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14화 (115/497)

Chapter 114 - 114. 탐색 (1)

보글보글···

무언가 끓는 소리가 귓가를 자극한다.

킁킁-

영역을 넓혀가는 기름진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스윽- 스윽-

부드러운 손길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느껴진다. 동시에 꽉 닫혀 있는 눈꺼풀 사이로 밝은 햇빛이 비집고 들어와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

깊게 침잠해 있던 정신은 오감이 자극 당하자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끄응···!"

나는 한차례 몸을 비틀어 기지개를 킨 뒤에 눈을 떴다. 가물가물한 시야로 적색 단발이 보였다. 더불어 따스한 눈길도.

뒤통수에 바닥의 냉기가 아닌 사람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걸 보니 한세아의 허벅지를 베고 있는 것 같았다.

"잘 잤어요?"

내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한세아는 내가 일어난 것을 눈치챘는지 옅게 웃으며 물었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해서 더 누워 있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그녀가 힘들겠다 싶어서 꾹 참고 몸을 애써 일으켰다.

"아침입니까? 밤새 별일 없었죠? 크흠."

아직 멍한 머리를 흔들며 한세아에게 물었다. 잠긴 목소리가 나오자 헛기침을 해서 풀어 주었다.

"네, 별일 없었어요. 그리고 그, 현우씨. 죄송해요. 지수씨랑 같이 밤새 불침번 섰다면서요? 진짜 죄송해요! 저도 같이 했어야 했는데······."

"아뇨, 제가 일부러 깨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많이 피곤해 보였거든요. 어제 무리한 거 알고 있으니까 쉴 때 푹 쉬어야죠."

"저만 무리한 게 아니잖아요. 다 같이 힘들었는데···. 그러니까 다음에는 사정 봐주지 말고 꼭 깨워요. 제가 미안해서 그래요."

괜찮다는 내 말에도 미안한 감정을 가득 담아 고개를 젓는 한세아.

"알겠습니다. 지수는요?"

나는 그녀의 반응이 기꺼워 피식 웃었다.

"저기 있어요. 이제 현우씨도 일어났으니까 저는 예린이 상처 좀 보고 있을게요. 소독 한 번 하고 습윤 밴드로 갈아줘야겠어요. 그래야 빨리 나으니까."

마주 웃어 준 한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를 탁탁 털었다. 그녀는 아직 꿈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한 예린을 향해 움직였다.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도서관에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예린은 잠에서 깨지고 않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음식 냄새에 벌떡 일어났을만큼 식탐이 큰 예린이지만 아직 깨지 못한 것을 보니, 그만큼 어제가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았다.

'무리도 아니긴 하지.'

어른인 우리도 힘든데 아이인 예린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오히려 불평없이 따라왔다는 것이 정말 기특했다. 미안하기도 했고.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도서관 내부를 둘러보았다.

화창한 날씨를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밝은 햇빛이 도서관 창문을 통과해 어젯밤에 어두워서 보지 못했던 곳까지 밝혀주고 있었다.

어지럽게 놓인 책장 안의 책들,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부드럽게 마감된 가구들의 모서리, 한때는 작동되었던 컴퓨터를 위한 전기선, 벽면에 그려진 여우, 곰, 푸른 하늘, 강아지 같은 여러 그림들.

그리고 근처에서 불멍을 때리고 있는 지수가 보였다.

분명 혼자서 밤을 지새우지 말고 중간에 나를 깨우라고 했건만. 또 무리를 한 지수에게 가서 한 소리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저벅- 저벅-

내가 지수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가 약간 퀭한눈을 한 채 나를 돌아보았다. 피곤해 보이는 눈과 마주하니 미안함이 솟아올랐다.

'그렇게 깨우라고 말했는데도!'

지수는 나를 보더니 몸을 움찔 떨었다. 꼬리도 이상하리만치 뻣뻣하게 살랑거렸다. 아니, 살랑보다는 삐걱이 어울렸다.

"지수야, 새벽에 나 깨워서 교대하자고 했잖아. 또 혼자 밤을 새고 그래. 너 진짜 혼난다."

자기 잘못을 아는 것 같은 지수에게 나는 약간의 미안함을 담아 그녀를 나무랐다.

"···응."

멍하니 답하는 지수.

"······? 뭐야, 왜 그래. 뭔 일 있었어?"

나는 그녀의 옆에 앉으면서 물었다. 잔소리 좀 해야겠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지금 잔소리가 문제겠는가.

지수의 태도가 뭔가 어색했다.

"참치 캔은 어디서 났어? 그 사람들은 언제 나갔고?"

완전히 끓기 시작한 참치 캔을 보며 물음을 이어 나갔다. 겸사겸사 가스 불도 껐다.

"······아저씨."

지수는 한참을 입술만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떠올리는 얼굴을 하더니 얼굴을 확 붉혔다. 꼬리가 프로펠러마냥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저씨 일부러 안 깨운 건 아니야. 아니, 일부러 안 깨운 건 맞지. 응, 맞아. 신아현하고 신아진이라고 했던가? 친자매인 것 같았는데 둘이 많이 사랑하는 것 같더라. ···좀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

횡설수설하던 지수는 핫, 하고 정신을 차리더니 내 물음에 답했다.

"이거 세아 언니가 예린이 가방에서 몇 개 빼둔 거래. 너무 무거워 하는 것 같아서 캔 몇 개 옮겨담았다고 하더라. 오늘 아침은 이걸로 때우면 될 것 같아. 그리고 그 사람들은 한 시간? 두 시간? 전에 나갔어.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려야 할 곳이 있다던데. 뭐, 다시는 볼일 없겠지만."

"그래?"

"또 아저씨가 자고 있을 때, 내가 아저씨한테서 들은 이야기도 세아 언니한테 전해줬으니까 따로 말해주지 않아도 돼."

지수는 귀를 쫑긋거리면서 말했다. 축 늘어진 어제와 달리, 지금은 매우 쌩쌩해 보였다.

바로 그때.

"···배고파요······."

비틀거리는 좀비가 아니, 예린이 나타나서 버너 앞에 풀썩 앉았다.

아이의 눈은 열기가 남아 있는 참치 캔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얼굴은 잠이 덜 깨 보였지만 귀와 꼬리만큼은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예린이 넘어지지 않게 옆에서 부축해주던 한세아도 뒤따라서 자리에 앉았다.

이로써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하룻밤을 무사히 보내고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일단 다 모였으니 밥 먹고 이야기합시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일행들.

예린이 침을 꼴깍 삼키는 것을 기점으로 모두가 숟가락을 들었다.

***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후.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할지 논의했다.

"그러니까 현우씨 말은 여기 있는 생존자 캠프와 부딪치지 않고 지나가고 싶다는 거죠?"

한세아가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예린의 입가를 닦아주면서 물었다.

"네, 푸른 조각이 신경 쓰이긴 하는데 너무 위험해요. 특히 거기를 차지하고 있는 남자가."

"흐음···. 반이 인간이고, 반이 나무 인간이라니. 힘으로 캠프 생존자들을 찍어눌렀다는 걸 들어 보니 말도 안 통하겠네요."

"···만약 김태진하고 같은 부류라면 변종처럼 엄청난 괴력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겠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예린이 상처가 낫는 대로 움직이고 싶은 겁니다. 굳이 벌집을 건드릴 필요가 없으니까요."

"죄송해요···."

자기 이름이 나오자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든 예린이었지만, 좋은 이야기가 아니란 걸 알게 되자 귀를 축 늘어트리며 울상을 지었다.

"아냐! 여기서 또 식량을 구해가야 하니까! 어차피 바로 움직일 수는 없었어."

나는 황급히 예린의 귀를 쓰다듬으며 말을 덧붙였지만 효과가 좋지는 않았다. 오히려 악화시켰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도 그럴게, 식량 가방을 메고 있던 사람이 예린이었으니까.

"죄송해요······. 제가 안 넘어졌다면 식량도 많았을 텐데···."

더욱 고개를 푹 숙이며 기가 죽은 예린.

"······아. 아니! 식량 가방을 던진 건 나니까! 예린이 너는 잘못 없어!"

나는 당황한 얼굴로 지수와 한세아를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다. 아이를 달래는 것은 영 익숙하지 않았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세아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하더니 침울해 있는 예린을 덥석 안아 무릎 위로 올렸다.

"예린이 무릎 많이 안 아프지?"

"네···."

"연고랑 붕대 밖에 없어서 좀 걱정했는데 그 사람들이 습윤 밴드를 주고 가서 다행이다. 금방 나을 거니까 걱정 말구."

그리고 아이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며 살살 달랬다. 예린은 한세아의 품을 파고들며 고개를 묻었다.

"하아···."

내가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작게 내쉬었을 때, 나를 툭툭 건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지수가 피로한 눈을 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식량 구하러 언제 갈 거야? 나 좀만 쉬었다가-"

"아니. 넌 오늘 여기서 쉬고 있어. 식량은 나랑 세아씨가 구해 올게."

나는 지수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 피로가 풀리지 않은 지수를 데리고 나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오늘 하루 만큼은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뭐?! 왜! 같이 가!"

충격받은 표정을 하고 있는 지수.

"어차피 다 같이는 못 움직여. 누군가 한 명은 남아서 예린이랑 있어야 하고, 그 누군가는 내 말 듣지도 않고 혼자 밤 새운 지수 너야."

"하지만···!"

어떻게 자기를 버릴 수 있냐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지수는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맞아요. 지수씨는 여기서 쉬고 있어요. 어제 고생했잖아요."

한세아의 난입으로 인해 입이 다물렸다. 그녀도 단호한 눈을 하며 지수를 바라보았다.

"······알았어요."

지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숙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붕붕 돌아가던 꼬리도 움직임을 멈췄다.

"그래서 언제 갈 건데?"

그것도 잠시, 고개를 확 들며 물었다.

"지금."

나는 예린을 지수에게 넘겨 주고, 한세아를 일으켜 세우면서 말했다. 한세아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이끄는 대로 자리에서 얌전히 일어났다.

"······? 지금? 진짜? 아니, 지금 간다고?"

잘못 들은 건지 확인하기 위해 여러 번 되묻는 지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가야지. 밥도 먹었겠다, 피로도 풀렸겠다, 날씨도 괜찮겠다, 하니 지금 나가는 게 딱이야. 충분히 쉬었으니 여기서 어기적거릴 필요가 없으니까. 당장 내일 먹을 식량도 부족하고."

나는 유리창 너머를 살펴보며 답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수십의 나무 인간들이 지나갔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한적한 거리.

지금이 밖에 나가서 식량이나 도움이 될 만한 물건들을 탐색할 적기였다.

"저는 준비 끝났어요!"

어느새 나갈 준비를 끝낸 한세아가 외쳤다. 지수는 입을 살짝 벌렸다가 닫았다가 하면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알았어, 조심해서 갔다 와. 나는 예린이랑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오냐. 집 잘 지키고 있어라."

나는 킥킥 웃으면서 지수에게 놀리듯 말했다. 평소라면 놀리는 거냐며 발끈했을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응. 잘 지키고 있을 테니까 다치지 말고, 무사히 돌아와 아저씨."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만약 나랑 세아씨가 오늘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함부로 움직이지 마."

"뭐? 안 돼! 그럼 나가지 마!"

"만약! 만약이라니까? 어어? 내려간다, 바지 내려간다고!"

걱정스럽지만 나를 보내주려고 마음먹은 지수는 어디 가고,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지수만 남았다.

그녀는 손에 힘을 꽉 주며 버텼고, 한세아가 끼어들고 나서야 상황이 일단락될 수 있었다.

"······."

"······."

나는 버려진 강아지처럼 눈망울을 글썽이는 지수를 애써 외면했다. 그녀도 더 붙잡는 것은 일행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지 더는 질척거리지 않았다.

"나 진짜 간다. 어지간해서는 오늘 돌아올 거야. 아까 말한 건 혹시 모르니까 미리 말해 둔 거고. 말하지 않았다가 서로 엇갈리면 큰일이니까 걱정되어서 그랬어."

"···응."

그 뒤로, 지수는 나와 한세아에게 어차피 자기는 쓸 수 없으니 도구 가방도 챙겨가라며 이것저것 챙겨 주었다. 목 마르면 마시라면서 신아현이 남기고 간 생수 2병도 같이.

"가죠, 세아씨."

"넵!"

나와 한세아는 조심 또 조심하라며 신신당부하는 지수와 예린을 도서관에 남겨둔 채 위험한 외부로 발길을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