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32화 (133/497)

Chapter 132 - 132. 해후 (9)

「너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

······.

"······."

「내가 있는 곳에 올 준비도, 정화를 감당할 수 있는 준비도.」

······.

"······!"

「다음에도 무리를 한다면, 네 육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겠지. 현우야, 나는 네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

······.

"······저씨!"

「그러니까 그들의 조각을 찾아. 멀지 않은 곳에 조각이 하나 있어. 가까워지면 알아차릴 수 있을 거야. ······이런 말밖에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시간이-」

······.

"···아저씨!!"

누군가 나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에 침잠해 있던 정신이 급격하게 부상하기 시작한다.

굳게 닫혀 있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자, 가물가물한 시야에 보이는 것은 오직 뿌옇게 변한 주변의 모습들.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한 시야에 푸른 무언가가 어른 거리는 것이 보인다.

'내가 방금 뭘 했던 거지?'

흔들리는 시야에 보이는 것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푸르게 타오르는 입자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간단한 생각을 이어 나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전신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끝을 알 수 없는 탈력감이 감돌고 있었으니까.

갑작스럽게 찾아온 힘은 등장한 것만큼이나 한순간에 사라졌다. 아니, 사라지다 못해 내가 그나마 가지고 있던 힘마저 앗아간 느낌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방금 전까지 터질 것처럼 박동하는 심장은,

박동할 때마다 푸른 입자를 강하게 뿜어냈던 심장은,

이제는 간신히 박동만 유지하고 있을 뿐.

마치 한세아가 가지고 있던 푸른 조각이 그랬던 것처럼, 속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비틀!

겨우 서 있던 다리가 힘이 풀려 주저앉기 시작했다.

어쩐지 시야가 흔들리더라니, 내 몸이 균형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눈이 흔들렸나 보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저씨! 제발···!"

서서히 뒤로 넘어지고 있던 나를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지수가 내가 쓰려지려고 하자 황급히 달려와 나를 부축한 것이다.

"제발! 흑, 숨 좀 쉬어! 응? 아저씨!"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숨?

숨이라니?

'······나 지금 숨 안 쉬고 있나?'

그러한 사실을 인식한 순간, 내 목을 꽉 틀어막고 있는 덩어리진 핏덩이들이 느껴졌다. 한계까지 조여진 폐부도 같이.

"······! 커헉! 우웨에엑!"

나는 모자란 숨을 보충하기 위해 기침하면서 곧장 목에 걸린 것들을 모조리 토해냈다. 구역질을 할 때마다 속에 쌓여 있던 핏물이 뭉텅이로 나오고 있었다.

철퍽! 철퍽!

입 밖으로 쏟아진 찐득하게 뭉쳐진 핏덩이들은 바닥으로 떨어지며 흩어지지도 않은 채 착 달라붙는다.

"허억! 허억! 허억-!"

숨통이 트이자 갈수록 흐릿해져 가던 정신이 기운을 차리고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전보다 확연히 또렷해진 시야로 주변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또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닥에 엎어진 채 꿈틀거리는 나무 인간들, 그 위를 뒤덮은 푸른 불꽃.

바닥에 웅덩이를 형성했던 나무 인간들의 체액들, 그것을 증발 시키는 푸른 불꽃.

바닥에 사방으로 흩뿌려진 나무 껍질 조각들, 그것을 재로 만드는 푸른 불꽃.

내가 만들어 낸 푸른 불꽃이 적들을 전부 불사르고 있는 광경이 보인다. 오염된 검은 입자를 정화하는 푸른 입자가 가득한 불꽃이.

바로 그때.

"아저씨!"

와락!

지수가 나를 꽉 안았다. 내가 정신을 차렸다는 것을 눈치챈 그녀는 눈에 띄게 안도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수의 얼굴은 이미 눈물 범벅이었지만.

내 앞섬을 축축하게 만드는 그녀의 눈물과 나를 끌어안은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생명력 가득한 온기가 느껴진 순간.

"······아."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아니, 이제야 실감이 들었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내가 지수를 살렸다.

내가 예린을 살렸다.

내가 한세아를 살렸다.

내가.

···모두를 살렸다는 것을.

"···콜록! 지수야. 우리 살았다."

상황에 맞지 않게 실실 웃으면서 지수에게 말하자, 그녀는 더욱 품에 파묻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지수의 꼬리가 내 팔을 휘감았다.

"···응. 우리 살았어. 이번에도 아저씨가 나를, 우리를 살렸어."

"어디 안 다쳤지?"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아저씨, 괜찮아? 아까부터 계속 피 토했잖아. 응? 어떡해···. 눈도 엄청 빨개졌어···."

"어지럽고 기운이 없기는 한데, 좀 쉬면 괜찮아질 것 같아. 너무 걱정 하지마."

나는 내 상태를 가늠해 보고 말했지만, 지수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나는 아저씨가···, 아저씨가······."

그녀는 뒷말을 쉽사리 잇지 못하고 계속 멈칫거렸다. 내뱉는 말에는 떨림이 가득했다.

"···미안."

나는 다시금 불안에 떠는 지수를 안심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겨우 들어 올리며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손에 지수의 귀가 주는 오묘한 촉감이 느껴졌다.

그러자 지수는 입술을 질끈 씹더니 내게 몸을 기대왔다.

···좀 무거웠지만 이 정도는 참을 만 했다.

나와 지수는 서로가 안정될 때까지 한동안 마주 안고 있는 자세를 유지했다.

지수가 나를 놓아주지 않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내게 손 하나 꿈틀거릴 힘이 남아 있지 않은 까닭이 제일 컸다.

타닥! 타닥!

아직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은 푸른 불꽃이 잔여물들을 마저 불태우는 소리가 들린다.

지수의 온기와 푸른 불꽃이 주는 안정감이 있는 상황 속에서 나는 주민 센터에서 들어오고 나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천천히 복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몰려오는 나무 인간들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놈들과 싸웠지만 수가 점점 많아지는 나무 인간들이 담을 넘어서 나와 지수를 위협해 왔었지.

그리고 바로 뒤로 후퇴한 후 주민 센터 1층에서 농성하면서 버텼고.

나무 인간들을 죽이면 죽일 수록 무언가 고조되어 가던 내가, 망치를 바닥에 내려찍어 기묘한 파장을 분출하자 땅이 울리면서 놈들을 강제로 넘어트리는 것으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비록 그마저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뚫리려고 했으나 다행히 다시 입구가 뚫리기 직전, 내가 강제로 만든 푸른 불꽃으로 나무 인간들을 한 번에 일소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다시 해 보라고 하면 절대 못해.'

나는 훌쩍거리는 지수의 등을 쓸어내리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나무 인간들을 하나씩 처리하면서 생긴 전투의 열기가 내가 얼떨결에 쓴 이적과 상관 관계가 있을까?

싸우다가 갑자기 각성하는 히어로 영화도 아니고, 이게 말이나 되는가?

'뭐, 그렇게 따지면 땅울림에 이어서 푸른 불꽃도 만들어낸 것이 제일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아마도 수원역에서 보았던 푸른 장막처럼 내 심장 속에 있는 푸른 입자를 사용해서 만들어 낸 이적이겠지.

다만 오늘 내게 허락된 것은 땅울림뿐, 푸른 불꽃을 만들어 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었다.

억지로 푸른 입자들을 움직여서 불티를 만들어 내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

내 제어에서 벗어나는 푸른 입자들은 점점 늘어만 갔고, 그에 따른 반동으로 내 몸이 회복이 힘들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변하고 있었으니까.

만약 내가 망치를 내려치기 전에 들린 속삭임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 내가 입은 부상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을 큰 부상이.

원래대로라면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큰 상처를 입었어야 했으나, 그렇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 목소리 덕분이었다.

'그래, 목소리.'

나를 죽이려고 하는, 악의에 가득 찬 목소리가 아닌,

나를 도우려고 하는, 연민이 가득한 목소리가 말이다.

그리고 의문 투성인 상황 속에서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이 있었다.

이번에도 내 머릿속에 직접 울렸던 목소리.

내가 죽을 위험에 처할 때마다 울렸던 목소리.

내가 간절히 찾는 사람인, 소중한 사람의 목소리.

수원 고등학교에서 들었을 때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가 들었던 목소리는.

···바로 누나의 목소리였다.

누나의 목소리가 내가 움직이던 푸른 입자들을 대신 조종한 순간, 나는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방향에서 거대한 무언가와 연결된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비록 아주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었지만, 나는 혼에 새겨질 정도로 느낄 수 있었다는 말이다.

내가 향하고 있던 최종 목적지인 남산 연구소. 누나는 그곳에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에는 정신이 번쩍 뜰 만큼 큰 안도와 기쁨이 느껴졌었으나, 이내 이어진 생각에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연구소에 있는 누나의 상태가 어떤지 전혀 알 수 없었으니까.

잠들어 있는지, 깨어 있는지, 하다못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목소리가 들린 것은 확실했지만, 이상하게도 누나가 멀쩡한 상태가 아닐 것이라는 예감만 들었다.

단순한 기우인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결국, 내가 남산 연구소에 도달해서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난 그곳으로 향하려고 했고, 향하는 중이니 가서 확인하면 그만이다.

단지 제발 무사하기를 바랄 뿐.

그래도 오랜만에 봐서- 아니, 보지는 못했지만.

'반가웠어, 누나. 기다려, 내가 꼭 갈 테니까.'

바로 그때.

쫑긋!

우당탕탕-!

지수의 귀가 쫑긋거리는 것과 동시에 비상구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아흐흑···."

이어서 들리는 신음 소리와 함께 한세아가 절뚝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는 총을 꽉 쥔 채로.

"현우씨! 지수씨!"

땀을 뚝뚝 흘리던 그녀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나와 지수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달려왔다.

비록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내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한세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졌지만 말이다.

털썩-

"현우씨······! 괜찮아요? 지수씨!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지수에게 기댄 상태로 간신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내 옆으로 한세아가 주저앉았다. 그녀에게서는 진한 락스와 각종 세재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피 냄새를 지우기 위해 닥치는 대로 세정제를 쏟아부은 탓이리라.

"세상에! 얼굴 좀 봐···. 흑, 어떡해···. 최대한 빨리 온다고 한 건데 제가 너무 늦었나 봐요, 흑."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 한세아는 떨리는 손으로 내 얼굴을 더듬었다. 한층 더 강해진 락스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녀는 마치 다시는 못 볼 사람을 만지는 것처럼,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만지는 것처럼 나를 살살 만지고 있었다.

'······죽은 사람처럼?'

그러고 보니 한세아가 나타났을 때부터 나와 지수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섬에는 내가 피를 토한 흔적이 가득했고, 내 입가에도 피가 범벅인데다가 눈은 잔뜩 충혈이 됐으니 한세아가 오해할 만도 했다.

게다가 지수가 울면서 나를 안고 있기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누가 봐도 좋은 일이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광경이긴 하다.

그 순간.

잠자코 있던 지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녀는 후각을 자극하는 락스 냄새를 조금이나마 막기 위한 것인지 어느새 얼굴에 천 조각을 두르고 있었다.

"···언니, 아저씨 안 죽었어요."

"콜록! 저 살아 있습니다···, 세아씨. 콜록! 콜록!"

나 또한 한세아가 가진 오해를 풀기 위해 서둘러 말했다. 입을 열 때마다 비릿한 쇠맛이 가득 느껴지면서 입에 고여 있던 피가 조금 튀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한세아는.

"꺄아아악! 현우씨! 피! 피!"

오해가 풀리기는커녕 펄쩍 뛰면서 더 놀라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큰 눈망울이 더 커진 상태로.

그 뒤로, 나와 지수는 우리가 무사하다는 것을 한세아에게 납득과 이해를 시키기 위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동안 설명해주어야 했다.

물론, 나는 환자라는 이유로 입도 뻥긋 못하고 대부분의 이야기는 지수가 다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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