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34화 (135/497)

Chapter 134 - 134. 신아진 (2)

"언니. 하나, 둘, 셋! 하면 아저씨 동시에 드는 거예요. 알았죠?"

"알았어요. 신호 잘 맞출 테니 걱정 마요."

"좋아요. 한 번에 해요. 한 번에. 두 번 시도할 기운은 없으니까."

"아이참, 알았다니까요."

지수와 한세아는 물에 떠다니는 해초처럼 바닥에 널브러진 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고작 사람 하나 부축하는데 무슨 신호까지 주면서 하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 지수, 한세아의 체력 상태를 고려하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갈 만 했다.

나는 탈력감이 사라지지 않은 탓에 전신에 힘이 쭉 빠진 상태라서 애초에 논외.

시간이 지나면 걸을 수 있을 정도까지 회복될 줄 알았건만, 역시 단기간에 회복하는 것은 무리였나보다.

지수도 파도처럼 밀려오는 나무 인간들과의 사투를 벌이느라 체력을 한계까지 쏟아 냈기 때문에 남은 체력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도 다리를 후들거리면서 간신히 서 있기만 할 수 있을 뿐이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남은 한세아 또한 상태가 온전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상태가 제일 낫다고는 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한세아는 직접 싸우지 않았다고는 해도 비상구와 복도에 흩뿌려진 핏물을 제거하느라 심력을 많이 쏟았을 것이고, 심지어 크게 다친 신아진을 돌보고 오지 않았는가.

게다가 그녀는 마지막에 계단에서 구르기까지 했으니 우리 중에서 겉으로 보이는 상처가 제일 크기까지 했다.

사실, 이런저런 이유들을 가져다가 붙였지만 결국 지수와 한세아를 가장 크게 힘들게 하는 것은 바싹 긴장한 몸이 풀린 것에서 오는 지독한 피로감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회복할 때까지나 그녀들이 체력을 어느 정도 되찾을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효율적인 측면에서 나는 지수와 한세아에게 먼저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진작에 말을 꺼내 봤지만 그녀들은 어림도 없다는 듯 다 같이 올라가야 한다면서 단호한 태도를 취한 것이다.

'하여튼 고집들은.'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혼자 남았으면 괜스레 서운함을 느꼈을 것 같다. 먼저 올라가라고 말을 꺼낸 주제에 말이다.

원래 사람 마음이 이토록 간사하다.

이윽고, 마음의 준비를 마친 지수와 한세아가 내 팔을 한 짝씩 들어 어깨에 둘렀다.

"할게요, 언니. 하나, 둘, 세엣-!"

"흐읏···! 세에엣!"

그녀들은 눈짓으로 신호를 주고받더니 지수의 신호에 맞춰 내가 설 수 있도록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면서 최대한 다리에 힘을 주며 바닥을 딛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가 흐느적거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지만.

모두가 함께 노력한 덕분일까.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기 위한 씨름을 한 끝에, 나는 지수와 한세아의 도움을 받아 두 다리로 설 수 있었다.

"흐아!"

"됐다! 아저씨가 섰어!"

그녀들은 일순간 피로가 사라진 얼굴로 반색하며 좋아했다. 계속 힘없이 누워 있다가 제대로 서게 되니 감개가 무량했다. 별것 아닌 일이긴 해도 말이다.

그리고.

"······?"

"뭐, 왜? 언니, 왜 그렇게 봐요? 응? 아저씨, 왜 그런 눈으로 보냐니까?"

"···아니야."

"맞아요.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 뭐냐고!"

마지막에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을 한 지수에게 묘한 시선을 보내는 일이 있었지만,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어났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지.

우리는 지금부터 1층에서 4층까지 올라가야 하니까.

······그것도 무려 계단으로만.

"···나 처음으로 4층에 자리 잡은 게 후회돼. 저만 그러는 거 아니죠?"

지수가 한숨을 폭 내쉬며 한탄하듯 물었다. 나와 한세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휴, 그래도 뭐 어쩌겠어요. 하나씩 올라다가 보면 도착하겠죠."

"맞아요, 지수씨. 지수씨 말대로 한 칸씩 올라가다 보면 금방 도착할 거예요. ···아니, 금방은 아니겠지만. 하아."

"저도 힘내 볼 테니 움직입시다. 예린이 혼자 있는 게 영 불안하네요."

우리는 이제 겨우 한 고비를 넘겼을 뿐, 가야 할 길이 멀었으니 가만히 있을 시간도 아까웠다.

잠시 서로 눈을 마주치다가 작은 한숨을 쉬는 것을 끝으로, 나, 지수, 한세아는 비상구로 들어가 계단에 한 발씩 걸쳤다.

터벅- 터벅- 질질···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코를 찌르는 락스 냄새와 그 속에 섞여 있는 각종 세정제 냄새였다.

"우욱-!"

후각이 좋은 지수는 상상 이상으로 역하게 맡아지는지 올라오는 구역질을 애써 참는 모습.

"나 괜찮아! 참을 만 해! 진짜야!"

나와 한세아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자, 지수는 고개를 흔들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코맹맹이 소리로 말한 탓에 신뢰성은 하나도 없었지만.

"···발 조심해요, 다들. 세제 때문에 조금 미끄러울 수 있어요. 최대한 닦아낸다고 한 건데 걸레로 쓸 천도 여유롭지가 않아서···. 현우씨가 챙겨 온 옷들 아니었으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을 거예요."

한세아의 말에 내가 빌라에서 주워 온 옷들이 떠올랐다. 일단 챙기고 보자는 생각에 가져온 것들이건만. 도움이 되었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천이 낡고 사이즈가 다 제각각이라 쓸 곳도 마땅치 않았는데 예상외의 쓸모를 다한 옷가지들이 의외였다.

역시 쓰고자 하면 못 쓸 것들은 없나 보다.

나와 지수는 대강 수긍하며 잠시 멈춘 발을 계단 위로 옮기면서 한 칸씩 조심스럽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저벅-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세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겹치며 비상계단에 작게 울린다.

"하아, 하아-."

"후우···."

휴식을 취하고 온 것이 무색하게 다시금 숨은 조금씩 거칠어지는 소리로 변하고 있었다.

찰박- 찰박-

간혹 한세아가 미리 주의를 줬던 것처럼, 미처 닦이지 못하고 고여 있는 락스나 세제가 밟히면서 독한 냄새를 한층 더 풍긴다. 그럴 때마다 나를 부축하는 지수가 힘들어하는 소리를 냈다.

독한 락스 냄새에 나조차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건만, 지수는 오죽하겠는가.

미끌-!

탁- 탁-!

"으앗!"

"조심!"

미끄러운 세제를 밟아 발이 바닥을 타고 미끄러지려고 한 아찔한 상황도 있었지만, 간신히 계단의 철제 난간을 붙잡아 어떻게든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수야, 괜찮아?"

"으, 응. 미안. 조심한다고 조심한 건데···."

지수는 순간 벌어진 일에 피로가 싹 날아간 얼굴을 한 채 꼬리 털을 바싹 곤두세웠다. 그녀의 놀란 심장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그래도 안 넘어져서 다행이에요. 엘리베이터가 작동했다면 좋았을 텐데, 오늘만큼 그게 아쉬운 적이 없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지수가 놀란 마음을 다 잡을 겸, 나와 한세아의 숨도 조금 고를 겸 잠시 가만히 서서 휴식을 취했다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느리지만 꾸준하게 오르다 보니 어느새 4층까지 단 1층만 남은 상황.

터벅- 터벅- 터벅-

4층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생각에 한결 여유가 생긴 탓일까.

이제서야 신아진의 상태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아니, 걱정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이었다.

이윽고, 마지막 남은 반 층의 계단을 오르면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세아씨, 신아진씨 몸 상태는 어땠습니까? 후우, 많이 심하던가요? 처음 봤을 때는 중상인 것처럼 보였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피투성이가 된 그녀가 눈에 각인되다시피 인지되었었기 때문에, 상처의 정도가 매우 클 것이라고 판단한 끝에 나온 질문이었다.

힘들게 구했는데 상처가 쉽게 치료하지 못할 정도라면, 결국 신아진을 살리지 못할 가능성도 염두하고 있기도 했다.

그렇다고 바로 포기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헥- 헤엑-, 가서 보면 확실하게 알겠지만, 좀 심해요. 헥-."

"···그렇게 심하다고요? 아니, 도서관에 도착하면 그때 저랑 같이 보면서 나머지 이야기해 주십쇼."

나는 한세아에게 되물었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무엇보다 땀을 뚝뚝 흘리고, 지쳐 보이는 한세아에게 굳이 지금 대답을 요구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거의 다 왔기도 했고.

중상을 입었다고 추정되는 신아진이 걱정되어 조급함을 느끼고 있었기에 저지른 실수였다.

터벅··· 터벅···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예린이 기다리고 있는 도서관 문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단지 문만 보이고 있을 뿐인데도 지수와 한세아는 감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녀들의 얼굴과 별반 다르지 않는 표정일 것이다.

그만큼 탈진한 상태에서 무려 4층에 달하는 계단을, 사방에 뿌려진 세제 때문에 미끄럽기까지 했던 계단을 오른 것이 아니던가.

생각보다 엄청 힘들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둘이 부축해 줘서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어요."

"이 정도는 현우씨가 우리에게 해준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늘도 현우씨 덕분에 살아남은 걸요."

"맞아. 아저씨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다고. 이런 건 온종일- 아니, 미안. 하루 종일은 못해 줄 것 같네."

"어어?! 지수, 너 아까는 온종일도 해 줄 수 있다고 했잖아."

"아잇! 알았어! 까짓것 하루 종일 해 줄게!"

나, 지수, 한세아는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오른 것에 성공한 것처럼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도서관 문을 열었다.

벌컥-

속으로는 일말의 불안감을 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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