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7 - 117. 탐색 (4)
참치캔 둘, 다 녹은 초코바 하나.
나와 한세아가 편의점을 쥐잡듯이 뒤진 결과로 얻은 수확물이었다.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훑어보느라 온몸이 먼지투성이가 된 것치고는 매우 빈약한 소득.
내부 창고라도 있었다면 무언가 더 얻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이 편의점은 작은 평수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창고는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도 부족한 물건은 당일 주문하고 다음날 배송받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던 같았다.
창고 정리할 필요가 없는 아르바이트생에게는 편한 소리였겠지만, 식량 하나하나가 소중한 나와 한세아에게는 아쉬운 소리가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현우씨, 참치캔은 가져가고 초코바는 저랑 나눠 먹어요."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던 한세아가 초코바 비닐을 뜯으며 말했다. 유통기한도 얼마 남지 않았고, 신경을 많이 썼더니 당분 보충이 절실한 시점이었기에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티딕- 틱-
진득하게 녹은 초콜렛이 뜯어지는 비닐과 함께 묻어나온다.
한세아는 잠시 멍하니 초코바를 보더니 내게 내밀었다.
"현우씨 먼저 한입 해요. 한입씩 하면 딱 맞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그녀가 내민 초코바 비닐을 좀 더 벗겨서 내용물이 밖으로 드러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드러난 부분만큼 베어 물었다.
아직은 바삭함을 유지하고 있는 과자, 그 안에 층층이 쌓인 카라멜, 보물처럼 숨겨져 있는 아몬드.
입안에 퍼지는 달달함이 살짝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던 정신을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약간의 텁텁함과 초코바가 주는 여운을 즐기고 있을 때,
오독-
옆에서 견과류가 씹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한세아가 초코바 안에 자리 잡은 아몬드를 꼭꼭 씹어 먹는 중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자리 잡고 있던 침울함은 초코바가 주는 달콤함에 어느새 자취를 감춘 뒤였다.
순식간에 초코바 하나를 분쇄한 나와 한세아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식량 가방을 채우기 위한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시 기운 내서 움직이기로 했다. 움직여야만 하기도 했고.
"자, 다시 힘내서 가 보자구요!"
한세아가 마음을 다잡은 표정으로 밝게 말했다.
그래도 초코바 하나로 그녀를 기운나게 할 수 있다니. 참으로 남는 장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보는 것보다 밝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는 것이 훨씬 좋았으니까.
"네, 제가 앞장설 테니 조심히 따라오십쇼. 세아씨."
나는 망치를 꽉 쥐며 말하는 것과 동시에 문으로 이동했다. 아니, 이동하려고 했다. 한세아가 나를 멈춰 세우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앗! 현우씨, 잠깐만요!"
"······?"
한세아는 내게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더니 순식간에 내 입가를 훑었다. 그리고 손가락에 묻어나온 초콜렛을 쪽 빨더니 입가를 가리고선 히히 웃었다.
"입가에 초코 묻어 있었어요. 이제는 없지만!"
"···크흠! 큼. 말로 해주셨어도 괜찮았는데요."
나는 괜스레 민망한 마음에 헛기침하며 투덜거렸다.
"에이, 정 없게. 겸사겸사죠. 닦아도 주고, 맛도 좀 보고, 달달하네요."
한세아는 기분이 좋은 듯 눈초리를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흑색과 적색이 신비롭게 섞인 눈동자가 빛에 반짝였다.
"···아무튼! 갑시다, 빨리."
"네~."
이윽고, 나와 한세아는 편의점 내부에서 건물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제 다시 숨을 죽여야 할 시간이었다.
맑고 푸른 하늘, 간간이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아파트 단지를 감싼 거대한 나무, 방치된 차량을 뒤덮은 넝쿨,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수풀.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주변의 색은 파랑에서 초록으로 바뀌어 간다.
"현우씨, 이 편의점 상태 보니까 다른 편의점은 굳이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럼요?"
"건물을 털어야죠.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 쉽게 털지 못한 원룸 같은 곳이요."
확실히 한세아의 말처럼, 털릴대로 털린 편의점을 보니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컸다.
여기저기 힘들게 돌아다니며 기껏 찾은 편의점에서 구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만큼 기운 빠지게 하는 상황도 없지 않겠는가.
"저한테 푸른 조각이 있잖아요. 남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문고리를 부수는 동안 위험에 처할 때, 저는 조각을 갖다 대고 문만 열면 되니까요. 그러니 비밀번호만 알면 건물 터는 건 상대적으로 쉬워요. 제가 모텔에 있을 때 그런 식으로 물자를 모았었어요."
한세아의 말에 그녀가 거점으로 삼았던 모텔에서 보관되고 있던 수많은 물자들이 떠오른다.
여러 개의 방을 채울 정도로 다양하고, 많은 양을 자랑했던 식량과 도구들.
'어쩐지 물건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더라니.'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비밀번호는 공인 중개사나 부동산 가면 얻을 수 있구요. 각 건물이나 구역마다 통일된 마스터 비밀번호가 있거든요."
한세아가 가진 푸른 조각으로 도어락을 작동시킬 수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부동산에 마스터 비밀번호가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오···. 근데 그럼 처음부터 건물을 털었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위험을 감수하고 망치로 문고리를 부술 생각만 했던 나는 처음에 감탄했다가 이내 떠오르는 의문에 의아함을 가지고 물었다.
한세아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말 그대로 상대적으로 쉽다는 거죠. 굳게 닫힌 문 너머로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편의점에 물자가 남아 있었으면 굳이 건물 안까지 확인할 필요가 없기도 하구. 그냥 우선순위 차이? 그런 거예요."
"하긴, 그렇긴 합니다."
"······또 현우씨가 다치는 게 싫어요. 저한테 총이 있다고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별 도움도 안 되니까···. 그냥 최대한 안전한 방법으로만 식량을 찾고 싶었어요. 어차피 이제는 어쩔 수 없지만요."
"······."
나는 말없이 불안한 표정을 띤 한세아의 손을 잡아주었다. 초코바가 주는 달콤함이 사라지고 생긴 빈 자리에는 어느새 씁쓸함만이 남아 있었다.
"얼른 가요. 아까 보니까 부동산이 근처에 있더라구요."
한세아는 애써 웃더니 손을 들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나도 한세아가 본 것을 볼 수 있었다.
부동산은 머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니, 오히려 바로 옆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넘버원 공인중개사]
나와 한세아가 나왔던 GS25 편의점 좌측 건물 1층에 공인중개사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가야 할 곳과 해야 할 일이 정해진 상황 속에서 멈칫거리고 있을 여유는 없었기에 우리는 한세아가 발견한 부동산 건물 안으로 곧장 들어갔다.
"세아씨, 손 다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넵."
1층 부동산 안으로 들어온 나와 한세아는 빠르게 내부의 모습을 훑으며 경계했다.
내부는 난장판이었다.
부동산 전화번호 스티커와 월세, 전세, 매매를 광고하는 전단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을 유리 벽은 진작에 허물어져 바닥을 장식하고 있었다.
뒤로 넘어진 손님맞이용 가죽 소파, 유리문을 뚫고 나간 원목 테이블, 바닥에 쓰러진 옷걸이, 스크린이 깨진 모니터, 거칠게 찢긴 벽면의 지도.
파괴된 대부분의 흔적들은 한쪽 방향으로 쏠려 있었다.
뻥 뚫린 유리 벽 너머로 엉망으로 찌그러진 차량이 전봇대를 박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아마도 저 차량이 급발진하다가 부동산을 관통한 것 같았다.
뒤 쪽 벽이 콘크리트였다면 어림도 없었겠으나, 이 공인중개사는 삼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가능했던 것 같았다.
빠득- 빠득- 빠드득-
바닥에 깔린 유리 조각이 신발 밑창에 눌려지며 제 존재를 알렸다.
이윽고.
나와 한세아는 부동산 사무실 내부를 본격적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서로의 위치를 계속해서 확인하면서.
"현우씨, 서랍장에 들어 있는 서류철 같은 종이 뭉치 확인해 보세요. 여기 주인이 어르신인 걸 보니까 비밀번호가 적힌 포스트잇을 남겨 놓았을지 몰라요. 젊은 사람들은 스마트폰에 다 저장해서 못 찾는다고 봐야 하지만 어르신들은 굳이 종이에 써두는 경향이 있더라구요."
한세아는 바닥에 엎어진 작은 액자를 보며 말했다.
"···그거 편견 아닌가?"
그녀가 시킨 대로 서랍장을 뒤적거리던 나는 약간 떨떠름한 기분이 들어 작게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냥 조심하시라고요. 다치지 않게."
"······?"
고개를 갸웃거린 한세아는 사무실을 마저 구석구석 뒤집어 엎었다. 그녀가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들어 올리며 쓸 만한 것이 있는지 찾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려 내가 해야할 일을 이어나갔다.
촤르륵- 촤르륵-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지속된 습기의 습격에 잉크가 번진 서류 뭉치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가득했다.
뭐, 알아볼 수 있다고 해도 지금 우리에게 그다지 쓸모가 있는 정보는 아니었겠지만.
분명 그것들이 예전에는 큰 가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한낱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
관리하는 사람도 없는 집, 건물, 땅과 관련된 문서를 가지고 있어봐야 어디에 쓰겠는가.
이런 세상에서 부동산에 있는 각종 문서들은 대부분 가치를 잃을 수 밖에 없었다.
안타깝지만 말이다.
그렇게 쉬지 않고 서랍장을 뒤적거리고 있는 그때, 나는 서랍 칸 제일 아래에 코팅된 종이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
다른 종이는 대충 보관되고 있었건만, 홀로 코팅이 된 상태로 들어 있는 문서라니?
나는 이것이 중요 문서일 것이라고 직감했다. 혹은 그에 준하거나.
팔랑-팔랑-
코팅지가 내 손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소리를 낸다.
- 삼동 589~592, #5544#
- 삼동 596~598, #4620#
- 삼동 601~604, #0150#
- 삼동 ······
- 삼동 ······
코팅된 종이에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숫자들.
"세아씨! 이거 맞아요? 마스터 비밀번호인가 하는 거 찾은 것 같은데."
"정말요? 어디 봐요."
한세아는 탐색 작업을 중단하고 곧장 내게로 다가왔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문서를 살피더니 가방에서 지도를 꺼냈다. 주민센터에서 얻은 지적편집도였다.
"잘했어요, 현우씨. 마스터 비밀번호가 맞는 것 같아요. 삼동 뒤에 써진 숫자는 아마 여기 지도에 나온 것처럼 구역을 나타내는 숫자인 것 같아요. 여기 봐요. 각 건물 블록마다 숫자가 써있죠?"
한세아는 지도 곳곳에 손가락을 짚어 어디를 짚고 있는지 알려주었다. 그녀의 말처럼, 지도와 문서에 동일한 숫자가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근데 보통 크게 하나로 통일하던데, 여기는 왜 이렇게 여러 개로 나눈 건지 모르겠네요. 한눈에 보기 귀찮게시리."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이···."
"삼동 602네요. 정확히는 602-1이요. 저희가 뒤질 건물은 602-2이구요. 어차피 601부터 604까지 비밀번호는 동일하니까 크게 중요하진 않지만요."
한세아의 부연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렇군요. 그럼 필요한 것도 얻었으니 건물 탐색하러 가기만 하면 되겠네요."
"좋아요. 일단 아까 저희가 나온 편의점 건물 2층부터 시작해요. 거긴 건물이 제일 멀쩡해 보였으니까요."
나와 한세아는 고개를 돌려 해당 건물을 바라보았다.
1층은 상가, 2층부터 4층은 주택으로 된 빌라.
이제는 그곳으로 향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