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1 - 131. 해후 (8)
'···이런 상황이 아닌,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다면 좋았을련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나는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쳐 냈다.
'집중해.'
이런 위기 상황이라고 해도, 그것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지금 투정하는 것은 배가 불러도 너무 부른 소리였다.
쿵! 쿵! 쿵!
눈을 감자,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 심장 박동 소리.
쿵! 쿵··· 쿵······
심장의 박동 소리가 커지는 것만큼 외부에서 들리는 파괴음은 점점 작게 들리고 있었다.
「······.」
눈을 감은 채로 시간이 좀 더 지나자, 내 몸을 타고 흐르는 어떤 존재가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푸른 입자.
그것이 혈류를 타고 온몸을 돌아다니면서 내게 활력을 불어 넣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망막에 푸른빛무리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빛번짐으로 시작한 그것은 점점 밝아지더니 이내 푸른빛으로 내 시야를 가득 메웠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눈이 부시지는 않았다. 오히려 안정감이 느껴졌다.
「······.」
문득, 지금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입자를 내가 조종할 수 있겠다, 라는 직감이 들었다.
나는 직감이 시키는 대로 손가락을 꿈틀거리면서 천천히 돌아다니고 있는 푸른 입자를 끌어당겨 보았다.
그러자 수월하게 끌려오는 푸른 입자들.
땅을 뒤흔들었을 때 느껴졌던 특정 길목을 따라서 끌어당긴 푸른 입자를 내 팔로, 팔에서 손으로, 손에서 들고 있는 망치로 인도했다.
하지만 이내 손을 휘저어 흩어 버렸다.
그것은 결국 땅을 흔드는 이적을 발휘할 때 사용되는 방법일뿐, 푸른 불꽃을 만들어 내는 방법은 아니었으니까.
'···다시.'
나는 흩어진 푸른 입자를 한데 그러모았다.
이번에는 한데 뭉쳐진 푸른 입자를 길게 늘리며 내 주변을 휘감아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다. 푸르게 타오르는 불꽃을 상상하면서.
돌리고, 또 돌렸다.
모으고, 또 모았다.
긴 띠를 형성한 푸른 입자들이 회전하면 할수록, 내 심장은 거세게 고동쳤고 몸을 둘러싼 기이한 열기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틱- 핏- 티딕-
어느새 떠진 눈의 실핏줄이 터져 시야를 붉게 만든다.
체감상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았지만 붉게 물든 시야에 들어오는 상황을 보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에에에엑!]
쾅쾅쾅쾅쾅!
여전히 나무 인간들이 문을 뚫기 위해 두드렸고,
여전히 바리케이드는 놈들의 맹공을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우득- 우직!
망치를 겨우 들고 있는 내 팔의 근육이 소용돌이치는 푸른 입자의 회전력을 이기지 못하고 찢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못한 탓일까.
몸이 점점 엉망이 되어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지고 있었지만, 나는 결코 푸른 입자를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푸른 입자가 회전할수록 푸른 불티가 튀기는 했으니까.
비록 그것이 미약한 불티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지금 여기서 멈추면 희미한 불티는 그저 허무하게 사라질 뿐이었다.
심장에 담긴 푸른 입자도 눈에 띄게 줄어들다 못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 기회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한몫했다.
'그것만은 절대로 안 돼. 두 번의 기회는 없-.'
그 순간.
"커헉! 우웨에엑!"
속에서부터 밀려 올라온 덩어리진 핏덩이들이 입 밖으로 강제로 토해내 졌다.
철퍽- 철퍽···
핏덩이가 바닥으로 떨이지며 사방으로 비산한다. 나무 인간의 검붉은 체액 위에 내 피가 뒤덮이게 되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악!]
쾅! 쾅! 쾅! 쾅! 쾅!
코앞에서 진한 피 냄새를 맡은 나무 인간들이 한층 더 요란스럽게 난리를 쳤다. 놈들이 바리케이드를 두드릴 때마다 바리케이드는 눈에 띄게 밀려나고 있었다.
"아저씨!!"
뒤에서 지수가 경악하며 나를 부르는 것이 들렸지만, 나는 그녀에게 간단한 대답도 돌려줄 여유와 힘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망치를 높게 치켜 들 뿐이었다.
"켁! 허윽!"
핏물을 한차례 토하고 나니, 정신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해지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모든 걸 멈추고 쉬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뒤의 결과가 어찌 되었든, 나는 멈추지 말고 망치를 내려쳐야 했다.
내려쳐서 우리의 생명을 위협해 오는 나무 인간들을 처리해야 했다는 말이다.
게다가 잠시나마 시간을 벌어 주었던 바리케이드가.
터어어엉! 콰장창! 까득! 까드드드득!
결국 나무 인간들의 압력에 크게 밀려났고, 겨우 막아둔 입구가 다시 개방되고 말았으니까.
그러니 더욱 멈추어서는 안되었다.
[흐아아아아아악!]
[끄르르륵! 키아아아악!]
놈들이 밀물처럼 전방의 모든 공간을 점거하며 주민 센터로 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이제는 대략적인 수도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눈앞을 가득 채운 나무 인간들.
그와 동시에.
"흐으윽!"
나는 진득한 철맛이 느껴지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불안정한 푸른 불티가 튀고 있는 망치 자루를 꽉 쥐었다.
지금 망치를 내려친다면, 나무 인간들은 확실하게 죽을 것이다.
다만, 정상적인, 제대로 된 방법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억지로 기워서 만들어 낸 푸른 불꽃을 사용한 반동으로 나는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진, 오늘 내가 발휘할 수 있는 한계는 땅을 울리는 이적까지였을 뿐.
푸른 불꽃의 사용은 허락되지 않았었으니까.
「······.」
근데 그게 어쨌다는 거냐.
나는 그녀들을 내가 가야 할 길에 끌어들인 책임을 져야 해.
[끼아아아악!]
[그르르르르륵!]
수많은 나무 인간들이 나를 붙잡기 위해 사방에서 손을 뻗어오고, 내가 높게 든 망치를 내려치려는 그때.
「···현우야, 그게 아니야. 그렇게 하면 넌 죽고 말 거야. 나는······ 네가 살기를 바라.」
이변이 일어났다.
자애롭고 포근한 목소리가 뇌리에 울린 것이다. 아주 낯익은 목소리가.
"······!"
흐릿해진 의식을 돌아다니는 목소리는 내 제어 아래에 있던 아니, 이리저리 뒤엉켜 가던 푸른 입자를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도와줄게. 지금 이 느낌을 기억해.」
푸른 입자들이 이동하면 이동할수록,
푸른 입자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내부에서 올라와 입으로 토해내지는 끈적한 핏덩이들의 양이 적어지고 있었다.
살기 위해 박동하는 심장과 산소를 들이키는 폐부를 꽉 조이는 고통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
파앗-! 타다다닥!
망치 머리에 맺힌 옅은 푸른빛무리 사이에서 작은, 아주 작은 푸른 불티가 수없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번에도 고작 불티에 불과했지만, 그 안에 담긴 입자의 양은 결코 우습지 않았다.
내가 억지로 만들어내었던 것과는 질과 양 자체가 달랐다.
이윽고.
화르르륵!
망치와 망치를 들고 있는 팔 주위를 휘감고 있는 푸른 입자들이 전부 푸른 불티로 변한다.
츠츠츠츠-
내 전신을 휘감고 있는 푸른 불티가 한순간에 망치 머리로 응집되며, 마침내 눈앞의 나무 인간들을 정화할 준비가 끝났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순간.
"으아아아아!"
나는 소리를 크게 내지르며 망치를 바닥을 향해 강하게 내려찍었다.
어느 때보다 강해진 힘.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바라는 희망.
어느 때보다 강해진 살고 싶다는 생(生)의 의지.
그 모든 것들을 담아서.
콰아아아앙━━!
아름다운 푸른 입자에 휩싸인 망치와 끈적한 체액이 눌어붙은 바닥이 서로 맞부딪치자 푸른 불티는 순식간에 그 크기를 키워나가며 원형의 불길을 형성했다.
화르르르르륵!
그리고 그 원형의 불길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검은 입자를 품고 있는 모든 것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불탄다.
[크아아아악!]
[끼에에에에엑!]
[구아아아악!]
이 근처의 모든 나무 인간들이.
놈들은 갑옷처럼 두른 나무 껍질에 불이 붙자 매우 고통스러워하며 불을 끄기 위해 바닥을 나뒹굴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푸른 불꽃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나무 인간들은 하나, 둘씩 몸부림치는 것을 멈췄고, 이내 재만 남아 바람에 휘날리게 되었다.
불탄다.
푸확! 푸쉬이익! 끼르르르륵!
주변을 둘러싼 모든 넝쿨들이.
넝쿨들은 줄기에서 체액을 뿜어내며 불을 끄려고 했지만 꺼지지 않는 불은 그것들을 말라비틀어지게 하다못해 잿더미로 만들었다.
불탄다.
타닥! 타다닥!
아파트를 지지대로 삼은 거목이.
거대한 나무는 넝쿨 줄기를 따라 피어 오르던 푸른 불꽃에 의해 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푸른 불꽃은 그것의 두터운 기둥, 커다란 잎사귀, 길게 뻗은 잔가지들을 연로로 삼아 기세를 부풀려나갔다.
그그그그극-!
불길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거목의 기둥이 상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진다.
열기만 감지하면 그것을 하얀 포자 덩어리로 만들어왔던 소화제는 푸른 불길이 동료들을 모조리 재로 만드는 압도적인 광경에 감히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을 죽여야만 했다.
그 무엇도 쉽게 꺼트릴 수 없는 불길은 오로지 적들만을 향해서 타올랐다.
손바닥만한 망치 머리에서 시작된 푸른 불티는 거대한 불길이 되어 건물 주변을 뒤덮은 것으로도 모자라━
······하늘을 향해 높게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