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26화 (127/497)

Chapter 126 - 126. 해후 (3)

"현우씨, 괜찮아요? 풉."

소파에 힘겹게 엎드려 있는 나에게 한세아가 물었다.

그녀는 내 뒤에 있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한세아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게 건넨 목소리에는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방금 내가 들은 웃음 소리는 착각이 분명하리라.

···분명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좀 쉬면 괜찮아질 것 같습니다. 그냥 근육이 놀랐나 봐요."

나는 예린에게 한창 잔소리를 듣고 있는 지수를 곁눈질로 살피며 답했다. 지수는 예린이 무어라고 타박할 때마다 고개를 푹 숙이며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귀와 꼬리가 힘없이 축 처진 모습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지수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너무 뭐라 하지 말라고 예린에게 전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내 코가 석 자였다.

허리가 딱딱하게 굳은 상태에서 말을 해봤자 아무런 설득력도 없을 것이 아닌가.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게 지수를 도와주는 일일 것이다.

그리 생각한 나는 눈망울을 글썽이며 도움의 시선을 보내는 지수를 애써 외면했다. 내가 시선을 회피하자 그녀는 충격받은 얼굴로 고개를 더욱 숙였다.

미안.

어쩔 수 없어.

"이게 도움이 될 진 모르겠지만 혹시 몰라서 파스 좀 가져 왔어요."

한세아가 가져온 파스를 흔들며 말했다. 파스가 허공에서 팔랑거릴 때마다 알싸한 파스 향이 코를 자극했다.

"감사합니다, 세아씨."

"에이, 뭘 요. 옷 좀 걷을게요? 못 움직이시죠?"

"네네,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녀가 상의를 쉽게 올릴 수 있게끔 온 힘을 다해서 상체를 살짝 들어 올렸다. 고작 5cm조차 되지 않는 높이였건만, 마치 수전증 걸린 손처럼 몸이 사정 없이 떨리고 있었다.

스르륵-

한세아는 재빠르게 내 상의를 위로 쭉 걷어 올리더니,

"읏차-."

그대로 내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동시에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여체가 몸을 지그시 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지익···

한세아가 파스 비닐을 뜯으면서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등줄기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훑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지나간 곳을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저기, 세아씨? 느낌 이상하니까 장난치지 마십쇼."

나는 부르르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말했지만, 한세아는 못 들었는지 듣지 못한 척을 하는 건지 대신 엉뚱한 말을 내놓았다.

"···현우씨."

"예?"

"허리가 이렇게 약해서 나중에 제 부탁은 어떻게 들어 주려고 그래요?"

"······? 힘 쓰는 일입니까?"

나는 의아함을 가지고 물었다.

예전부터 한세아가 신신당부했던 '나중에 부탁 꼭 들어 주기'. 사실상 소원 하나 들어 주기와 별 차이가 없는 말이었다.

그 부탁의 내용은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내가 약속을 잊지 않았는지 확인하겠다는 듯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종종 꺼내고는 했다.

'대체 그 부탁이 뭐길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무슨 부탁인지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나중에'라는 말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고.

"힘 쓰는 일이기는 하죠. 아마 한 번 가지고는 안될걸요. 많이 움직이는 일이에요."

"뭔가 불안해지는데요···."

"설마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하는 건 아니죠?"

"안 그럽니다. 뭐, 좀 많이 힘든 부탁이라도 괜찮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무조건 들어 주기로 약속했으니까요."

"후후, 그래서 현우씨가 좋아요. 이제 가만히 있어요. 파스 붙일 거니까."

그녀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더니 내 허리에 정성스럽게 파스를 붙이기 시작했다. 파스가 피부에 착 달라붙으니 시원한 감각이 전신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흐···."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을 때, 한세아가 다시금 허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나중에 저랑 지수씨 감당하려면 몸이 더 좋아져야겠어요. 지수씨는 체력도 좋은데 현우씨가 먼저 나가떨어지는 건 좀 그렇잖아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아악···!"

짜악-!

내가 되묻는 순간, 그녀가 손바닥을 내려쳤다. 찌르르 울리는 고통에 눈이 번쩍 뜨였다.

"흥! 언제까지고 모르는 척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지금은 여유가 없으니 그냥 넘어가도 괜찮지만요. 아무튼! 여기서 쉬고 있어요. 저는 이만 예린이 밥 챙겨 주러 가 볼게요."

한세아는 코웃음을 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점점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흐······."

내 몸을 누르는 무게는 사라졌지만,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부착된 파스 탓인지, 한세아의 매운 손바닥 맛 탓인지 얼얼한 고통이 잔열처럼 남아 나를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 푹 자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피곤함이 가득 느껴지고 있었다.

한숨 좀 돌리나 싶었건만.

"아저씨···."

한세아가 자리를 비키자 지수가 바로 빈자리를 채웠다.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어, 왜?"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허리 괜찮아? 언니가 뭐래? 부러졌대?"

"뭐?! 아니야! 그냥 근육이 좀 놀란 것뿐이야! 허리 멀쩡해!"

큰일 날 소리를 하는 지수에게 그 표정은 무너지고 말았지만.

"아저씨가 다 나을 때까지 내가 수발 들어 줄게!"

지수는 두 손을 불끈 쥐며 무언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허리가 나을 때까지 온갖 잔심부름을 도맡아서 하겠다는 제안을.

"에이···. 괜찮아. 내가 너한테 어떻게 그래."

"아니야! 진짜 말만 해!"

"괜찮아."

"말만 하라니까?"

"괜찮다니까!"

"아잇! 내가 아저씨 도와 준다고!"

"······."

"······."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연이어 거절했지만, 그녀는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번 마음먹은 건 고집스럽게 유지하는 그녀이니 내가 무슨 말로 거절을 하든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달라붙을 것이다.

지금도 내가 괜찮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질척거리는 지수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에휴, 그래. 알았어. 그럼 물."

"어?"

"물 가져오라고. 목 마르니까."

지수가 질릴 때까지 내가 그녀를 부려 먹으면 된다.

"으, 응! 알았어! 금방 가져올게!"

***

그 뒤로, 이틀이 지났다.

예린의 무릎 상처와 내 허리의 사소한 부상은 순조롭게 낫는 중이었다.

아이의 상처는 하루나 이틀이면 충분히 걸을 수 있을 만큼 나을 것이고, 나는 이미 다 나았다고 할 수 있었다.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지난 이틀 동안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도서관에서 눌러살며 나와 한세아가 구해 온 식량을 까먹으면서 지냈다.

챙겨 온 식량은 네 명이 배를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했기에 억지로 나갈 필요도 없었거니와 외부 탐색 활동을 할 수 있는 인원이 한 명으로 줄었기 때문에 굳이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도서관이라 그런지 가만히 있는 일행의 심심함을 달래줄 책들도 한가득 있었고, 그 덕분에 나를 포함한 일행은 이참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주민 센터 옆에 있는 아파트 거목의 그림자에 의해 도서관은 해가 높게 떠 있어도 내부가 엄청 밝지는 않았다.

그래도 햇빛이 아예 들어오지 않는 것은 또 아니었기에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창가에 나란히 앉아 유유자적하게 각자 고른 책을 읽었다.

이런 한가로운 일상을 보낸 것이 대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이제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다.

앞으로는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는 게 더욱 힘들 것이 분명하니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두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겠지.

"끄응···."

나는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도서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쉬는 것도 좋았으나 한 번에 몰아서 쉬니 몸이 근질근질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탁탁-

"······."

탁탁-

"······."

타타탓-

"······."

타타-

"그만!"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뒤돌아서 외치고 말았다.

움찔!

"나 이제 괜찮다니까? 언제까지 따라다니려고?"

"하지만···."

"지수야, 나 다 나았어. 이거 봐! 아무렇지도 않아, 진짜로."

나는 팔다리를 쭉쭉 피는 동작하면서 부상의 회복을 알렸다. 바로 이틀 전부터 하루 종일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지수에게.

지수가 수발을 들겠다는 것이 이 정도까지 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저씨, 어디 가? 화장실? 나도 같이 가.'

내가 새벽에 잠깐 일어나면 지수는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나를 따라왔고.

'아저씨, 배 고프지 않아? 내가 밥 가져 왔어.'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실 때면 어느새 눈앞에 통조림이 까져 있었다.

'아저씨, 슬슬 목 마르지? 여기 물!'

'아저씨, 나도 같이-.'

'아저씨!'

'아저씨!!'

그냥···.

그냥 어딜 가도 지수가 내 옆에 있었다.

이것저것 시키다 보면 금세 질려서 나가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안일한 판단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귀를 막아도 지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에 나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다시 슬그머니 눈을 뜨니 윤기 있는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는 지수가 보였다.

쫑긋거리는 귀를 살짝 앞으로 내민 채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

나는 그것이 무엇인 지 알 것 같았다. 아니, 알고 있다.

그것도 아주 확실하게.

지수가 내가 시키지도 않은 심부름을 할 때마다 드는 미안함과 고마움에 귀를 살짝 마사지해주거나 머리를 쓱쓱 쓸어 주니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은 그녀였으니 아마 이번에도 그런 것들을 바라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일종의 보상 말이다.

마사지와 칭찬이라는 보상을 노린 지수에 의해 이제 그만해도 된다는 내 말은 철저하게 묵살 당했고, 편했지만 시키지 않은 잡일들이 눈 앞에서 강제로 해결 되어버리는 상황이 지난 이틀 동안 계속 벌어져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 보라.

이제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보상을 바라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뻔뻔하게 지으면서!

지수의 집착은 상상 이상이었다.

'아니, 고집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차오르는 한숨을 꾹 참고 다시 한번 말했다. 그래도 나를 위해서 하는 행동이니 나쁜 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그동안 내가 편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기도 했고.

"이제 그만해도 돼. 그동안 수고했어. 네 덕분에 빨리 나은 것 같아."

그녀는 보상을 주기 전까지는 이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할 기세였으니 감사를 전하면서 지수의 귀를 마사지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쓰윽- 쓰윽-

"···알았어. 나 그냥 언니가 밥 먹게 모이라고 해서 아저씨 따라다닌 거야. 진짜야."

지수는 마지못해 수긍하며 변명했다. 나 또한 마지못해 인정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마사지를 한껏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럼 쉽게 끝나지 않는 2차 아니, 3차전의 시작이니까.

이윽고, 나와 지수는 예린과 한세아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린과 한세아는 식사 준비를 마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 현우씨! 어서 와요."

한세아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가 좀 늦었죠? 미안합니다."

"아뇨! 딱 맞게 오셨어요."

"맞아요. 딱 맞게 왔어요, 오빠!"

언제나 그렇듯 반갑게, 밝게 맞아주는 한세아와 예린.

우리는 그녀들이 간단하지만 정성스럽게 준비한 식사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식사 시각은 조용하지 않고, 오히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먹는 편이었다.

오늘 읽은 책은 재미가 없었다느니, 내일은 참치 말고 연어캔을 먹으면 안 되겠냐느니, 아저씨가 챙겨 온 이불덕에 밤에 춥지 않아서 좋았다느니 하는 그런 일상적인 대화 말이다.

급하게 먹을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 일상이 주는 편안 함을 한껏 즐기면서 어제와 같은 식사 시간. 어제와 비슷한 대화 내용을 이어 나갔다.

다만 뒤에 이어지는 상황까지 어제와 비슷하지는 않았다.

한창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바로 그때,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쫑긋!

지수의 귀가 순간 앞으로 쏠리면서 그녀의 시선은 닫힌 도서관 문 너머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누가 와."

나, 예린, 한세아는 얼굴을 바싹 굳힌 채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나는 망치를, 한세아는 총을, 예린은 안전한 후방에서 대기를.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서 무기를 들거나 숨었다.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지수의 귀에 무언가 들린 것은 확실하니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닌 곧 닥칠 상황에 대비를 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으니까.

도끼를 양손으로 꽉 쥔 지수가 내 옆에 붙어 섰다. 그녀는 귀를 쉴 새없이 쫑긋거리며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쿵쿵쿵쿵!

무언가가 닫힌 도서관 문을 급하게 두드리더니,

찰칵찰칵찰칵!

잠겨 있는 문을 억지로 열기 위해 문고리를 계속해서 돌리기 시작하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는.

···평화로운 일상의 끝을 고하는 소리였다.

철컥철컥철컥철컥철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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