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5 - 115. 탐색 (2)
부곡동 주민센터 넝쿨 담벼락 앞.
"스읍···."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진한 피톤치드향이 폐를 가득 채웠다가 빠져나갔다.
"스읍- 파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세아도 똑같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에 일말의 개운함이 묻어났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도시 가득 채워진 상쾌한 공기에 우리는 아니, 나는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하늘에서 끝도 없이 쏟아지는 비와 지상에서 덧없이 스러진 수많은 시체들을 양분 삼아 거대한 나무로 자란 식물들은 어울리지도 않게 이토록 상쾌한 공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악취를 모조리 흡수해서 정화한 후 다시 배출하는 그것들은 지구를 깨끗하게 만들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미세 먼지로 인해 뿌연 대기를 가졌을 하늘은 이제는 한없이 푸르른 하늘이 되었다.
공장을 가동하는 인간의 대다수가 죽어 정화된 것인지, 도시를 뒤덮은 넝쿨과 거대한 나무들이 그만큼 정화 능력이 뛰어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방향성이 지구에 살고 있던 인간들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을 따름이었다는 것이다.
거대한 나무들은 인간과의 공생이 아닌 학살을 선택했으니 말이다.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상념을 마치며 입을 열었다.
"세아씨, 아까 지도 챙겨 온 것 좀 봅시다."
"넵! 여기요."
한세아는 주머니에 넣고 있던 종이 뭉치를 꺼내 넓게 펼쳤다. 그녀의 어깨에는 식량을 담아올 가방과 도구 가방이 꽉 매여 있었다.
부스럭!
내가 지도라고 지칭하긴 했지만, 무슨 목적으로 사용되는 지도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건물에서 나가기 전, 1층 민원실에서 얻은 지도는 구역별로 노랑, 파랑, 초록, 분홍으로 색이 나눠진 처음 보는 형태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일철에 지적편집도라고 쓰여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건물 이름만 쓰여 있지 않았을 뿐이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지도의 역할도 충분히 하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역 쪽으로는 가면 안 될 것 같죠···?"
나와 같이 지도를 유심히 보던 한세아가 작게 물었다. 그녀의 눈은 지도와 주민 센터 바로 옆에 있는 아파트 단지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제 나무 인간들이 우르르 역 쪽으로 몰려갔으니까요."
나는 도로에 잠들어 있던 수많은 나무 인간들이 주민센터를 지나쳐 도시 중앙 쪽으로 갔다는 것을 떠올리며 답했다.
적어도 수십의 나무 인간들이 몰린 역 방향과 나무 인간이 빠진 대로 방향.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당연히 후자다.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대로가 안전하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적으로는 훨씬 낫지 않겠는가.
"일단 어제 저희가 빠져나왔던 덕영대로쪽으로 가봅시다. 그쪽 주변에도 건물이 아예 없는 게 아니니까 빈 가게 같은 곳 뒤져 보면 될 것 같아요."
"좋아요."
고개를 굳게 끄덕인 한세아를 뒤로하고, 주민센터 근처 길거리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넝쿨 벽을 살짝 벌렸다.
타닥···
넝쿨 줄기가 밀려 올라가며 희미한 소리를 냈다.
조용한 길거리.
수십의 나무 인간들이 진군한 탓인지 곳곳에 조각난 나무 껍질과 반으로 꺾여 내부 전선을 드러내고 있는 가로등이 보였다.
서로 먼저 가겠다며 엎치락뒤치락 하던 나무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낙오한 녀석들이 하나, 둘 정도는 있을 법도 했지만, 딱히 그런 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나가죠. 근처에 나무 인간들이 안 보이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넵, ······지수씨랑 예린이는 잘 있겠죠?"
펼친 지도를 정리하고, 정신을 바짝 차린 표정으로 답하던 한세아는 고개를 뒤로 돌려주민 센터를 바라보았다. 둘만 두고 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잘 있을 겁니다. 넝쿨이 건물을 가려주고 있기도하고,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지수도 알아서 잘할 거고. 저랑 세아씨가 식량만 구해 오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갑시다."
말 그대로 지수는 어련히 잘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식량만 무사히 구해 오면 문제 될 일은 없었다.
이윽고, 나와 한세아는 넝쿨 담벼락을 넘어 적막이 내려앉은 길거리로 빠져나왔다.
부스럭- 부스럭- 부스스-
단단한 아스팔트 도로를 뚫고 자란 수풀이 바지를 스친다.
우리는 약간은 황량하다는 느낌을 주는 길을 계속 걸었다.
주변은 싱그러운 녹색으로 가득 차있건만,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와 한세아는 3차선 도로가 뻗어 있는 사거리에 도착했다.
"직진? 아니면 좌회전? 우회전은 아무것도 없으니 고를 필요도 없고···."
나는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앞으로 가는 게 어때요? 앞에 원룸촌···까지는 아니더라도 빌라들 모여 있는 것 같은데. 보통 저런 곳에 편의점 같은 시설들 꽤 있잖아요. ···아닌가?"
한세아의 말에 예전 기억이 떠오른다.
한때 원룸에서 자취를 하며 군대를 전역해서 민간인이 된 신분을 한껏 만끽한 적도 있었다. ···분명 있었을 것이다.
'아직도 내가 지냈던 원룸이 어디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고 있지만.'
찜찜하기는 했으나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고, 지금 중요한 것은 원룸 근처에 국밥, 족발 같은 식당이나 호프집, 포차 같은 술집들이 자리 잡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였다.
"아뇨, 세아씨 말이 맞습니다. 멀쩡해 보이는 빌라도 뒤져 보고, 편의점도 찾아보기로 했으니까 앞으로 가야겠네요. 너무 멀리 가는 건 좀 그러니까 최대한 이 근처에서만 뒤져보는 걸로 하고."
한세아의 제안에 동의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3차선 도로가 있는 좌측이 아닌 2차선 도로가 있는 전방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수풀을 헤치며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건물을 이루고 있는 벽돌의 색은 다르더라도 서로 엇비슷한 디자인을 가진 빌라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대체로 3층 또는 4층의 높이를 가진 빌라들, 각층 베란다 외부에 하나씩 돌출되어 설치된 실외기들, 굳게 닫혀 있는 유리창들, 벽면을 타고 올라간 넝쿨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바닥에서 솟구쳐 나온 듯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나무뿌리에 관통을 당했느냐 당하지 않았느냐 였다.
아스팔트 도로 곳곳을 파고든 나무뿌리들을 따라 시선을 쭉 옮겨보면 그것들은 머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저건 산이 아니라 나무 그 자체일수도 있겠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나무뿌리들까지 합치면 어중간한 높이를 가진 산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게, 뿌리가 큰데다가 길기까지 하고 당장 보이는 것만 세도 수십 줄기에 달하니까.
끔찍한 상상에 몸서리가 쳐졌다.
흉측하게 무너진 건물들을 5채 정도 지나쳤을 때,
우리는 그제야 건물을 탐색하는 것이 마냥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멀리 가야겠는데요, 현우씨."
한세아가 주민 센터가 있는 방향을 계속해서 뒤돌아보며 말했다. 거리가 멀어질 때마다 울상을 짓던 그녀는 이제는 약간 포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 건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들어갈 수 있는 빌라들은 꽤 많았지만, 하나같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섣불리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한창 방을 뒤지다가 건물이 폭삭 가라앉으면 큰일이지 않은가.
식량을 찾으러 갔다가 오히려 목숨을 내놓고 가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다.
부스럭- 부스럭-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주변을 경계하면서 걷다보니 마침내 나와 한세아는 골목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어○이 보호○역 천천○]
붉게 칠해진 도로 위에 드문드문 드러나는 흰색 글자들.
바로 우측에 20층 정도 되는 푸르지오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어 있어서 속도 제한이 걸린 도로인 듯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당연히 없겠지.'
나는 고층 아파트를 감싼 거대한 나무를 보며 생각했다.
아파트 겉표면에는 가느다란 균열이 여러 개 나 있었다. 아마도 옥상에 붙어 있는 거목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생긴 금인 것 같았다.
현대 건축 기술의 힘인지 무너지지 않고 있는 푸르지오 아파트.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저런 아파트 단지가 지어지지 않은 곳은 없으니 딱히 피할 수 있을 만한 공간도 없었다.
그저 무너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빠르게 지나갈 뿐.
그때,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둘러보던 한세아가 헛숨을 들이키더니 어딘가를 가리켰다.
"현우씨! 저기 편의점!"
그녀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이동한 나 역시도 흰색과 밤색 벽돌이 어지럽게 섞인 빌라 1층에 있는 편의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GS25-의왕장안마을점]
그것은 좌우측 빌라가 무너지면서 생긴 콘크리트 덩어리들 사이에서 홀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진이 일어나고 건물이 무너지는 난리통에도 용케 부서지지 않은 채였다.
편의점은 내부의 크기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일단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사람이 둘이나 셋만 들어가도 북적북적 거릴 만큼 작아 보였다.
내부를 전부 가리고 있는 벽면에 붙은 파란 스티커 때문에 그 안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멀쩡해 보이는 편의점을 찾은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아···."
나는 편의점이 있는 곳을 보며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한세아도 그것이 있는 위치를 보며 앓는 소리를 냈다.
'하필···.'
수많은 건물들로 인해 부족해진 주차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용 주차장.
급하게 나가려고 했다가 실패한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다양한 차량들이 방치된 채, 지나갈 수 있으면 지나가 보라는 듯이,
편의점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