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5 - 125. 해후 (2)
쿵!
"억!"
날 덮치듯 껴안은 지수에 의해 나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등허리를 타고 알싸한 고통이 느껴졌다.
킁킁-
"씻고 왔네···? 이상한 냄새는 안 나는 것 같은데···. 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나?"
그녀는 내 신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없이 귀를 쫑긋거리거나 꼬리를 붕붕 휘둘렀다. 뭔가 냄새도 맡는 것 같기도 하고, 희미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나마 혀로 핥아지지 않는다는 것이 다행일까.
겨우 하루 동안의 헤어짐에 불과했지만, 지수는 다시 만나게 된 것에 큰 반가움과 안도감을 느낀 것 같았다.
"지수야, 이거-."
나 또한 그녀 못지 않게 큰 반가움을 느끼고 있었기에 밝은 목소리로 지수를 불렀다. 겸사겸사 나와 한세아가 한가득 챙겨 온 식량과 도구를 자랑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호통에 조용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왜 이제 와!"
날 깔아뭉갠 지수는 팔짱을 낀 채 도끼눈을 뜨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귀와 꼬리는 어느새 움직임을 멈춘 상태였다. 멈추다 못해 바싹 굳어 있었다.
다만 귀가 내 쪽을 향한 것을 보니 지수의 온 신경이 내게 쏠려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들어나 보겠다는 듯이.
"나랑 예린이를 두고 외박을 하고 와?!"
"아니-."
"아저씨가 못 돌아올 수도 있다고 말은 했어도 진짜로 그럴 줄은 몰랐지!"
"식량-."
"지금 그게 문제야?!"
"······."
변명할 틈도, 사과할 시간도 주지 않는 지수.
나는 황급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내 유일한 구원의 동아줄인 한세아를 찾았다. 내 옆에 있던 그녀는 지수와 같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예린의 옆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도서관으로 돌아오자마자 가방들을 내려놓고 예린의 상처를 확인하던 한세아는 도움을 요청하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고, 이내 나와 눈이 마주쳤다.
'도와주십쇼, 세아씨···!'
나는 시선에 그런 메시지를 담아 그녀에게 쏘아 보냈다.
'···그러길래 제가 뭐랬어요.'
그러나 한세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외면했다.
'······!'
'아니, 저만 즐긴 게 아니잖습니까. 세아씨도 신나게 방 털었잖아요.' 따위의 말들이 이어질 타이밍이었지만 뭔가 처음 보다 더 멀어진 한세아의 모습에 입을 열지 못하고 눈을 부릅 뜰 수밖에 없었다.
이제 보니 그녀는 예린을 챙기며 자연스럽게 나와 지수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서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우리가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예린아, 배 고프지? 아침 먹었어?"
"먹긴 했는데요···."
"아직 모자라구나?"
"······네."
"괜찮아, 괜찮아. 언니랑 오빠가 먹을 거 많이 들고 왔어. 성장기니까 최대한 잘 챙겨 먹어야지. 이따 배 부르게 먹자."
"좋아요!"
"언니가 최고지?"
"네! 언니가 최고!"
그렇게 한세아와 예린은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며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나만 바깥에 두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는 말이다.
"아저씨! 내 말 듣고 있어?"
이제는 내 멱살을 잡고 탈탈 털어대는 지수.
"···켁! 어어! 듣고 있었어-!"
나만 혼나는 억울한 상황에서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겠다고 판단했다.
내게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으며 쉬지 않고 쫑알 거리는 지수의 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단 그녀의 입을 막으면 될 것이 아닌가.
"내가 그렇게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오라고 말했는데-엑!"
나는 다시 잔소리를 시작한 지수를 멈추기 위해 그녀의 팔을 확 잡아당겨 내 품에 집어넣었다. 품 가득 지수의 탄탄한 몸이 느껴졌다.
"헤윽! 이거 안 놔?! 내가 이런다고 봐줄 것 같아?"
순간 당황한 지수는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나는 그럴수록 그녀를 더 꽉 안았다.
"이거 놔···. 놓으라고···."
지수가 다다다 내뱉는 잔소리도 나와 한세아가 걱정되어서 그러는 것이다, 라는 걸 이미 알고는 있지만, 계속 들어 주기에는 왠지 하루 종일 이어질 것 같은 예감에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지금 상황에서 통용되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낫다고 하지 않던가.
서로를 안은 채로 말없이 시간을 얼마나 보냈을까.
지수가 입을 꾹 다물게 되었을 때,
그녀의 꼬리가 다시 살랑거리게 되었을 때,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를 자극하기 시작했을 때.
"미안."
그제야 나는 지수의 등을 쓸어 주며 사과를 전할 수 있었다. 손 가득히 그녀의 체온이 느껴졌다.
"어제 바로 복귀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나무뿌리가 움직여서 생긴 지진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어. 지진이 가라앉고 보니까 너무 어두워졌기도 했고. 진짜 미안."
"···응, 그럴 것 같더라."
······알고 있었는데 그런 거였다고?
순간 억울한 기분이 다시 한번 치솟았지만 머리를 흔들어 털어냈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어제의 성과를 자랑했다.
"하하···. 한동안 배부르게 먹어도 될 만큼 식량 많이 챙겨 왔는데. 아까 봤지? 세아씨 가방 엄청 빵빵한 거."
"······."
"···지수야?"
"···식량이 많아진 건 좋지만. 많이 안 들고 와도 되니까 다음부터는 빨리 돌아와. 아니다. 다음은 내가 무조건 따라갈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지수가 귀를 축 늘어트리며 말했다. 언뜻 보이는 그녀의 눈이 약간 퀭한 것을 보니 밤잠을 설친 것 같았다.
아니면 또 잠을 아예 자지 않았거나.
"너 또 잠 안 잤어?"
"걱정했단 말이야. 무슨 일 일어난 줄 알고···. 나무 인간들이 아저씨랑 언니를 덮친 게 아닐까. 그 여자들이 말한 생존자들하고 마주쳐서 좋지 않은 마찰이 일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드니까 불안해서···."
"그래서 잠 안 잤냐니까?"
내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답을 재촉하자, 지수는 시선을 회피하며 중얼거렸다.
"아니야, 잤어···. 진짜야."
그녀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직감했다. 나와 지수 사이에 있던 주도권이 내게 돌아왔다는 것을.
"근데 눈이 왜 그래? 너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나는 지수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는 것과 동시에 눈가를 어루만졌다. 손가락으로 만져 보니 그녀의 눈가가 살짝 부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그냥 빨리 일어나서···."
"그리고 문을 먼저 열면 어떡해? 나랑 세아씨가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딱 봐도 아저씨 발걸음 소리니까···."
"내가 조심히 숨어 있으라고 했잖아.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잘못했어요···."
도끼눈을 뜨며 나를 타박하던 지수는 어디 가고, 역으로 혼나자 눈을 내리깐 채 침울한 얼굴을 하는 지수만 남았다. 귀와 꼬리도 흘러가는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축 처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별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모습에 순식간에 마음이 약해진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서로 한 번씩 걱정을 주고받았으니 이 정도면 하룻밤의 재회 이벤트로 충분할 것이다.
챱!
"악!"
나는 지수의 양 볼에 손바닥을 갖다 대는 것으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휘둥그레 뜨는 일이 있었지만 중요하지는 않았다.
"서로 잔소리는 여기까지 하자. 나도 지수, 네가 한 말 이해했고, 너도 내가 한 말 이해했으니까. 맞지?"
"응."
"그래, 그러니까 이제 일어나서 세아씨랑 예린이한테 가자. 이러다가 또 해 지겠어."
지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깔아뭉개고 있던 하체가 떨어지자 숨 쉬는 것이 한결 편해졌다.
그리고.
"아저씨, 안 일어나?"
의아함을 가지고 물어보는 지수에게 나는 바로 답하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일어나자마자 나도 곧장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뭔가 묘하게 허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현듯, 지수가 문을 박차고 열면서 나에게 달려들었다는 것이 떠오른다. 그녀의 돌진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곧장 바닥에 등을 강하게 부딪혔다는 것도 함께.
'고작 그것 때문에···?'
내 몸이 그렇게 연약하지는 않건만.
소중한 허리가 불시의 기습에 맥없이 당해버리고만 것인가.
아직 제대로 써 보지도 못했는데?
'어쩐지 아까부터 몸이 삐걱거리더라니.'
어리둥절한 얼굴로 잠시 서로의 눈을 마주치고 있을 때,
"···지수야. 나 좀 일으켜 줘. 허리 삐었나 봐."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움을 요청했다.
"풉! 아저씨, 재미없어. 빨리 일어나."
"······."
"일어나라니까···? 내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이런 장난치지 마···. 응?"
"···장난 아니야."
"······어? 진짜로? 못 일어나겠어?"
"어, 진짜로."
처음에 내 말을 믿지 않던 지수는 내 표정을 보고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한껏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당사자인 나조차도 이 현실이 믿기지 않는데 지수는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지금 상황은 외면할 수 없는 명백한 현실이었다.
"어어···. 어떡- 아니, 아저씨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지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가 도서관 안으로 슝 들어가서 사라졌다.
타탓- 타타탓-
"언니! 세아 언니-!"
···나는 홀로 바닥에 내버려 둔 채로 말이다.
오직 그녀의 흔들리는 꼬리만이 잔상처럼 남아 조금 전까지 지수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지수야? 지수야! 가기 전에 나 좀 먼저 일으켜 세워주지······."
나는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는 자세를 하면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 중얼거림은 받아주는 사람 없이 건물 복도에서 울려 퍼지다가 이내 외롭게 흩어질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일까.
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에 사무치는 억울함과 서러움을 달래고 있던 나는 황급히 나온 지수와 한세아에 의해 금방 구출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