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8 - 118. 탐색 (5)
"주민센터에서 이거 가져오길 잘한 것 같아요."
한세아가 넓게 펼친 지도를 정리하며 말했다.
"건물 이름도 아니고 구역 번호만 적혀 있어서 지도 없었으면 이건가? 아니면 이거? 하다가 시간 많이 잡아 먹혔을 게 분명해요."
"그러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지금 나와 한세아가 있는 곳이 그래도 부동산이라 지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갈기갈기 찢어지고 곳곳에 핏자국이 튀어 있어 지도로서의 효용 가치가 전혀 없었다.
형태라도 멀쩡했으면 모르겠으나 그마저도 온전치 않으니 전혀 알아볼 수도 없었고, 그렇기에 쓸모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한세아의 말마따나 주민센터에서 가져온 지도가 없었더라면 온전한 지도를 찾으랴, 지도를 찾은 후에는 각 건물에 맞는 마스터 비밀번호를 쳐보랴 하면서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겠지.
어느새 해가 중천에 뜬 지금, 완전히 해가 지기 전에 지수와 예린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했으니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이내 공인중개사 사무실에서 나와 편의점이 붙어 있는 건물로 다시 돌아왔다.
"현우씨! 입구 여기 있어요!"
건물 사이에 있는 틈으로 들어간 한세아가 내게 손짓하며 불렀다.
공동현관문은 들어가기 쉽게, 찾기 쉽게 대로변 쪽에 위치해 있는 것이 일반적이건만.
1층을 점거한 카페나 편의점, 부동산이나 치킨집 같은 가게가 있으니 주택으로 연결된 현관문이 그나마 남는 자투리 공간인 건물 옆면으로 옮겨진 것이다.
"공동현관문이 이런 곳에 있는 건 처음 보네."
무언가 손해 본 느낌에 나는 괜스레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한세아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공동현관문이 박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건물 옆면에 자리 잡은 공동현관문은 1층의 상가와 달리, 급발진한 차량들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지만 우리처럼 건물을 털러 온 사람으로부터는 안전할 수 없었나보다.
누군가 둔기로 강하게 내려친 듯 현관 유리는 바닥에 허물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탓에 들어가기 전, 건물 마스터 비밀번호를 한번 시험해 보기로 했던 계획은 어쩔 수 없이 잠시 뒤로 미뤄야 했다.
"유리 조심하세요, 세아씨."
"넵. 현우씨도요."
이윽고.
빠득- 빠드득-
나와 한세아는 바닥에 어지럽게 흩뿌려진 유리 조각을 피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섰다.
우선 건물 안에 우리 말고 다른 소리가 들리는지 가만히 서서 확인했다.
비록 나와 한세아에게는 지수만큼 좋은 청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는가.
"···제가 앞장 설 테니까 조심히 따라오세요."
잠시 온 신경을 귀에 쏟던 나는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말했다. 그리고 망치를 꽉 움켜쥔 채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지금 우리가 있는 건물은 총 4층.
그중 원룸으로 사용되는 층은 2층부터 4층이다.
마스터 비밀번호도 알고 있으니 빌라를 터는 시간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말이다.
저벅- 저벅- 저벅-
내가 발을 내딛는 소리와 조용히 뒤따라오는 한세아의 발걸음 소리가 겹치며 계단을 타고 작게 메아리 친다.
"후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원룸이 존재하는 2층에 발을 올릴 수 있었다.
2층의 복도를 따라 규칙적으로 배치된 원룸 8개가 보인다.
좌우로 각각 4개씩 자리 잡은 방.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이여야할 시간이었지만, 나는 걸음을 멈춘 채 속으로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1층 공동현관문을 누군가 강제로 부순 것처럼 2층의 각 원룸의 현관문 문고리도 누군가 둔기로 강하게 내려친 듯 떨어져 있거나 겨우 매달려 대롱대롱 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망가진 문들은 대부분 활짝 열려 있거나 비스듬히 열려 있어 내부가 살짝 보였다. 더불어 문을 더럽게 장식하고 있는 핏자국들까지.
아마도 한세아가 말해주었던 것처럼 문을 강제로 열려고 하다가 위험에 빠진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겠지.
"현우씨, 문이 열린 곳은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털렸을 가능성이 크니까 우리가 다시 뒤질 필요는 없거든요. 문이 열린 곳 중에서 나무 인간들이 숨어 있을 수 있으니까 괜한 자극을 주지 않는 게 낫기도 하구."
내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한세아가 말했다. 그녀는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전방을 살펴보고 있었다.
"······."
"현우씨가 판단해요. 저는 현우씨 결정을 따를게요.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저는 싸울 때 그닥 도움이 안 되니까···. 아, 그래도 보기만 한다는 건 아니에요! 오해 하지 마세요···?"
"음···, 그럼 바로 3층으로 올라갑시다."
"알았어요."
나와 한세아는 2층에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곧장 3층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내가 내린 결정이었지만 괜스레 드는 아쉬움에 고개가 뒤를 향하려는 듯 자꾸만 움찔거렸다.
그렇게 도착한 3층은 2층보다는 상황이 나은 것 같았다. 파괴된 문이 상대적으로 적어 보였기━
"······!"
코너를 돌고 3층 복도를 살펴보던 나는 급하게 한세아를 뒤로 물리며 망치를 꽉 쥐어야만 했다.
[·········]
굳게 닫힌 문과 문고리가 부서져 열려 있는 문을 지나 도달할 수 있는 3층 복도의 끝.
그 끝에 나무 인간 하나가 멍하니 고개를 쳐든 채 복도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을 보고 있었다.
등에 잔뜩 해진 가방을 메고 있는 나무 인간.
그런 놈의 손에는 장도리 하나가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붙잡혀 있었다.
아니, 붙잡혀 있다 못해 나무 껍질이 장도리를 뒤덮고 있어서 마치 하나로 이어진 것처럼 보였다.
'···우리처럼 건물을 털기 위해 왔다가 당했나?'
2층과 달리 3층은 털다 말았던 상태로 남아 있으니 아마 저 나무 인간이 2층을 털었던 생존자였을 것이다.
혹은 나와 한세아처럼 후발주자였는데 예기치 못한 봉변을 당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지금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처리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
만약 그냥 넘어간다면 전자 도어락 열리는 소리에 이끌릴 수 있으니 지금 처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나는 한세아를 보며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가 멈추고, 그저 손가락을 일자로 펴 조용히 하라는 신호만을 보냈다.
지금은 말소리조차 함부로 내서는 안 되니까.
한세아는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내 손을 한번 꽉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찰나에 불과했으나 한세아가 가진 온기가 내 손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저벅···
한걸음.
저벅···
또 한걸음.
저벅··· 저벅···
나는 복도 끝 나무 인간에게 서서히 다가가면서 끊임없이 곁눈질로 문이 열려 있는 원룸 내부를 살펴보았다.
내가 노려야 하는 건 눈앞의 나무 인간이지만 놈에게만 몰두하다가는 혹시나 있을 다른 방 안에 숨어 있는 나무 인간의 위협에 바로 대응할 수 없으니까.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내부는 예상한 것처럼 난장판으로 변한 모습이었다.
스쳐 지나가면서 본 것이기에 자세히 보지는 못했으나 각종 옷가지, 신발, 기타 잡동사니들이 모조리 꺼내져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저벅
마침내 나무 인간의 등 뒤에 도착한 나는 망치를 천천히 높게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묵직한 망치 머리가 상황에 맞지 않게 공기를 살며시 들어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쿵! 쿵! 쿵!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긴장감이 심장을 거세게 박동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후우···.'
속으로 심호흡을 한 후,
부우웅-!
나무 인간의 머리를 향해 망치를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조금 전까지 공기를 살며시 들어 올리던 망치 머리는 이제는 강하게, 둔탁하게 허공을 가르며 목표를 향해 곧장 날아갔다.
망치가 놈의 머리통을 박살 내기 직전,
까드드드득!
무언가를 느낀 나무 인간이 머리만 180도로 돌리며 나를 직시했다. 오직 한쪽만 남은 놈의 눈은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무감정했기에 나는 더욱 소름이 돋았다. 서로가 서로를 살아 있는 것으로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
쐐액-
그 순간, 놈이 장도리를 쥐고 있는 오른손을 크게 휘둘러 역으로 나를 노려왔다.
"···이런 씹!"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이 점점 더 거세지면서 주변 상황이 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 숨소리와 놈의 움직임이 길게 늘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미 기세를 탄 망치를 강제로 멈춰 세우고 몸을 피하기에는 늦어도 너무 늦은 상황.
결국 놈의 장도리가 내 숨통을 끊는 것보다 내 오함마가 놈의 숨통을 먼저 끊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 판단한 나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나무 인간의 머리통을 부수기 위해 팔에 힘을 주었다.
강하게, 더 강하게.
좀 더 강하게!
빠악!
내 망치가 나무 인간의 머리통을 부수는 것과 동시에 놈을 둘러싸고 있던 나무 껍질들이 쪼개지며 주변으로 휘날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쩌적- 파바박-!
여러 개의 작은 조각으로 변한 나무 껍질들이 벽에, 창문에, 문에 가리지 않고 사방으로 터지듯 흩어진다.
"······!"
나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나무 인간이 쓰러질 때까지 망치에 체중을 한가득 실어 내리눌렀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이제는 편하게 잠들 수 있도록.
이내 머리를 잃은 놈의 몸체가 힘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무 인간의 몸이 서서히 쓰러지기 시작하자 놈의 팔이 강제로 위로 들려지면서 쭉 뻗은 형상을 취하게 되었다.
나는 최소한의 소음으로 나무 인간의 머리통을 터트리는 것은 성공했다.
그래, 나무 인간을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는 것은 성공했다는 말이다.
···다만 문제는.
힘을 잃어가는 몸체와 달리 나무 인간이 휘두른 장도리만큼은 여전히 기세가 죽지 않았으며, 오히려 놈 또한 생의 마지막이라는 듯 더 강하게 휘둘러 오고 있었을 따름이었다는 것.
"현우씨! 안 돼···!"
뒤에서 다급하게 한세아가 달려오며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콰앙-!
···파편이 휘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