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21화 (122/497)

Chapter 121 - 121. 탐색 (8)

"아! 어차피 부엌 근처는 제가 뒤져볼 거라 괜찮겠지만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예요. 냉장고는 열지 마세요. 알았죠? ···열면 지옥일 거예요. 진짜로."

"냉장고요?"

신신당부하는 한세아의 말에 잠시 멈칫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냉장고.

식품이나 약품 등을 부패하지 않도록 저온에서 장기 보관하기 위한 장치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저온(低溫)'이라는 말이다. 전기가 끊긴 지 몇 개월이 지난 지금,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었던 각종 식품들은 상하다 못해 완전히 썩어 버렸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 확실히 그렇다고 봐야 했다.

그러니 아무 생각 없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는 끔찍한 꼴과 직면으로 마주하고 말았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나는 하얀 냉장고를 힐끗 바라보며 답했다.

그녀가 말하기 전까지는 별생각 없었는데 지금은 하얀 냉장고가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겉은 하얗지만 속은 아주 시꺼먼 그런 상자.

"현우씨도 알았겠지만, 그냥 미리 말해 둔 거예요. 진짜 심한 것들은 냉장고가 닫혀 있어도 냄새가 새어 나오는데 이건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까 문만 안 열면 괜찮아요. 문만 안 열면···."

한세아는 무언가를 떠올리기라도 한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메스꺼워하는 얼굴을 지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부엌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안색이 파리해진 한세아를 뒤로하고, 나도 내가 해야 할 일하기로 했다.

무언가를 잊기 위해서는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도 한 방법이니까.

그것이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이든, 무엇이든.

나는 일단 속을 불편하게 만드는 불쾌한 상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음···."

우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책상부터.

책상 위에는 노트북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전원이 들어올까 싶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창 찬장을 뒤적거리던 한세아를 불러 푸른 조각을 갖다 대어 보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노트북은 이미 방전이 되어 있어서 전원은 들어오지 않았다.

'아쉽네.'

하긴, 전기 공급이 중단된 지 시간이 꽤나 흘렀으니 노트북 배터리가 방전이 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외에도 충전기, 프린터기, 악력기, 계산기 같은 물건들이 있었으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전혀 아니었기에 챙길 필요가 없었다.

다음은 책상 서랍.

드르륵-

책상 서랍 안에는 각종 케이블, 다 쓴 볼펜들이 수북이 들어 있었다.

[8개년 기출 문제집]

문득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문제집을 향했다가 돌아왔다.

성의없이 펼쳐진 책에는 어느새 무신경한 나와 한세아의 신발에 짓밟혀 한층 더 구겨지거나 자국이 크게 나 있었다.

"······."

단순한 문제집일 뿐이지만, 뭔가 방 주인의 꿈을 마치 우리가 망친 것 같은 느낌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방에 있는 물건들을 보니 아마 남자였을 307호 사람은 꿈을 이루기 위해 서랍에 수북이 쌓인 볼펜만큼 수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세상이 변하기 전에 꿈을 이루었는지 이루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찌 보면 큰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이미 난장판으로 바뀐 지구는 그가 꿈을 이루었던 이루지 않았던 별 신경을 쓰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쓸 만한 것들을 얻기를 바라며 방을 쥐 잡듯이 뒤집어엎을 뿐.

게다가 짐을 싼 흔적도 없이 방이 비어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을 가능성이 제일 컸다.

안타깝기는 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드르륵-

탁!

나는 씁쓸함을 느끼며 서랍장을 닫았다.

책상과 서랍을 다 뒤졌으니 이제는 옷장, 화장실, 베란다를 뒤져볼 차례였다.

부스럭- 부스럭-

지직- 지지직-

바닥에 깔린 책을 발로 밟지 않고 옆으로 밀어내며 도착한 옷장 앞.

벌컥-

옷장 문이 열리자 코를 자극하는 나프탈렌 냄새가 훅 다가왔다.

옷장 안에는 많은 옷들이 걸려 있지 않았다. 그저 몇 벌의 티셔츠와 바지, 낡은 속옷들뿐.

여분의 옷이 있는 것은 좋았으면 좋았지 나쁠 일은 없었기에 최대한 상태가 멀쩡한 것들을 골라 챙겼다.

비록 사이즈도 작고, 남이 입었던 것이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뭐, 어딘가 쓸 일이 있겠지.'

내가 옷장을 다 뒤지고 다음 장소로 향하려는 그때.

"현우씨, 이제 이 방은 끝났어요."

한세아가 가방을 들고 오며 말했다. 그녀는 부엌 찬장을 살펴보고 나서 나보다 한발 빠르게 화장실과 베란다도 먼저 보고 온 것이다.

"벌써 다 둘러보고 왔습니까? 엄청 빠르시네요."

"히히, 나름 경력직이라? 뭐, 방 한두 번 털어본 것도 아니니까요."

한세아는 가슴을 내밀며 우쭐거렸다. 자기 주장이 강한 가슴이 좀 더 도드라졌다.

뭔가 민망한 마음에 슬며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얻을 게 좀 있었습니까? 전 그나마 챙긴 게 이런 옷가지밖에 없어서요. 딱히 챙길 만한 게 안 보이네요."

"저도 많지는 않아요. 그냥 먹을 수 있는 캔 약간이랑 믹스 커피 봉지 정도···? 커피는 엄청 많던데요. 아, 혹시 몰라서 가위도 하나 챙겼어요."

그녀는 가방을 앞으로 내밀더니 안에 담긴 것들을 보여 주었다. 전보다 좀 더 묵직해진 가방 안에는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들이 추가가 되어 있었다.

작은 스팸 통조림 네 통, 카레 참치 두 캔, 비닐 봉지에 담긴 약간의 쌀, 스무 봉지에 달하는 커피 믹스, 마른 수건 2장, 1.5L 생수 2통···.

방 하나를 알뜰하게 턴 모양새.

겨우 옷가지 몇 개 챙긴 나와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통풍이 잘 안 된 쌀이라 그런가 냄새가 살짝···? 올라오려고 하긴 하는데 아직 먹을 수 있어서 챙겼어요. 이걸로 죽 해먹으면 먹을 만 할 거예요. 저희 조미료도 다 잃어버려서 소금, 설탕 같은 것도 좀 챙기고 싶었는데 그건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더라구요. 뭘 해 먹고 산 건지 모르겠네요. 이 방 주인은."

"아."

"그나마 있는 건 참기름 정도? 뭐, 이런 상황에 뭔가 만들어서 먹는다는 건 사치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계속 통조림만 먹을 순 없잖아요. 그쵸?"

"그렇긴 하죠···?"

내가 묘하게 말꼬리가 올라간 대답을 내놓자,

"······? 뭐예요? 왜 의문문이에요? 제가 만들어 준 계란죽 먹기 싫어요? 진짜 요즘 같은 세상에 계란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거든요?"

한세아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심기가 불편해진 그녀를 달래기 위해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변명했다.

"아뇨! 계란죽 좋아합니다! 세아씨가 만들어···준 거 맛있긴 아니, 맛있었습니다. 그냥 소금을 어디서 구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던 참이라 그런 거예요."

"그쵸? 싫은 거 아니죠?"

"그럼요!"

"그럼 지수씨랑 예린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면 오늘 저녁은 계란죽 만들어 먹어요. 그리고 소금이야 뭐 다른 방에 있겠죠! 얼른 가요!"

"······네."

그 뒤로, 나와 한세아는 아직 열리지 않은 방인 305호, 303호, 302호를 연이어서 둘러보았다. 정말 다행히도 각 방을 전부 뒤져 보자 생각보다 많은 물자를 얻을 수 있었다. 큰 문제없이 말이다.

특히 내가 처치한 나무 인간을 제외하고 다른 나무 인간과 마주치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다행이었다.

"와! 여기 소금!"

한세아가 찾길 원하던 소금도 찾았고,

"저기 칫솔 새 거 있어요!"

깔끔함을 강조하는 지수가 좋아할 만한 포장도 뜯기지 않은 칫솔도 찾았다.

며칠 전부터 칫솔 올이 다 나갔다며 불평을 하던 그녀였으니 새 칫솔을 가져다주면 아주 좋아하겠지.

"앗! 현우씨! 잠깐 이리로 와 봐요. 이쪽 천장 쪽에 젤리가 보이는데 제 손에는 안 닿아요. 옆에 영양제도 있는 것 같은데 같이 꺼내주세요."

"바로 가겠습니다, 세아씨."

식탐이 큰 예린을 위한 군것질거리인 젤리 상자도 얻을 수 있었다.

젤리는 기본적으로 1년 정도의 유통 기한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방금 주운 젤리 상자는 단단하게 밀봉되어 있기까지 해서 안심하고 먹어도 되어 보였다.

각자 필요한 물건을 받은 지수와 예린이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조금 힘들었지만 그녀들이 웃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현우씨, 비타민 하나 먹어요. 상태 괜찮아서 먹어도 될 것 같아요. 이런 거 잘 챙겨 먹어야 해요. 나도 하나 먹어야지~."

"마침 좀 피곤했는데 잘 됐네요. 잘 먹겠습니다."

나와 한세아는 가루 비타민을 입에 털어 넣었다.

탈탈···

가루가 혀에 닿자마자 느껴지는,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신맛에 몸을 부르르 떨다가 한세아와 서로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킥킥하는 웃음을 주고 받았다.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우리는 오늘 얻은 수확물이 들어있는 가방을 바라보았다.

지금 가방의 입을 간신히 다물게 하고 있는 지퍼를 연다면, 다시 닫을 수 있을지 의문이 절로 들게끔 하는 가방.

배낭들은 처음의 홀쭉했던 모습과 달리 식량이나 각종 물건들에 의해 내부 공간이 꽉 차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한 층을 전부 턴 것이 아닌 방 4개만 털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세아가 들고 온 가방과 방 이곳저곳에서 추가로 챙긴 가방 마저도 꽉 차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나만, 딱 하나만 더 챙겨가자는 마음에 생긴 참사였다.

그러나 한껏 무거워진 가방과 별개로 마음만은 가벼워진 탓일까.

한세아가 가방을 고쳐 메며 밝은 표정으로 제안했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요? 해도 지고 있는데, 지수씨가 걱정 많이 하고 있을 거예요. 지금 출발해야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주민 센터 도착할 것 같은데."

"그럽시다. 늦게 가면 한 소리 단단히 들을 것 같네요."

창문 너머로 해가 서서히 지고 있는 것이 보여서 일단 여기까지 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바로 그때.

드드드드······

나와 한세아의 입을 꾹 다물리게 만드는 진동이 느껴졌다.

서로 휘청거리는 몸을 부축해주면서 급하게 바깥을 살펴보니 지면이 울룩불룩하게 요동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스팔트 도로를 엉망진창으로 헤집는 나무뿌리.

별안간 그것이 갑작스럽게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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