당신들이 덕영대로를 뚫고 들어왔으니 그쪽으로 한번 나가 보려고요. 여기는 답이 없어요. 저는 현우씨처럼 위로 올라가기는 싫으니 아래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죠."
"아···."
"다수의 나무 인간이 움직이며 내는 소리는 근처에 있는 나무 인간들을 유인하는 소리이기도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다? 현우씨가 덕영대로에 있는 대부분의 나무 인간들을 의왕시로 데리고 왔으니 한동안 도로는 안전할 것이다! 라는 말이죠."
"여기를 벗어나실 생각이시군요."
"······그러려고요. 원래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봉쇄가 풀리기도 했고. 그냥, 그냥 여기 있으면 기분이 안 좋으니까."
신아현은 깊게 가라앉은 얼굴을 하며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했다. 눈가를 찡그린 걸 보니 좋은 기억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좋은 사람들은 언제나 빨리 죽어요. 특히 이런 세상에서는 더 하더라고요···. 당신들이랑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제가 이런 말 하는게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현우씨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죽지 말고 원하시는 바를 꼭 이루길 바라요. 반드시요. 뒤에 남겨진 사람들이 슬프지 않게요. ······참 나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네, 감사합니다."
할 말을 마친 신아현은 얕고 긴 숨을 천천히 내뱉으면서 원래 그녀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더 그녀들을 붙잡지 않았다.
변해 버린 세상에서는 사연이 없는 사람이 드물다.
우리는 모두 소중한 사람을 잃은 피해자다.
단순히 하나를 잃은 것이 아닌 그와 관련된 모든 연결 고리가 강제로 끊겨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음에 절망하는 피해자.
신아현과 신아진. 그녀들도 무언가를 잃어 버린 것이겠지.
"후우···."
나는 상념을 한데 그러모아 긴 한숨으로 내뱉었다.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었다. 지금은 신아현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간단하게라도 정리해야만 했다.
우선, 몸의 절반이 인간이고, 나머지 절반이 나무 인간인 남자.
그 남자가 의왕역 근처 물류센터에 자리 잡은 생존자 캠프에서 대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 신아현의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다.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 그저 이야기를 듣기만 한 것이기에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박현일이 정말로 김태진과 같은 경우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든 변종들은 자체적으로 검은 입자를 뿜어낸다. 그리고 사방으로 퍼진 검은 입자는 주변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을 좋지 않은 방향으로 변이시킨다.
수원역 캠프에 있던 생존자들도 점점 이상해지지 않았던가.
김태진과 마찬가지로 눈이 검게 물들어가고 있던 생존자들은 한순간에 태도를 달리해 나, 지수, 예린, 한세아의 목숨을 위협해왔었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일행의 목숨을 챙기기에도 벅차다.
의왕시 생존자 캠프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내가 그들을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신아현이 내게 충고한 것처럼 물류센터를 가로지르는 것이 아닌 빙 돌아갈 길을 찾는 게 마땅할 것이다.
내게는 동화 속의 용사처럼 강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들에게는 미안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지하에서 나왔다는 푸른 조각.
'쉬는 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은 채 자그마한 수정 조각이 하나라도 나올 때까지 계속··· 계속··· 땅을 파내라고 지시했죠.'
신아현의 말대로라면, 지하에서 채굴되는 푸른 조각의 양은 생각보다 꽤 많은 것 같았다. 캠프에서 푸른 조각을 추가로 얻을 수만 있다면 앞으로 여정에 큰 도움이 될 텐데.
아쉽지만, 정말로 아쉽지만.
지수, 예린, 한세아의 목숨을 걸고 도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녀들의 목숨과 맞바꿀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역시.
'예린의 상처가 낫는 대로 즉시 여기서 벗어나야겠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한 것은 우리다.
길거리를 어기적거리며 돌아다니는 수많은 나무 인간들뿐만이 아니라 3주 전부터 많아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변종들이 영역을 점점 늘려가면 우리는 이도 저도 못 하는, 꼼짝도 못할 상황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빨리 남산으로 향해야만 했다.
내 목적을 위해서.
일행의 안전을 위해서.
"하아···."
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비웠다.
생각은 아무리 한다고 해도 생각에 불과할 뿐, 중요한 것은 내가,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달려 있지 않겠는가.
고개를 내려 곤히 자고 있는 지수를 바라보았다.
원래 그녀의 귀는 무슨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자면서도 쫑긋거렸었는데, 지금은 그럴 힘도 없는지 그저 약하게 파르르, 파르르 떨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지수가 좀 더 편하게 잠들 수 있기를 바라며 그녀의 귀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부담이 가지 않게 쓸어 주며 나무 인간의 괴성을 직격으로 맞은 귀를 풀어 주었다. 뭉친 근육을 풀어 주듯 힘없이 축 처진 귀를 쭉 펴주었다.
스윽- 스윽-
맨들맨들한 피부에 촘촘하게 나 있는 솜털의 촉감은 매우 중독성 있었다.
스윽- 스윽-
계속 만져도 된다고 하면 온종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묘한 촉감이 나를 매료시켰던 것이다.
흔들리는 불을 하염없이 보는 불멍, 쏟아지는 비를 하염없이 보는 비멍, 흩날리는 눈을 하염없이 보는 눈멍이 있듯이.
내게는 지수의 동물 귀를 하염없이 만지는 귀멍이 있었다.
그녀의 귀를 멍하니 바라보며 귀를 계속 만지작거리자 어느새 머리를 차지한 복잡한 생각들이 하나, 둘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분명 처음 의도는 지수의 귀에 쌓인 피로를 풀어 주기 위함이었건만, 오히려 그녀의 귀가 내 머리에 쌓인 피로를 풀어 주는 아이러니한 상황.
지수의 귀가 조금씩 풀어지면서 따끈따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뭐, 어찌 되었든 그녀의 귀의 피로도 풀고, 나도 두통을 가라앉히면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바로 그때.
"흐으응···."
지수가 몸을 뒤척거렸고,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그녀의 금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수가 길게 하품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달빛과 별빛을 반사시키는 지수의 눈은 한층 더 반짝이고 있었다. 아니, 이제 보니 하품하면서 생긴 눈물 탓이었다.
"미안, 깼어?"
나는 지수의 귀에서 천천히 손을 떼며 물었다. 내가 힘 조절을 잘하지 못한 탓에 잘 자고 있던 그녀가 깬 것 같아 눈치가 보였다.
"끄흐흥······!"
지수는 말없이 일어나 손 깍지를 낀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뚜둑- 뚝-
그녀가 어깨와 허리를 뒤틀 때마다 굳어 있던 뼈마디가 풀리는 소리를 냈다.
약간 멍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던 지수는 몸을 풀 수록 점점 또렷한 눈동자를 하게 되었다.
이윽고, 완전히 정신을 차린 지수는 핫, 하고 놀라더니 급하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헉! 나 언제 잤지? 미안! 잠깐 눈만 감고 있는다는 게··· 그냥 자버렸나 봐."
지수가 미안한 감정을 가득 담아 내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어 괜찮다는 것을 표현했다.
"아냐, 피곤한 걸 아는데 뭘. 나는 오히려 네가 또 안 자고 버틸까 봐 걱정했는데 조금이라도 자서 다행이네."
"진짜 미안! 그 사람들은? 이야기는 다 끝났어?"
지수는 피로가 조금 풀린 덕분인지 예민함이 많이 옅어져 있었다. 경계심이 완전히 풀렸다는 것은 아니고, 모든 것에 날카롭게 반응하던 그녀가 상당히 유해졌다는 말이다.
"응. 대충 여기 상황하고, 조심해야 할 사람들 이야기는 다 들었어. 여기 다시 앉아 볼래? 내가 들은 이야기 말해 줄게."
나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지만,
포옥-
지수는 내 무릎 위에 앉았다. 그녀의 눈초리가 부드럽게 휘어졌고, 장난스럽게 물어왔다.
"여기?"
"···난 의자 말한 건데."
"의자는 너무 차가워! 나 춥게 내버려 둘거야?"
"아니, 하···. 네가 편하면 됐어. 그럼 이렇게 이야기 듣게?"
"응! 아, 따뜻하다. 아저씨 자면 비킬 테니까 조금만 이러고 있자."
기분이 좋은 듯 히히 웃는 지수.
다시 만난 이후로 알게 모르게 점점 스킨십이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뭔가 길들여지는 것 같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고개를 들었지만 마음속 망치를 휘둘러 의심의 머리를 부쉈다. 그렇게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밤공기가 싸늘한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그리 생각한 나는 무릎에 앉아 나에게 완전히 몸을 기댄 지수에게 신아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서 말해주었다.
반은 인간, 반은 나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박현일이라는 남자의 존재.
그 남자가 의왕시 생존자 캠프의 대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
3주 전부터 캠프 지하에서 푸른 조각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들은 위험한 사람들이니 캠프를 들리지 않고, 예린의 상처가 낫는 대로 우회해서 위로 올라가자는 내 생각마저.
"흐응···. 그렇구나. 일단 알았어."
간략하게 이야기를 들은 지수는 비음을 흘리더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저씨도 얼른 자. 이제 내가 깨어 있을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적어도 한 명은 깨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예린이랑 세아씨는 그냥 푹 쉬게 깨우지 말고, 몇 시간 있다가 나를 깨워. 알았지? 꼭 깨워. 혼자 무리하지 말고."
나는 나와 지수처럼 서로를 껴안고 있는 예린과 한세아를 보며 말했다. 그녀들의 얼굴은 처음 보다는 나아졌으나 여전히 피로감이 얼굴에 가득 들어 있었다.
아마 억지로 깨운다고 해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다시 잠에 빠지게 될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나마 체력이 좋은 나와 지수가 조금 고생하는 편이 나았다. 그게 더 효율적이기도 하고.
"알았어. 내가 봐도 세아 언니는 못 일어날 것 같네. 어서 자, 아저씨. 무슨 일 있으면 바로 깨울게."
"응."
"아, 그리고 귀 마사지해준 거 고마워. 기분 좋- 아니, 아저씨 덕분에 많이 풀렸어. 곧 완전히 회복할 것 같아."
"다행이다."
나는 지수가 일어났으니 안심하고 밀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잠에 빠지게 되면 무릎에서 일어난다고 한 지수는 내가 완전히 정신을 놓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차게 식은 공기를 맞이하는 것보다 따끈따끈한 지수의 온기가 더 좋으니 그냥 자기로 했다.
아무것도 없이 자는 것보다 누군가의 온기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깊은 안정감이 느껴지니까.
다음날 아침.
내가 눈을 떴을 때, 신아현과 신아진은 이미 떠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