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36화 (137/497)

Chapter 136 - 136. 신아진 (4)

"흑, 아흐윽···."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통 어린 신음 소리에 가라앉아 있던 정신이 조금씩 부상한다.

스윽- 스윽-

뒤이어 들리는 부드러운 천 조각이 스치는 소리.

"지수씨, 데운 물 좀 컵에 따라서 주세요. 이 사람 지금 땀을 너무 많이 흘리고 있어서 이러다가 탈수 증세 올 것 같아요."

"알았어요, 언니. 금방 가져다줄게요."

근처에서 들리는 지수와 한세아의 목소리.

내 옆에서 자던 그녀들은 어느새 일어나 무언가를 하는 듯했다.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으니까.

'···벌써 아침인가?'

그런 생각이 순간 들었으나,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빛이 매우 약했으니 그건 아닌 듯했다.

'그럼 아직 밤이라는 소리인데.'

잠깐 눈만 감고 있는다는 게 그만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은 온몸에 멍이 든 것처럼 아픔이 느껴지고 있었다.

삭신이 쑤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게끔 뼈 마디마디가 하나같이 쿡쿡 쑤셨다.

잠든 의식이 깨어나면 깨어날수록 몸이 현 상태를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흐···."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다시 잠이 든다는 선택지가 있긴 했으나, 귓가에 들리는 소리를 마냥 무시하고 잠을 취할 수는 없는 노릇.

무엇보다 지수와 한세아가 움직이고 있는데 나만 편하게 자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가물가물한 시야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어둠이 내려앉은 도서관을 살며시 밝히는 촛불.

어제만 해도 달빛이 매우 밝아서 따로 불을 밝힐 필요는 없었지만, 오늘따라 짙게 드리운 구름 탓에 촛불을 켰나보다.

그리고.

"아저씨! 깼어? 더 자도 되는데. 몸은? 좀 나아졌어?"

따뜻하게 데운 물을 컵에 담고 있던 지수가 보였다. 그녀는 내가 일어난 것을 확인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괜- 크흠, 괜찮아. 이제 멀쩡해. 한숨 자고 나서 그런가?"

나는 잠긴 목소리를 풀기 위해 헛기침하면서 답했다.

얼추 몸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된 것은 맞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괜히 아픈 티를 낼━

꾸우욱-

"또, 또 거짓말."

"아윽!"

걱정스러운 눈을 한 지수가 손가락으로 내 허벅지를 꾹 누르기 전까지는 티를 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 마음먹은 게 무색하게 지수의 손가락에 곧장 무너지고 말았지만.

꾹- 꾹-

나는 자꾸만 허벅지 근육을 누르는 그녀의 손가락을 은근슬쩍 제지하며 지금의 화제를 피하게 만들어줄 다른 화제를 찾았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니 신아진을 돌보고 있는 한세아가 보였다.

"진짜 괜찮다니까. 그것보다 신아진씨 상태는 어떻습니까, 세아씨? 둘이서 계속 지켜봐야 할 정도로 악화된 건가요?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던 겁니까?"

"에휴···."

바로 옆에서 지수가 한숨을 작게 쉬면서 나를 보고 있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한세아에게 물었다.

"하아···. 일단 저랑 지수씨가 일어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끽해야 30분 정도 되었을려나요. 그리고 신아진씨는 정신을 차렸다가 잃었다가 반복하고 있네요. 열도 나고 많이 아파해서 급한 대로 진통제랑 따뜻한 물 좀 먹이려는 참이었어요."

"음···."

"상태는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저희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했어요. 여기서 더 해 줄 것도, 해 줄 수도 없어요. 붕대는 충분해도 약이 모자라서요. 진통제말고 더 좋은 약이 필요한데···."

나는 어두운 기색으로 말하는 한세아를 보다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신아진을 바라보았다.

끙끙 앓는 소리를 흘리면서 무어라고 계속 중얼거리는 그녀.

"···뭐라 말하는 거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도와달라는 말일 거예요. 아까 절 보자마자 그런 말을 했었거든요. 그러다가 정신을 잃었구요."

내 중얼거림을 들은 한세아가 답했다. 그녀는 신아진의 머리를 감싼 붕대를 새것으로 갈아주고 있었다.

"도와주기는 뭘 어떻게 도와줘? 지금 우리 코가 석 자인데. 당장 오늘만 해도 죽을 뻔했잖아. 이 사람 대충 낫는 대로 우리는 바로 여기 뜨자. 갈 길이 멀다니까?"

지수가 씩씩거리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녀는 오늘 낯에 있었던, 일행을 위기로 몰아 넣었던 아찔한 순간을 떠올린 것 같았다.

'······미안, 지수야.'

지수는 신아진이 낫는 대로 방생하자고 주장했으나, 나는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의 조각을 찾아.」

잔상처럼 어렴풋이 기억에 남은 누나의 목소리.

「멀지 않은 곳에 조각이 하나 있어.」

그리고 뒤에 이어진 무언가를 찾으라던 누나의 목소리.

그 외에도 무슨 말을 분명 더 했던 것 같은데, 지금 당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더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을 맴도는 조각에 관련된 말들만 속으로 계속해서 되뇌일 뿐.

하지만.

대체 무슨 조각을 말하는 거지?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했으니 한세아가 가지고 있는 푸른 조각을 말하는 것인가?

'나무뿌리가 헤집고 지나가서 생긴 땅의 틈에서 푸른 수정이 나왔단 말이에요. 불을 피울 수 있게 해주는 푸른 수정이.'

아니면 신아현이 이야기해주었던 의왕시 생존자 캠프에서 나온 푸른 수정을 말하는 것인가?

갑작스럽긴 했지만 누나와의 해후는 정말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영문 모를 소리만 늘어놓은 누나에게 원망이 치솟았다.

뭘 알려줄 거면 조각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위치했는지, 아니면 적어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는 알려 줘야 할 것이 아닌가.

물론, 이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지만 말이다.

누나는 무언가에 쫓기듯 다급하게 말을 이어나갔었다는 느낌이 들었으니 누나 나름대로 최대한의 정보를 전달해준 것이겠지.

나는 그렇게 믿었다.

내게 건넨 목소리에 한가득 들어 있던 걱정, 연민, 자책 같은 감정들. 그런 목소리로 내 걱정을 하던 것을 보니 어찌 보면 오히려 그게 누나답다고 할 수 있었다.

내가 지수와 한세아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바로 그때.

"콜록! 콜록!"

"······!"

갑작스럽게 신아진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나를 보자마자 엉금엉금 기어 오기 시작했다.

"저기, 지금 움직이면 안 돼요! 기껏 굳은 상처가 다시 풀어질 수도 있다구요!"

한세아가 신아진의 행동을 만류했으나,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나와 지수가 있는 곳에 도달할 때까지.

거리 자체는 3m도 되지 않는 매우 짧은 거리였지만, 전신이 칼에 베인 상처가 있는 부상자에게는 이조차 쉽지 않는 거리였다.

신아진이 기를 쓰면서 바닥을 길 때마다 상처를 막고 있는 붕대가 피에 조금씩 젖고 있었다. 출혈이 다시 터진 것 같았다.

이윽고, 나와 지수 앞에 도착한 신아진은 바닥에 엎드리며 빌었다.

"도와주세요···. 동생이, 위험, 해요. 흑. 도움을 청할 사람이 당신, 들 밖에는 없어, 요······. 제발······."

신아진은 바싹 엎드린 상태에서 내 다리를 붙잡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제 몸을 드릴, 게요! 콜록! 저 아직 남자랑 해 본, 적 없어요···! 이 몸, 이라도 원한다면 드릴, 테니까···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제 동생, 구해주, 세요···. 그 남자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요···. 제발요···."

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리는 신아진은 필사적으로 몸을 비벼왔다. 음심을 자극하기 위한 몸짓은 그저 한없이 애처롭기만 했다.

"······."

"······."

지수는 입을 꾹 닫고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입을 다문 채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혼자는 싫어······."

불과 몇 번의 움직임만에 기력을 전부 소진한 신아진은 정신을 잃고 몸을 허물어트렸다. 울먹이면서 내뱉은 말과 함께.

흘러가는 상황을 뒤에서 지켜보던 한세아가 신아진을 다시 소파에 눕히고 나서야 나와 지수는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 진짜! 진짜 싫어, 이런 거. 짜증 나···."

지수가 머리를 거세게 흔들면서 불만을 토해냈다. 아니, 불만이라기보다는 해소할 수 없는 답답한 심정을 토로한 것에 가까웠다.

신아진이 정신을 차리면 단단히 한마디 하겠다고 벼르던 그녀였지만.

마음이 모질지 못한 지수였으니 신아진이 간절하게, 필사적으로 청한 부탁을 정면에서 외면하기 어려운 탓이리라.

"아저씨,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저 사람한테는 진짜 미안하지만! 나는 여전히 반대야. 우리 죽을 고비를 넘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하루도 안 지났다고. 그런데 또 사지로 걸어 들어가겠다고? 그것도 자의로?"

지수가 마음을 다잡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꼬리가 잠잠한 것을 보니 매우 진지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 이야기한 거 보니까 저 여자를 이 꼴로 만든 게 여기 캠프 사람들이라는 게 확실해졌잖아. 수가 얼마나 될 줄 알고? 또 신아현, 그 여자가 어디에 잡혀 있는 줄 알고? 아무것도 모르잖아! ···애초에 살아 있기나 할까?"

뒤에 이르러서는 소리를 죽인 채 말하는 지수.

나는 잠시 끊겼던 생각의 흐름을 다시 끌어와 말할 타이밍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내가 들었던 속삭임이 해준 조각에 관련된 이야기를.

"지수야, 세아씨. 잠깐 여기로 모여 보십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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