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7 - 127. 해후 (4)
"······."
"······."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로 도서관 문 너머에 있을 무언가를 경계하고 있었다.
킁킁-
"···아저씨, 피 냄새가 나. 그것도 잔뜩."
코를 찡긋거리던 지수의 말에 우리는 한층 더 경계심을 높여야만 했다.
갑작스럽게 문을 두드리면서 강제로 문을 열려고 하는 정체불명의 존재.
그것 하나만으로도 일행의 긴장감은 극에 달하고 있건만, 피 냄새까지 잔뜩 풍기고 있다니?
언제고 잠시나마 평화로웠던 일상이 깨질 줄은 알았으나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이 무색하게 매정한 현실이 그저 야속하기만 했다.
쿵쿵쿵!
도서관의 단단한 문에서부터 시작된 울림이 도서관 내부 곳곳에 울려 퍼진다.
나와 지수는 가장 선두에 서서 곧 들이닥칠 위협을 대비했지만 아무리 시간이 문이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일행의 긴장감이 가득한 얼굴 한 켠에 의아함이 떠오른다.
문을 두드리는 강도가 점점 세지면서 경첩이 부서질 것이라는 우리의 예상과 달리,
쿵쿵··· 쿵··· 쿵······
오히려 세기는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마치 꺼져가는 불꽃처럼.
서서히.
바로 그때.
"···흑, 아무, 도 없어···? 도와, 주세요······."
목이 잔뜩 쉰 듯한,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무의식적으로 망치 자루를 꽉 쥐었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들리는 목소리는 분명 어디서 들어 본 듯한 낯이 익은 소리였다.
'설마···.'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곁눈질로 옆에 있는 지수를 보니, 그녀 또한 혼란스러운 기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제발······."
다시 한번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지수는 말릴 새도 없이 도서관 문을 향해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지수야! 이런 씹!"
그녀가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던 나도 덩달아 같이 뛰기 시작했다. 문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지수가 맡았던 비릿한 혈향이 내게도 맡아지고 있었다.
나무 인간의 체액 냄새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의 피 냄새가.
도서관 문 앞으로 순식간에 내달린 나는 바로 문을 열려고 하는 지수를 막아섰다.
"잠깐만! 밖에 뭐가 있을지 알고? 아니, 누구인지 알고?"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여자야."
"뭐?"
"우리보다 여기에 먼저 있었던 여자들 목소리였어.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지만 확실해."
지수는 쫑긋거리는 귀의 방향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를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만약, 진짜 만약에 내가 틀렸다고 하더라도, 당장 밖에 있는 걸 어떻게든 해야 해. 창문 밖으로 내던져 버리든, 안쪽으로 끌고 와서 처리나 치료를 하든 간에. 피 냄새가 너무 강하니까."
나는 지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단박에 이해하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코를 자극하는 혈향이 점점 사방으로 퍼지고 있는 상황.
건물 내부에서는 냄새가 쉽게 빠져나가지 않고 고인다고 해도 문제다.
내부에서 내부로 뻗어 나가는 것이 아닌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이미 외부에서 잔뜩 풍겨지고 있는 피 냄새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지수의 말대로 무작정 문만 닫고 있는 것이 능사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피 냄새를 지우는 것이 최우선으로 해야 할 과제였다.
사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매 순간의 선택에 따라 지수, 예린, 한세아의 목숨이 촛불처럼 흔들리는 상황이기에 눈앞의 안전을 고른다는 선택지에 매몰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은 지금은 당장의 안전보다는 좀 더 먼 미래의 안전을 생각해야 했다.
"하아··· 그래. 무슨 말하는지 알았어. 대신 내가 앞장 설 테니까, 지수 너는 도끼 들고 뒤에서 대기해. 혹시 모르잖아."
"응, 아저씨."
지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로 조금 물러났다.
나는 차오르는 한숨을 애써 억누르며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다른 한 손에는 하얗게 변할 정도로 망치를 꽉 쥔 채로.
철컥- 끼이이익···
잠금장치를 해제한 후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동시에 한층 더 강한 피 냄새가 도서관 내부로 흘러 들어왔다.
"······!"
그리고 추측이 확신으로 변하는 현실에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내 뒤에서 바싹 따라붙고 있던 지수가 헛숨을 들이켰다.
지수가 말한 대로, 문을 두드리던 존재는 도서관에 먼저 자리 잡고 있었던 자매가 맞았다.
동생인 신아현이 아닌 언니인 신아진이 도서관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다만 문제는.
복도에 기대 힘없이 축 늘어진 몸, 볼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핏물에 푹 젖은 옷들, 바닥에 고이기 시작한 피 웅덩이, 사라진 한쪽 동물 귀, 풀려가는 동공, 겨우 내쉬는 숨.
상태가 온전치 않았다는 것.
그것도 매우 심하게, 항상 옆에 있던 신아현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 채로 말이다.
나와 지수는 예상보다 심각해 보이는 부상에 섣불리 손을 댈 수가 없었다.
피 냄새가 잔뜩 났기에 어느 정도 각오를 했건만.
가만히 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멍하니 그녀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발이 지면에 고정이라도 된 듯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못했다라는 표현이 옳은 말이었다.
그 순간.
"···흐으······."
실눈을 뜬 신아진이 사정 없이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내 손끝을 잡아 왔다.
말없이 잡아 온 손과 감겨 가는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는 간절한, 아주 간절한 의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리고 손끝에 닿은 식어가는 온기가 순식간에 멍한 내 정신을 일깨웠다.
'···가만히 있지마, 움직여!'
이를 악물며 망치 자루를 꽉 쥐었다.
내가 별다른 반응 없이 보기만 하자 신아진의 눈에 서서히 절망이 깃들 찰나, 나는 황급히 몸을 낮춰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일단 이야기는 나중에 듣겠습니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쉬세요. 저희가-."
나는 이어질 뒷말을 급히 속으로 삼켰다.
내가 이 말을 섣불리 내뱉어도 되는가?
부상자는 안정을 취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지만 일행과 아무런 합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와주겠다는 말을 해도 되는가?
비록 그것이 공수표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지수가 있는 자리를 보았으나 그녀는 어느새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 한세아와 예린에게 무어라고 지시를 하는 중이었다.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여유는 없었고, 내가 신아진에게 말을 전해 줄 수 있는 시간 또한 시시각각 줄어드는 것이 현실.
어쩔 수 없이 결론은 나 혼자 내려야만 했다.
다시 고개를 돌리니 신아진과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의 눈에는 절망, 희망, 간절함, 이해, 미안함 같은 각종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한데 섞인 상태로 깃들어 있었다.
결국, 나는.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가라앉아 가고 있던 뒷말을 다시 꺼내 올려 말로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감정의 격류가 나를 옭아매고 있었으니까.
"······."
내 말을 들은 신아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녀는 뭔가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계속해서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안타깝게도 의지가 소리로 변하는 일은 없었다.
입술을 달싹거린 것도 잠시, 기력을 다한 듯 신아진의 고개가 푹 숙여졌기 때문이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황급히 그녀의 목에 손을 갖다 대어 맥박을 재 보았다. 정말 다행히도 약하지만 꾸준히 박동하고 있는 맥박이 느껴졌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바로 그때.
"현우씨! ···힉! 무슨 피가···."
한세아가 품 안에 락스나 세제 같은 세정 용품들을 한아름 들고나왔다. 그녀는 이내 복도에 기대고 있는 신아진을 보더니 지수와 마찬가지로 헛숨을 들이켰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현우씨! 저는 이 분 안쪽으로 옮겨 놓을 테니까 현우씨는 지수씨랑 같이 아래로 내려가서 혹시 올 수도 있는 나무 인간들 좀 상대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한세아는 재빨리 고개를 저어 정신을 차리더니 해야 할 일들을 다다다 쏟아 내기 시작했다.
"저랑 예린이는 현우씨랑 지수씨가 시간을 버는 동안 빨리 피 닦아내서 최대한 냄새를 지워볼게요. 그리고···."
"······?"
"나무 인간들하고 싸우는데에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녀는 미안함을 가득 담아 내게 말했다.
어차피 누군가는 남아서 핏자국을 청소해야 한다.
사방에 튀어 있는 핏자국의 흔적을 지우는 일은 예린 혼자서는 역부족이니 한세아가 남아서 아이를 도와주는 것이 그나마 제일 나았다.
싸울 수 있는 나와 지수가 접근하는 나무 인간들을 상대할 동안에 말이다.
그리 생각한 나는 괜찮다며 말하려고 했지만, 한세아를 뒤따라 예린을 데리고 나온 지수에 의해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저 눈빛에 마음을 담아 보낼 뿐.
"아저씨! 빨리 내려가자! 나무 인간들에게 농성은 안 통해. 오히려 더 몰려올 거야. ······아니, 이미 몰려오고 있는 것 같네. 이제 도망치는 것도 힘들어졌어. 그러니까 밖에서 상대해야 해. 넝쿨 체액도 최대한 뿌려놔야 하니까."
"알았어. 가자."
나와 지수는 각자 손에 망치와 도끼를 한 자루씩 든 채로 비상구 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예린과 한세아가 급하게 움직이는 소리를 뒤로하고.
[그르아아아악!]
[아아아악! 아아악!]
계단을 내려가는 와중에 바깥에서 나무 인간들의 괴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비상계단에 있는 유리창문을 통해서 검은 파도가 밀려오는 것이 보인다.
나무 인간으로 이루어진 파도는 주로 역쪽에서 밀려오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향에서 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검은 파도가 모래성을 부수기 위해 사방을 점거해 오고 있었다.
지수의 말마따나, 당장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친다고 해도 나무 인간들의 마수에서 벗어나는 것은 매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죽음의 손아귀는 끝내 우리의 목을 틀어쥐고 말겠지.
우리는 그런 불길한 상상이 강하게 들 때마다 발을 크게 내디디며 다리를 좀 더 빨리 놀렸다. 일말의 희망을 가지면서.
다만 희망보다 절망이 차지하고 있는 지분이 더 높았을 따름이었다.
쿵! 쿵! 쿵! 쿵! 쿵!
바닥을 때리는 발소리가 비상구를 웅웅 울렸지만 그쪽에 신경 쓸 여유는 전혀 없었다.
이윽고.
"헤엑! 아저씨! 여기! 헥! 여기서 싸워야 할 것 같은데···!"
"알았, 어!"
"어디 가지 말고 나랑 같이 싸워! 흩어지면 안 돼! 헤엑!"
1층에 도착한 나와 지수는 숨도 고르지 못한 채로 주변을 쉴 새 없이 둘러보면서 망치와 소방 도끼를 높게 쳐들어야만 했다.
[크아아아악!]
[끼이아아아아-]
[이이이이익!]
피 냄새를 맡은 나무 인간들이,
피 냄새를 따라온 나무 인간들이,
피 냄새의 끝에 있는 주민 센터를 향해서 몰려들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