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3 - 123. 탐색 (10)
보글보글···
가스 버너 위에 올려진 냄비에서 끓는 소리가 들린다.
보글보글···
냄비 안의 내용물이 끓으면 끓을수록 고소한 쌀의 냄새와 기름진 참치 냄새가 조화롭게 뒤섞여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가득 풍겼다.
내가 공 들여서 몸에 끼얹어진 먼지를 깔끔하게 씻어내고 오니, 한세아는 오늘 먹을 저녁을 다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오늘 아침에 먹은 참치 캔 약간과 편의점에서 먹은 초코바 한 입을 제외하고는 배를 채운 적이 없었으니 맛있는 참치죽 냄새는 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실 나를 가장 안절부절 못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촤륵- 촤르륵···
"흠~ 흠흠~."
문틈 사이로 손전등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화장실.
그곳에서 물 끼얹는 소리와 기분이 좋은 듯 한세아가 내는 콧노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문이 닫힌 것은 확실하건만.
방음이 좋지 않은 건지 여진도 끝나 적막이 내려앉은 밤이라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그녀가 씻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
괜스레 민망한 기분이 된 나는 애써 고개를 가스 버너 위 냄비를 향해 고정했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한세아의 콧노래 소리를 속으로 어설프게 따라 하면서.
시간이 지나 냄비 안의 쌀이 쉽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럽게 푹 익었을 때,
벌컥!
얼굴과 몸에 잔뜩 묻었던 흙먼지를 말끔히 씻어낸 한세아가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하루 고단했던 흔적을 모조리 지워 낸 그녀는 상쾌한 듯 해맑게 웃고 있었다.
"흐아···. 오래 기다렸어요, 현우씨?"
개운한 한숨을 내쉬며 어느새 내 옆에 앉은 한세아가 물었다. 그녀는 아직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비비는 중이었다.
"아뇨, 딱 맞게 나오셨습니다. 아까 냄비 살짝 열어서 보니까 다 익은 것 같더라고요."
"그래요? 그럼 이제 불은 꺼도 될 것 같아요. 조금 뜸만 들이고 바로 먹어요!"
한세아는 히히 웃으면서 기지개를 쭉 폈다.
탁-
그녀의 말대로 가스 버너 레버를 돌려 불을 껐다.
가스불에서 나오는 열기는 사라졌지만 그동안 미리 방 내부의 공기를 포근하게 달궈 두었기 때문에 싸늘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원룸이라 몸을 따뜻하게 해 줄 이불이 있기도 했고.
"······."
"······."
나와 한세아는 밥이 충분히 뜸 들기만을 기다리면서 별빛과 달빛이 환하게 빛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전에는 별 보는 게 그렇게 어려웠었는데, 지금은 엄청 잘 보이네요."
불쑥 한세아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은 하늘에 수도 없이 박힌 별을 보고 있었다.
"제가 천식을 앓고 있었다는 이야기 한 적 있나요?"
"네, 기억납니다. 수원역에서 해줬었죠."
"지금은 괜찮지만, 어렸을 때는 천식이 심했기 때문에 바깥에 함부로 못 나갔었거든요. 공기가 너무 더러워서요. 그나마 할 수 있었던 건 창문을 통해서 바깥을 구경하는 거?"
"······."
나는 묵묵히 한세아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녀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활동적인 낮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저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 더 좋았어요. 그때는 별 하나라도 찾아서 보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그렇게 애를 썼었는데. 이제는 그냥 고개만 들면 보이네요."
"그럼 별자리도 잘 아시겠네요?"
"그랬었죠. 드문드문 보이는 별을 하나하나 이어가면서 아, 이건 물고기, 저건 국자···. 모양 맞춰가면서 놀았어요. 근데 지금은 뭐가 무슨 별인지 알 수가 없네요."
한세아는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나같이 너무 밝아서, 너무 많아서 그냥 아무렇게나 이으면 보고 싶은 모양이 그대로 나오니까. 어렸을 때라 기억이 잘 안 나는 것도 있지만요!"
나는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에 있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어두운 밤이 내려앉은 하늘에는 밝게 빛나는 별들이 수도 없이 놓여져 있었다.
과거에는 '하늘의 별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라는 농담이 우스갯소리처럼 있을 정도였지만, 적어도 지금도 통하는 농담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게, 한세아의 말마따나 달빛만큼이나 밝은 빛을 내뿜는 별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아름다운 밤하늘.
지옥이 되어 버린 지상.
빛을 되찾은 별들.
빛을 잃어 버린 지구.
애석한 일이었다.
밤하늘은 저렇게 아름답게 빛나는데 정작 저 하늘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닌 지구 전역을 뒤덮은 거목이 인간과의 공생을 선택하지 않은 것처럼, 별빛과 지구의 빛도 서로 공존을 고를 수가 없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그래, 애석(哀惜).
이 단어로밖에 표현이 되지 않았다.
바로 그때.
"자! 이제 하늘은 그만 보고 저희 밥 먹어요! 뜸이 들다 못해 식었겠는데요?"
한세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녀는 먹기 좋게 적당히 식은 죽을 가져오며 내게 일회용 숟가락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다행히 차갑게 식지는 않았네요. 아쉽게도 계란이 없어서 계란죽은 못했지만 참치는 듬뿍 넣었으니 먹을 만 할 거예요."
나와 한세아는 사이좋게 죽을 나눠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수와 예린이 밥을 잘 챙겨 먹었을지 걱정이라느니, 지수가 잠도 안자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하냐느니,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밥은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한다느니 하는.
대부분 주민 센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지수와 예린에게 관련된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냄비가 엄청 큰 것도 아니고, 휴대용 가스 버너 위에 올려 둘 수 있는 작은 크기였기 때문에 안에 담긴 죽은 금방 동이 났다.
배가 막 부를 정도로 만족스럽게 위장을 채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따뜻한 죽이 속을 채우니 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 하루도 오래도록 걸었으니 몸이 많이 피곤해서 당장에라도 누워서 자고 싶었으나 그러기 전에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세아씨, 여기 앉아봐요."
"······?"
나는 설거지를 하고 돌아온 한세아를 침대에 걸터앉게 했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잠자코 내가 시키는 대로 침대에 앉았다.
푹-
침대 매트리스가 두 사람분의 무게가 실리는 것만큼 숨이 죽어 아래로 꺼진다.
"다리 내밀어 보십쇼."
"네?!"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찔 떤 한세아.
"다리 근육도 많이 뭉쳤죠? 어제오늘 많이 걸었으니까 지금 풀어 줘야 합니다. 안 그러면 내일 못 움직일지도 몰라요."
나는 한세아가 자꾸 종아리를 툭툭 치며 앓는 소리를 냈다는 것을 떠올렸다.
당장 나조차도 주먹을 쥐면 손이 부었다는 것을 느낄 정도로 누적된 피로에 의해 눈에 띄게 몸이 부었건만.
그녀는 나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나보다 상태가 낫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의왕시에 도착한 첫날에 피로감을 못 이기고 기절한 한세아가 아니던가.
그러니 그녀를 위해서, 내일을 위해서라도 한세아의 몸에 쌓인 피로를 최대한 풀어 줘야만 했다.
"하지만···."
"······?"
말을 흐리는 한세아에게 눈빛으로 채근하니 돌아오는 답이 가관이었다.
"아무리 저희 사이라도 다리 만지기는 너무 이른 것 같아요···."
한세아가 몸을 배배 꼬며 말한 내용을 들은 나는 더 들은 것도 없다는 듯 그녀의 다리를 강제로 들어 올려 내 허벅지 위에 올렸다.
"엣?!"
한세아는 순간 당황하면서 다리를 빼려고 했지만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꽈악-
내가 그녀의 종아리를 손가락으로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에 힘을 줘서 한세아의 종아리를 누르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
"이거 보십쇼. 아프죠? 좀만 참아요. 이걸 안 풀면 내일 못 걷는다니까요? 제가 행군할 때 겪어봐서 잘 알아요."
"······! ······!"
"자, 팔 내려놓으시고. 큰 소리 나지 않게 입 잘 막으시고."
"현우씨! 자, 잠깐만요···! 제발! 잠깐만- 흐아앗! 흣! 흐으윽!"
한세아는 다급하게 손을 뻗으며 나를 말리려고 했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다리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이런 마사지는 사정을 봐주면서 하면 이도 저도 안 된다.
누를 때마다 아픈 건 이해하지만 뭉친 것을 풀어 주는 과정을 아프지 않게 해 줄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 악! 히으윽······!"
초반에 다리를 붙잡은 내 손을 잡으면서 멈추게 하려고 했던 한세아는 이제는 몸을 뒤틀면서 간간이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둥근 알을 형성한 뭉친 근육을 꾹 누르자,
"······!!"
그녀가 자지러졌다.
한세아의 다리에서 시작된 잔경련은 점차 그녀의 몸에 퍼져 영역을 넓혀 갔다.
그녀는 몸부림을 치면서 나로부터 거리를 벌리려고 했지만 내게 다리가 잡힌 이상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이내 몸을 축 늘어트렸다.
그녀의 하얀 다리를 마사지할 때마다 탄력 있는 피부가 쭉쭉 눌려 모양을 이리저리 바뀌어갔다.
꾹- 꾹-
지수의 동물 귀를 만질 때 느껴지는 촉감과 다른 촉감이 느껴진다.
뭔가 더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하지만 쫀득쫀득한 느낌이 나는 그런 느낌.
꾹- 꾹-
한세아를 위한다는 일념 하에 얼마나 다리를 마사지 했을까.
문득 그녀의 발에 시선이 갔다. 한세아의 오밀조밀한 발은 꽉 모여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걸을 때 제일 피로가 많이 쌓이는 곳은 발이라고 할 수 있으니 종아리와 허벅지말고도 발도 마사지해 줘야 했다.
"세아씨, 진짜 조금만 더 참아요. 여기까지만 하면 대강 피로는 다 풀릴 겁니다."
나는 그녀의 발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엑? 현우씨! 현우씨! 이제 그만! 충분해요! 저 진짜 피로 다 풀렸어요!"
한세아는 기겁하며 나를 말리려고 했다. 그녀는 간절함을 담아 나를 바라보았다.
"흠, 그래요?"
"네, 네! 그러니까-햐아악!"
한세아는 내가 그만하려는 자세를 취하자 반색을 하며 안도의 웃음을 지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내가 그녀의 발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깍지를 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상태로 힘을 살살 주며 발에 쌓인 피로를 풀어 주기 시작했다.
"하윽! 혀, 현우씨···! 이제 그마안······! 하아앙!"
오목한 발바닥을 꾹 눌러보기도 하고,
"흐윽···, 흐으윽···. 흑."
계속 접히려고 하는 발가락을 쭉쭉 펴주기도 했다. 마사지하는 과정에서 땀이 짙게 묻어났지만 딱히 더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깨끗하게 씻고 나온 뒤이기도 하고 다시 손을 씻으면 되는 일이 아니던가.
꾹- 꾸욱-
허벅지, 종아리에 이어 발을 마사지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얼추 그녀의 근육과 피로가 풀렸다고 판단한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어느새부터인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한세아를 바라보았다.
강제로 쭉 뻗게 된 하체와 달리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한없이 웅크리고 있는 상체.
고통을 참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한세아였다. 그 탓에 그녀의 가슴이 한층 더 강조되고 있었다.
"···세아씨? 괜찮아요?"
좀 너무했나, 라는 생각에 한세아의 얼굴을 돌렸다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눈이 위로 살짝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눈꼬리에 눈물이 잔뜩 맺혀 있는 건 덤이었다.
"어······?"
그 이후, 정신이 돌아온 한세아에게 잔뜩 잔소리를 들었다.
***
"잘못했어요? 안 했어요?"
"잘못했습니다···."
쌍심지를 키고 묻는 한세아에게 나는 얌전히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억울한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미처 닦아내지 못한 눈물 방울이 아직 그녀의 눈꼬리에 맺혀 있는 것을 보니 억울한 것보다 미안한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내 예상보다 많이 아팠던 것 같았다.
"여기서 반성하고 있어요!"
"넵."
"저는 옷 좀 갈아입고 올 테니까요!"
나는 다리를 오므린 채 화장실을 향해 급한 걸음으로 가는 한세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뭔가 축축하다 싶었더니 마사지 받는 동안 내 예상보다 땀을 더 흘렸나보다. 체온도 많이 뜨거웠고 말이다.
그래도 마사지가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아 다행이었다.
마지막으로 만진 그녀의 다리는 피로가 뭉친 것이 많이 풀어지게 되었고, 따끈따끈하게 달아오른 상태가 되었으니까.
뭔가 묘하게 손에 한세아의 다리 촉감이 남아있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가 피는 것을 반복했다.
이윽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한세아는 침대 한 켠을 툭툭 치며 얼른 누우라고 채근했다.
"저는 바닥에서-."
나는 바닥을 가리키며 난색을 표했다. 원룸에 있는 침대라서 매트리스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라면 편하게 잘 수 있지만, 둘이라면 꽉 붙어서 자야 할 정도로 애매했기 때문이다.
"쓰읍! 제 말 들어요!"
"하지만-."
"흑! 제 다리는 멋대로 실컷 만져놓고선···. 이거 하나 못 들어 줘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시늉을 하는 한세아.
"아. 알겠습니다. 알겠다고요. 그러니까 기분 풀어요."
나는 당황하며 그녀를 달랬다.
"제 말대로 할 거죠?"
"네네. 자, 보십쇼."
한세아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내가 먼저 침대 위로 몸을 뉘었다. 매트릭스가 부드럽게 눌리면서 작게 출렁였다.
벌어진 손 틈 사이로 나를 지켜보던 그녀는 내가 누운 것을 확인하자 히히 웃으며 나처럼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격한 움직임에 내가 누웠을 때보다 매트리스가 좀 더 크게 출렁였다.
"저 팔베개 해 줘요. 아니다, 가만히 있어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한세아는 내 팔을 이리저리 벌리고 모양을 바꾸더니 원하는 자세가 된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 팔을 베고 누웠다.
그녀가 내 팔을 베고 누운 만큼, 나와 한세아의 몸이 바싹 밀착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부드러운 여체가 힘을 풀고 내 몸에 완전히 기대는 것이 느껴졌다.
쿵··· 쿵··· 쿵···
···쿵 ···쿵 쿵···
서로의 심장 박동 소리가 엇박에서 정박으로 맞춰지는 것이 들린다.
그렇게 말없이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감고 있을 때,
"···현우씨."
한세아가 작게 속삭였다.
"네?"
"그래도 현우씨 말이 맞나 봐요. 다리 움직이는 게 한결 편해졌어요."
"하하, 그렇죠? 세아씨를 위해서 그런 거였다니까요. 아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도 참 마음이-."
"그만! 이제 자요."
"···넵."
주인을 잃은 푹신한 침대 위에 눕고,
주인을 잃은 부드러운 이불을 덮으며.
나와 한세아는 조용한 숨소리를 내면서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빛을 되찾은 밤하늘의 별들을 배경 삼아서.
아주 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