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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120화 (121/497)

Chapter 120 - 120. 탐색 (7)

끼이익······

오랫동안 일하지 않았던 경첩이 죽는소리를 토해내며 힘겹게 문을 열었다.

'내 원룸 문도 이런 소리를 내면서 열렸었는데.'

그와 동시에 그동안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텁텁한 공기가 바깥으로 훅 빠져나왔다.

'이제 또 기침하면서 나를 구박하겠지.'

"콜록···!"

숨이 턱 막히는 공기에 기침을 내뱉는 누나 아니, 한세아.

하지만 내가 예상했던 잔소리는 이어서 들리지 않았다.

앞으로도 들을 수 없을 가능성이 높은 누나의 잔소리를, 그저 속으로 기억을 되새기면서 곱씹을 수 있을 뿐이었다.

누나의 행방조차 알 수 없는 현실.

그것이 참으로 야속했다.

- 내가 환기 좀 시키라고 했지! 불도 좀 키고! 아주 그냥 어둠의 자식이지?

- ···누나, 언제적 단어를 말하는 거야? 가끔 보면 누나가 나보다 더 틀 같아. 아니,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틀이 맞긴 하구나.

- 뭐? 이게 죽을라고!

- 악! 아파! 아악!

- 어딜 하늘 같은 누님을 놀려? 이제 그만 일어나. 누나는 이제 출근할 거야. 밥 잘 챙겨 먹고.

- 내가 무슨 애인가? 어련히 챙겨 먹을 테니 너무 걱정 마쇼.

- 오늘 중요한 프로젝트 때문에 야근할 수도 있으니까 나 기다리지 말고 자, 알았지?

가지 마.

- 원래 연구원은 밥 먹듯이 야근하고 그래?

- 그냥 그런 시즌이 있는 거지.

- 무슨 프로젝트이길래 그래? 이번에 새로 시작하는 그거 말하는 거지?

하지 마, 누나.

- 나도 잘 몰라. 가 봐야 알 것 같은데. 아빠가 오늘 알려 준다고 했으니까.

- ···내가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뭔가 아저씨 요즘 이상하지 않아?

- 뭔 소리야, 또?

- 아니···. 그냥 말도 잘 안 하시고, 좀 변한 것 같아서.

-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 별일 아닐 거야. 뭐, 정 걱정되면 내가 가서 아빠 상태 좀 보고 알려줄게.

가지 마. 제발···.

- 아니면 오늘은 누나 따라오던가. 겸사겸사 아빠도 보고.

- 아, 그건 안 돼. 나 오늘 약속 있음.

- 어이구! 네가 퍽이나 약속이 있겠다! 싫음 말아. 난 더 늦기 전에 나가야겠다. ···나 간다?

- 응, 올 때 메로나.

- 네가 사 먹어! 자식아!

쿵-

···미안해.

내가 따라갔어야 했는데.

내가 망설이지 말고 따라갔었다면, 세상이 변하는 것은 막지 못했을지라도 적어도 누나가 어디 있는지는 알았을 텐데.

이제는 얼굴도 가물가물해진 누나.

그녀는 정체 모를 프로젝트에 참여한 날부터 점점 수척해졌었다.

내가 걱정스럽게 물어보아도 돌아오는 답은 '걱정하지마'라는 말뿐.

'왜 나한테 숨긴 거야?'

그렇게 시간이 지나 3월 5일이 되었을 때, 나는 눈에 띄게 상태가 이상해진 누나가 준 알약을 먹는 것과 동시에 정신을 잃고 말았었다.

'왜? 나한테 뭘 먹인 거야? 내가 먹은 게 대체 뭐야?'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세상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뒤바뀌어 버린 상태였고.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해주었더라면···.'

아마 누나가 참여한 프로젝트는 세상을 이렇게 만든 것에 크게 일조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누나를 믿고 있었다. 누나가 자기 뜻으로 세상을 망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동안 보아온.

내가 그동안 마음에 담아온.

누나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 현우야, 살아남는다는 것은 모든 숨탄것들의 숙명이야. 너도 힘들다고 포기하지 말고, 힘들 때는 언제든지 말해. 나는 항상 네 편이야. 그러니까 ···절대로 사는 걸 쉽게 놓아서는 안돼.

그도 그럴게, 누나는 어린 내가 혼자 남았을 때부터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했었단 말이다.

나도 누나 덕분에 살 수 있었고.

그런 사람이 갑자기 지구의 수십, 수백억에 달하는 생명들을 학살하다 못해 멸종에 가깝게 죽여버렸다고?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게 일언반구도 없었던 것은 속상했지만 필시 다른 연유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해도 지금의 현실이 원래대로 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까지 누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책임을 져야만 한다면 나도 같이 짊어질 것이고, 만약, 정말로 만약에 그럴 수 없는 상태라면 내가 대신 짐을 들 것이다. 나 혼자서라도. 어떻게든.

그게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보답이었으니까.

그리고.

말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드는 후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에 드는 자조와 함께 뒤이어서 떠오르는 또 하나의 의문.

대략 4개월간 기억의 공백.

그리고 좀 더 사라진 내 과거의 기억들.

내가 4개월 동안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예전에 어디에서 살았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 이름이 '이현우'인 것은 확실하건만.

과거에 살았던 장소에 대한 기억은 사소한 것이라 잠시 잊을 수 있다고 쳐도, 끝까지 떠올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게 이상한 현상이었다.

기억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모르겠으나, 벌레가 파먹은 듯 군데군데 부분적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오히려 위화감이 가득 느껴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기억나는 건 이름, 나이, 어릴 적의 추억.

기억나지 않는 건 정체 불명의 알약을 먹은 전후로 대략 4개월 정도의 기억. 총 8개월 혹은 1년 정도의 기억들.

그나마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눈을 뜨고 나서부터 겪은 모든 것들.

하지만 그것들은 최근에 겪은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뭐지?

고작해야, 많아 봐야 1년 정도의 기억이 나지 않는 것뿐이 아니던가.

겨우 그 정도일 뿐인데.

- 몇 번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제가 본 여러 인간이 섞인 사람은 정신이 매우 불안정해 보였어요.

'나는···.'

어째서 정신의 혼란을 느끼고 있는가?

그것도 왜 하필 지금? 이렇게 갑자기? 도어락 열리는 소리 좀 들었다고?

묘한 위화감이 머리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내가 인지하지 못한 문제가 또 있나?

내 기억? 내 정신? 어느 부분이지?

'···아니. 아니야.'

나는 이번에도 떠오른 의문을 강하게 부정했다.

내 정신은 오롯이 나의 것이다.

다른 불순물이 이리저리 합쳐진 것이 아닌 온전하게 하나인 내 의식 그대로.

아마도 내 기억에 이상이 생긴 이유는 결합 문제가 아닌 다른 이유일 것이 분명하다.

수상한 알약을 먹은 전후의 기억이 사라졌으니 알약의 부작용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

내가 지금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것도 그동안 누적된 피로가 한번에 터져 머리가 잠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피곤함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니 하루 푹 쉬면 괜찮아질 것이다.

'하지만···.'

만약 아니라면?

불안감이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바로 그때.

"···씨! 현우씨!"

한세아가 내 어깨를 흔들면서 나를 불렀다. 나는 그제야 겨우 회상에서 벗어나며 정신을 차렸다.

"······아."

"현우씨. 왜 그래요? 역시 아까 무리한 거죠? 좀만 쉬고 들어갈까요? 아니다. 조금만 더 힘내봐요. 쉬더라도 안쪽에서 쉬는 게 낫잖아요."

"괜찮습니다.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요. 별일 아닙니다."

나는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의문들은 지금 해결할 수가 없었고, 이제는 현실로 눈을 돌려야 할 때였으니까.

어찌 되었든, 내 목적은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바로 남산에 있는 졸린사 연구소로 가는 것.

그곳에 도착하면 뭐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누나도 거기에 있을 지도 모르지. 내가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내가 강박적으로 연구소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방 털어···보기 전에 앞서! 여기서 살짝 살펴보고 들어가죠."

"알겠습니다."

나와 한세아는 현관 입구에서부터 보일러가 있는 베란다까지 시선을 옮기며 원룸 내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우리들의 숨소리를 제외하고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혹시 무언가 숨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현관 앞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채로 놓인 신발들.

밑창이 닳아 곡선을 형성하게 된 슬리퍼, 때가 잔뜩 타 누리끼리해진 운동화들이 활짝 열린 신발장 밑에 쏟아져 있었다.

시선을 좀 더 위로 올려보면 뿌연 먼지가 눈처럼 덮인 방바닥이 보인다.

바닥에는 가지각색의 책들이 엉망진창으로 펼쳐져 있었다. 제목은 보이지 않았지만, 두께나 언뜻 보이는 내용을 보니 문제집 또는 전공책인 듯했다.

그 너머로는 침대와 베란다 미닫이문이 반쯤 열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곱게 개여 있었을 이불도 주변의 생활용품들과 마찬가지로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대부분의 물건들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이탈해 있는 이유는 아마도 도시를 강타한 연이은 지진 탓이리라.

"···나무 인간은 없는 것 같으니까 이제 들어가보죠. 제가 앞장 서겠습니다."

"넵."

얼추 내부 파악을 끝낸 우리는 307호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탁-

신발이 바닥을 내딛자 방바닥에 쌓인 먼지가 발 크기만큼 밀려나서 빈 공간이 만들어진다.

대략 8평쯤 되어 보이는 원룸에도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침대, 책상, 의자, 싱크대, 세탁기, 컴퓨터, TV, 냉장고, 인덕션 같은 생활 전반에 관련된 물건들 말이다.

띠리링-

나와 한세아는 외부의 위협을 막기 위해 현관문을 완전히 닫았다. 잠금이 완료되었다는 알림음이 들리고 나서야 문에서 시선을 떼었다.

문을 확실하게 닫아야 안심하고 안쪽을 탐색할 수 있지 않겠는가.

푸른 조각이 없는 이상 우리처럼 쉽게 문을 열 수 없기도 하고.

그러니 무슨 이상이 생기는 즉시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후우, 좋아요. 현우씨는 옷장이랑 책상 좀 뒤져 주세요. 저는 부엌이랑 찬장 쪽 살펴볼게요."

한세아가 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방을 털 준비가 만만이었다.

"네."

"아! 어차피 부엌 근처는 제가 뒤져볼 거라 괜찮겠지만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예요. 냉장고는 함부로 열지 마세요. 알았죠? ···열면 지옥일 거예요.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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