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24화 (125/497)

Chapter 124 - 124. 해후 (1)

스르륵-

밝아오는 햇빛이 눈을 자극하자 자연스럽게 눈꺼풀이 밀려 올라가며 눈이 떠졌다.

눈이 떠지는 것만큼 좀 더 밝은 빛이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가물가물한 잔상이 보이는 시야에서 윤곽이 점점 뚜렷하게 잡혀가는 것이 느껴졌다.

"끄으윽···."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피려고 했으나, 내 팔과 상체를 꽉 붙잡은 무언가에 의해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한세아.

그녀가 입을 살짝 벌린 채 온몸을 내게 맞대고 있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면서.

내가 애착 인형이라도 되는 듯이 팔과 다리로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나는 한세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책상, 침대, TV, 컴퓨터, 싱크대, 서랍장, 찬장···.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원룸의 모습이었다.

다만, 어제와 차이점이 있다면 책상 위 마른 수건에 조심스럽게 놓인 계란의 존재일까.

"······."

두 개의 알이 나와 한세아처럼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녀는 새벽에 잠깐 일어났다가 다시 잠이 든 것 같았다.

'어쩐지 자세가 좀 변한 것 같더라니.'

한세아가 나를 꽉 안고 있었지만, 도서관에 있던 소파가 아닌 제대로 된 침대 매트리스 위에 수면을 취한 덕분인지 몸의 피로가 상당히 많이 해소된 느낌이었다.

이불까지 덮고 자니 싸늘한 밤공기도 무서울 것이 없었다.

오히려 방 내부의 공기는 우리의 체온과 바깥에서 투과되는 햇빛에 의해 달궈져 포근하기까지 했으니 더욱 그랬다.

침대 매트리스를 아예 도서관에 가져다 두고 쓰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무리이니 지금 충분히 즐겨둬야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나는 슬슬 일어나야겠다고 판단했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일어나지 말라며 붙잡았지만 주민센터에서 나와 한세아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지수와 예린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움직여야 할 때였으니 말이다.

"세아씨."

나는 품에 쏙 들어와 있는 한세아의 어깨를 살며시 흔들었다. 상체가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소담한 가슴도 보기 좋게 같이 흔들렸다.

"흐응······. ···. ······."

몸이 움직여지자 무어라 웅얼거리며 이불에 얼굴을 파묻는 한세아.

흔들흔들-

잠시 곤란한 기분이 들었으나 나는 멈추지 않고 그녀의 어깨를 계속해서 흔들었다.

"세아씨, 일어나요. 이제 가야죠."

"······."

"세아씨!"

"···흐앗!"

지속된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깬 한세아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 입가를 슥 닦았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깨운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자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휴···. 놀래라. 언제 일어났어요, 현우씨?"

한세아가 눈가를 비비면서 물었다. 눈가를 충분히 비빈 그녀는 이어서 볼에 착 달라붙은 적색 머리카락을 떼어 내었다.

"얼마 안 됐습니다. 숨 좀 고르다가 이제는 출발해야 할 것 같아서 깨웠어요."

"아하···아아암···."

한세아는 길게 하품을 하더니 침대에서 일어났고, 팔다리를 쭉쭉 펴서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기다려요. 간단하게 아침 먹고 바로 출발해요."

"그럼 아침은 그냥 통조림 하나 따서 먹을까요?"

나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식량 사정을 떠올렸다.

우리가 다 들고 갈 수 없을 정도로 꽤 많은 통조림을 두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괜한 미련 남지 않게 하나라도 먹고 가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아뇨! 그거 말고, 저거 삶아 먹어요. 오늘 낳은 거라 신선하고 들고 가다가 깨지면 엄청 아깝잖아요. 영양제보다 좋은 완전 식품인데."

한세아는 고개를 젓더니 책상 위에 놓인 계란 두 알을 가리켰다.

"······아."

"뭐예요, 그 반응은? 싫어요?"

"···아뇨, 좋습니다."

이윽고, 스트레칭을 마친 한세아는 가방에서 휴대용 가스 버너를 착착 꺼내더니 냄비에 약간의 소금과 물, 그리고 계란 두 알을 넣고 보글보글 끓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 삶아진 계란들.

탁! 자르르륵!

그녀는 삶은 계란의 껍질을 마술을 부리듯 손쉽게 한번에 벗겨내더니 내게 바로 내밀었다.

"짠! 현우씨, 여기요."

"감사합니다."

우물우물···

나는 손에 들린 계란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나와 한세아는 삶은 계란을 하나씩 나눠 먹는 것으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끝냈다.

애초에 배부르게 먹을 생각이 아니었기도 했고, 계란 한 알에 불과했기 때문에 식사 시간은 순식간에 끝이 난 것이다.

통조림, 생수, 영양제, 마른 수건, 각종 도구들.

그리고 밤에 덮고 잘 수 있는 이불까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챙길 짐들을 정리하며 다시 한번 점검했다.

이렇게 하나하나 다 챙기다 보니 혼자서는 도저히 들고 갈 수 없는 양이 되고 말았지만 어느 것 하나 쉽게 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도 그럴게, 지금 정리한 것들만 해도 수차례의 고심 끝에 엄선해서 모아둔 것들이 아니던가.

이불까지 챙겨가는 건 과하다고 할 수 있었으나, 밤에 추위를 느낄 수 있는 예린을 위해 얇은 이불 한장이라도 꼭 들고 가야만 했다. 그러고 싶기도 했고.

아이는 체온 유지를 잘 해줘야 하고,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 나와 한세아는 일체의 반대 의견없이 이불을 챙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조금 무겁고 부피가 커지긴 했어도 서로 나눠 들면 충분히 들고 갈 수 있다고,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꾸욱-

"아흐···."

무거운 가방이 어깨를 짓누르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온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면서 피식 웃었다.

"조심히 갑시다. 주민 센터로."

"넵!"

이제는 지수와 예린이 기다리고 있는 주민 센터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어 바깥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조용한 길거리, 맑고 푸른 하늘, 바닥을 뒤덮은 넝쿨, 방치된 차량, 아파트를 둘러싼 거목.

어제 나무뿌리가 꽤 긴 시간 동안 난리를 친 것이 무색하게 우리 눈에 당장 보이는 외부의 풍경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아니, 눈에 띄게 변한 것이 하나 있기는 했다.

시작과 끝을 모를 정도로 서로 얽히며 이어진 나무뿌리들이 반나절 동안 움직인 탓인지 고층 아파트에는 저번에 보았던 균열의 크기보다 훨씬 커져 있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지나가면서 언뜻 보았던 것뿐인 내가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벌어진 균열.

건물에 저 정도의 금이 갔는데도 용케 무너지지 않고 어떻게 거목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세아씨, 얼른 여기서 벗어납시다."

"완전 동의. 어서 가요."

물론, 신기한 건 신기한 거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이는 아파트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이 우선이었다.

내가 건축 전문가도 아니고, 건물 외견만 봐서 현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어떻게 내리겠는가.

그저 조심하는 것만이 상책일뿐.

바로 그때.

······우직!

아파트에서 검은 덩어리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

우리는 낯선 소리가 들리자마자 몸을 낮게 낮추며 소리가 들린 방향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우직! ······으직! ······우득!

한 번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연이어서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지를 따라 시선을 올려보니 아파트 외벽에 있는 균열에서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지직!

나무 인간.

그동안 거목에 의해 나갈 수 있는 길이 막혀 바깥으로 나올 수 없었던 나무 인간들이 균열이 커지자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놈들은 계속해서 위에서 아래로, 고층에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머리가 바닥을 향한 채 떨어졌기 때문에 괴성조차 내지 못하고 죽어 간다는 점일까.

아마 그동안 막혀 있던 아파트들 대부분이 저런 상태일 것이다.

아파트 주민 수만큼 내부에는 나무 인간들이 많이 들어 있겠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소름과 위기감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일종의 둥지나 다름없게 된 모습에 나는 정말로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거목이 붙은 아파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새삼 다짐했다.

"···진짜, 진짜 빨리 여기서 벗어나죠."

"넵···."

나와 한세아는 어제 편의점에 들어가기 위해 돌파했던 차량 미로를 우회해서 좁은 골목길이 아닌 넓은 대로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무뿌리가 모든 것을 박살 내는 와중에도 차량 미로에서 나무 인간들의 괴성이 들려오지 않았으니 차 밑에 숨은 놈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거의 확실하다고 해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굳이 저곳을 통과해 이동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부스럭- 부스럭- 부스스···

아침 이슬이 맺힌 수풀을 헤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우리는 다시 한번 덕영대로로 들어서게 되었다.

3차선 대로로 완전히 들어서게 되니, 빌라가 오밀조밀하게 세워져 있던 골목길에서 앞뒤가 뻥 뚫린 도로로 풍경이 확 바뀌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고, 풍경만 조금 바뀌었을 뿐이건만.

뭔가 답답한 느낌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아파트에서 나무 인간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도 크게 한몫했다.

우리는 쉬지 않고 앞으로 계속 걸어가면서 작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렇게 보니까 주민 센터랑 생각보다 먼 거리가 아니었네요, 세아씨."

"그러게요. 어제는 꽤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기분 탓이었나 봐요."

중앙을 나누는 가드 레일, 인도를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낮은 담, 거목만큼이나 우뚝 서 있는 가로등과 신호등.

그리고 시선의 끝에 보이는 스포츠 센터.

주민 센터는 스포츠 센터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그곳까지만 이동하면 지수, 예린과 재회하는 것도 금방이다.

"뭐, 출발할 때랑 상황이 달라서 그럴 수도 있죠. 그때는 텅 빈 가방이었지만 지금은 식량을 가득 담아가잖아요? 흣차."

한세아가 식량 가방을 고쳐 메며 말했다. 한계까지 눌러 담은 가방은 보기만 해도 묵직했다. 든든하기도 했고.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녀의 말마따나 부족한 식량을 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쫓겼던 그때와 달리, 현재는 식량을 한아름 들고 가는 중이니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속으로 대충 수긍하면서 고개를 돌려 전방을 쭉 훑었다.

지진의 여파가 미치지 않은 듯 변함이 없는 덕영대로.

'···그럼 나무뿌리는 어디서 난리를 친 거지? 아래쪽 말고 위쪽인가? 소리 들린 걸 보면 엄청 먼 거리는 또 아니었는데······.'

여러 의문에 대한 답을 추측하는 와중에도 주변을 향한 경계는 늦추지 않았다. 경계는 무슨 상황이든 가장 기본적인, 가장 필수적인 행동이었으니까.

부스스··· 부스스···

물살을 가르듯 수풀을 헤치며 숨어 있을 위협에 대비했다.

이동은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않고,

눈을 바삐 움직여 주변을 살피면서.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나와 한세아는 위험한 일 없이 스포츠 센터 옆자락에 도달할 수 있었다.

구름 한점 없는 맑고 푸른 하늘처럼 복귀하는 길 중간에 나무 인간이라는 먹구름과 마주치지 않고 센터에 무사하게 도착한 것이다.

"가방 많이 무겁죠? 좀만 더 힘내요, 세아씨. 거의 다 왔습니다."

"걱정 마세요! 이 정도는 거뜬하다구요. 어제 현우씨가 몸을 풀어 줘서 그렇게 힘들지도 않구요. 게다가 저만 든 것도 아니고 현우씨랑 나눠 들었는데요, 뭘. 현우씨도 힘내요!"

내 걱정스러운 물음에 한세아는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는 어깨에 메고 있는 무거운 짐과 외부에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긴장감 때문에 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신뢰감이 가득했다.

비어있는 내 손을 슬며시 잡아오는 한세아의 손에 나 또한 말없이 맞잡아 주는 걸로 대답을 대신해 주었다.

이윽고, 우리는 주민센터로 진입하자마자 비상구를 통해 순식간에 도서관이 있는 4층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저벅-

굳게 닫힌 도서관을 열기 위해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딘 순간.

"아저씨!"

우리보다 한 발 더 빠르게 도서관 문을 열어젖힌 지수가 말릴 새도 없이 내게 달려들었다.

와락!

프로펠러처럼 붕붕 돌아가는 꼬리를 추진력 삼아서.

있는 힘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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