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33화 (134/497)

Chapter 133 - 133. 신아진 (1)

"그러니까··· 우리가 도망갈 필요가 없어졌다는 거죠?"

나와 지수로부터 이야기를 대강 들은 한세아가 확답을 원하는 듯 되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안도, 걱정, 미안함, 피곤함 같은 감정이나 몸 상태가 한데 뒤섞여 있었다.

한 마디로 매우 지친 얼굴이었다는 말이다.

"네, 제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답을 해주려고 했지만,

"쉿! 현우씨는 아무 말도 하지 마요. 또 피 토하면 어떡해요? 그냥, 그냥 가만히 쉬고 있어요. 지금도 손 하나 쉽게 못 움직이면서···."

급하게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는 한세아에 의해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듯 다시금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언니, 아마 아저씨가 하고 싶은 말이 맞을 거예요. 처음에는 나무 인간들이 끝도 없이 몰려왔었는데 지금은 다 사라졌거든요. 한 번에 싹 다요."

내 머리를 허벅지에 눕힌 지수가 내가 하려던 말을 대신 받아서 한세아에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게다가 아저씨가 만들어 낸 푸른 불꽃이 나무 인간들의 시체들을 태우기까지 해서 뒤처리할 필요도 없어졌어요.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지수의 말에 나, 지수, 한세아는 너 나 할 것 없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전방의 상황을 눈에 담았다.

잔뜩 우그러진 철제 보관함, 산산조각 난 유리문과 셀 수 없는 금이 간 유리 벽, 내가 내려친 망치에 의해 깨진 건물 바닥 타일, 뒤집어진 민원실 대기석과 소파, 이리저리 휘어진 담벼락 뼈대, 들쑥날쑥하게 들어 올려진 보도 블럭···.

부서진 것들을 찾는 것보다 그나마 멀쩡한 형태를 유지하는 것을 세는 것이 훨씬 빠르다고 할 정도로 눈에 보이는 대부분이 파괴된 모습.

사실, 멀쩡한 것을 셀 필요도 없었다. 그런 것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누가 봐도 안전과는 거리가 매우 먼 모양새였지만, 나와 지수는 여기만큼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주민 센터 1층을 대부분 부순 주범들은 이미 푸른 불꽃에 의해 전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나무 인간들뿐만이 아닌 건물을 둘러싸고 있던 넝쿨에 이어 바로 옆에 있는 아파트의 거목 또한 푸른 불꽃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해 한낱 재로 스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오직 검은 입자에 영향을 받은 것들만 전소(全燒)한 푸른 불꽃.

푸른 불꽃은 그것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가구나 외벽을 태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길의 중심지에 나와 지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티는 우리를 태우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니, 태우기는 했으나 그것은 나와 지수에게 묻은 나무 인간들의 체액에만 한정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므로 다른 건물들보다 조금 부서졌지만 검은 입자들이 대부분 제거된 주민 센터가 훨씬 안전하다고 할 수 있었다. 지수가 말마따나 근처의 나무 인간들이 전부 사라지기도 했고.

내가 이뤄낸 광경이지만, 확 와닿는 실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저 한동안 멍하니 회색 재가 가라앉은 모습을 바라볼 뿐.

아마 오래도록 이 모습이 기억에 남겠지.

휘이이이잉···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부는 길을 따라 재가 뒤따라 움직이며 재가 한가득 내려앉아 있던 바닥은 점차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바로 그때.

"아저씨 뭐야 진짜? 마법사야? 어떻게 사람이 불을 만들어내지? 언니가 말했던 푸른 불이 이거였구나······. 진짜 신기하네. 대단하기도하고."

눈처럼 휘날리는 재를 보며 얼굴을 두른 천을 한층 더 조인 지수가 말했다. 그녀는 신기한 생물을 바라보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응? 어떻게 한 거야? 혹시 나중에 다시 보여 줄 수 있어? 지금은 말고, 지금은 아저씨 몸 상태가 안 좋으니까."

위기가 완전히 끝났다고 판단한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한세아도 말은 하지 않았으나 시선을 내게 집중한 것으로 보아 하니 그녀도 궁금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것보라.

아까까지 내가 말하는 것을 막던 한세아는 어디 가고, 어느새 아무 말없이 시선으로 답을 재촉하는 한세아만 남지 않았는가.

그래도 그녀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 아마 또 하기에는 힘들 것 같은데. 나도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다. 그냥 얼떨결에 된 거라서. 상태가 좀 괜찮아지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은 뭔가 방전된 기분이라 뭐라 장담은 못 하겠네."

두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상황 속에서 나는 곤란한 얼굴을 하며 답했다. 기운을 잃은 심장 박동을 느끼면서.

"···방전? 방전, 방전······. 아!"

한세아는 방전이라는 단어를 계속 곱씹더니 무언가를 깨달은 듯 가슴팍에 있던 푸른 조각을 꺼내 들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현우씨! 이거! 혹시 이 조각 안에 있는 푸른 입자가 필요한 거 아닐까요? 저번에 수원역에서 만들어낸 장막도 그렇고 그때도 푸른 입자 썼잖아요. 푸른 불꽃 만들어내느라 현우씨가 가진 푸른 입자를 다 써서 기운이 없는 거라면요?"

"세아씨 말이 얼추 맞기는 합니다만···."

나는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흐렸다. 한세아가 얼굴에 의문을 띠며 말꼬리를 잡았다.

"···합니다만? 왜요?"

"언니, 그거 지금까지 충전만 해봤죠? 만약 조각 아저씨한테 갖다 댔는데 아저씨가 가지고 있던 푸른 입자까지 홀라당 가져가 버리면 어떡해요? 그럼 진짜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지수가 나를 꽉 끌어안으며 잡아당겼다.

아마도 한세아가 내민 조각에서 멀어지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인 것 같았다. 아니, 의식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게, 그녀는 찜찜한 눈으로 조각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아."

한세아가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는 황급히 조각을 뒤로 물렸다.

"그건 아닐 거야. 충전 방식도 자동에서 수동으로 바뀐 것 같거든. ···음. 근데 지금은 또 모르겠네···?"

나는 거리가 좀 벌어진 나를 허망하게 바라보는 한세아에게 괜찮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지만, 직접 해 보기 전까진 나도 확신할 수 없는 문제에 미묘하게 말끝이 올라가고 말았다.

그런 나를 보고 한세아가 울상을 짓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니! 저는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 하지 마십쇼, 세아씨. 아까부터 계속 말했지만 조금 쉬면 금방 나을 겁니다."

나는 짐짓 자신감 있는 어투로 말하면서 한세아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손이 이끌리는 대로 내게 가까워지더니 내게 폭 안겼다. 부드러운 여체가 내 몸을 가볍게 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

안으려고 하는 목적은 없었지만, 이내 좋은 게 좋은 걸라며 품에 들어온 한세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두 사람에게 파묻힌 채 가만히 휴식을 취하고 있다 보니 조금 힘이 돌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목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주민 센터로 들어오는 밝고 따스한 햇빛과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휴식을 이어 나가는 것도 잠시, 나는 이제 슬슬 도서관으로 돌아가야겠다고 판단했다.

아직 홀로 설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까지고 바깥에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무엇보다 지금 도서관에서는 예린 혼자 있을 테니 무서워하고 있을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움직여야할 때였다.

"자자, 그만 일어나고 도서관으로 올라갑시다. 예린이 우리 기다리다가 목 빠지겠어요."

그리 생각한 나는 지수와 한세아를 향해 말했다.

"아저씨, 이제 일어날 수 있겠어? 어지럽지는 않고?"

"혼자 일어나는 건 아직 힘들다. 미안하지만 지수 너랑 세아씨가 나 좀 부축해 줘야 할 것 같아."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지수와 한세아는 걱정하지 말라는 얼굴을 하며 내 팔을 한쪽씩 붙잡아서 각각 어깨에 둘렀다.

"현우씨! 미안해할 필요 전혀 없어요! 현우씨 덕분에 살았는데 그깟 부축이 문제겠어요? 진짜 하루종일도 해 줄 수 있다구요."

"맞아, 아저씨! 우리만 믿어. 아저씨 다 나을 때까지 내가 또 도와줄게, 하루종일! 그리고 그 여자한테 따져야 하는 것도 있고."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던 나, 지수, 한세아는 이어지는 지수의 말에 나를 일으키려던 자세 그대로 굳고 말았다.

'그래, 그 여자가 있었지.'

그녀들의 말처럼 내가 이런 부상을 입게 된 원인의 제공자인 신아진이 떠올랐다.

하마터면 나와 지수만이 아닌, 한세아와 예린까지도 허망하게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가져온 신아진.

내가 마지막에 이적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필시 이곳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겠지.

무작정 그녀를 탓하기만 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순순하게 넘어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도 안 되고.'

이제는 신아진에게 사정을 들어볼 시간이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어렴풋이 예상이 가고 있었지만, 본인에게 직접 듣는 것만큼 정확한 것은 없었으니까.

다만.

···그 전에 내가 바닥에서 일어나는 것이 우선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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