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7 - 137. 신아진 (5)
"···왜,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반대다?"
지수는 불만스레 말하면서도 내 부탁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
한세아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가 입술만 잘근잘근 씹을 뿐, 끝내 입을 열지는 않았다. 대신, 나도 모르는 새에 긁힌 상처가 있는 손에 말없이 약을 발라주었다.
이윽고.
쿨쿨 자는 예린을 제외하고, 나, 지수, 한세아가 한 자리에 모였을 때.
"제가 오늘 행한 이적에 관해서 말할 게 있습니다. 땅울림이나 푸른 불꽃 같은 거요. 특히 지수 너는 바로 앞에서 봤으니 궁금할 게 많을 것 같은데. 맞지?"
나는 그녀들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야 당연히 궁금하긴 하지. 근데 지금 꼭 해야 해? 우리 조금 전까지 저 사람 어떻게 할 건지 말하고 있지 않았어?"
미간을 찌푸리며 의문을 드러내는 지수.
"푸른 불꽃은 예전에 한 번 봐서 알겠는데 땅울림은 뭐예요? 또 다른 걸 할 수 있게 된 건가요?"
고개를 갸웃하며 물음을 던지는 한세아.
"땅울림이요? 아, 아저씨가 망치로 바닥 내려찍더니 앞에 있던 나무 인간들 넘어트린 거 말하는 거 같아요, 언니."
"때린 건 바닥인데, 넘어진 건 나무 인간들이라고요?"
"맞아요. 갑자기 아저씨가 마법을 부리더라구요. 그것 덕분에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어요. 뭐, 더 대단한 건 뒤에 나온 푸른 불이었지만요. 불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이 나도 단단히 났어요."
"와아···. 비상 계단에 있어서 푸른 불만 간신히 봤는데 그런 일도 있었구나···."
"전 바로 앞에서 봤는데도 제대로 본 건지 눈을 의심했다니까요. 어떻게 사람이 그런 걸 할 수가 있지?"
지수와 한세아는 어느새 낮에 있었던 일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크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감상은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충분히 나눠도 되니까, 지금은 제가 그런 것들을 어떻게 썼는지에 대해 말할 차례입니다. 확신보다는 추측에 가깝지만."
내가 끊지 않으면 계속 이야기할 기세였기 때문에 나는 중간에 끼어들며 그녀들의 대화를 중단시켰다.
서로 어색하게 눈치를 보고 있는 그녀들이 의도적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튼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대화를 멈추는 데에 한몫하고 있었다.
내가 앞으로 할 말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은 이야기일 것이라고 직감이라도 한 것일까.
"······."
"······."
어두운 기색을 띠며 잠잠해진 지수와 한세아를 보며 나는 머릿속으로 정리해 놓았던 추측들을 하나씩 말하기 시작했다.
위기 상황에 느껴졌던 심장 속에 있는 푸른 입자,
푸른 입자를 소모해 무의식적으로 행한 땅 울림이라는 이적, 반동을 무시하고 한계를 넘어서 억지로 사용한 푸른 불꽃이라는 이적, 그 끝에 들린 누나의 목소리와 누나가 도와 준 덕에 반동이 줄어들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진실, 다만 반동이 아예 없지는 않아서 지금은 심장에 있는 푸른 입자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다는 현실.
그리고 목소리가 말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조각을 찾으라고 한 것까지.
숨기는 것 없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말해주었다. 중간중간 타는 목을 따뜻하게 데워진 물로 축이면서.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도달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간단하면서 복잡한 이야기를 하나씩 끝맺을 때마다 지수와 한세아가 경악하거나 난리를 떨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괜찮다면서 그녀들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야 했고.
마침내 모든 이야기가 끝나 도서관에 적막이 내려앉았을 때.
"목소리가 진짜인지 단순한 환청인지는 둘째 치고, 그래서 결국 아저씨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네? 아저씨 누나가 말한 조각이 캠프에 있는 조각을 말하는 건지 아닌 지 확인하는 김에 저 여자 언니도 겸사겸사 구하겠다는 거네? 그치?"
지수가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녀의 꼬리는 바닥을 탁탁 내려치고 있었다.
"······그렇지?"
심기가 많이 불편해 보이는 모습에 나는 묘하게 기가 죽어 답했다.
"아저씨, 미쳤어?!"
빼액 소리를 지르는 지수.
내가 귀를 막는 태도를 취하니 지수는 내 멱살을 잡아 털어댈 기세였다. 아니, 이미 붙잡고 있었다.
"···현우씨, 조각은 이거로는 안 되는 건가요?"
한세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슴팍에 있던 푸른 조각을 꺼내 들었다. 촛불을 켜둔 영향으로 푸른 조각에 담긴 입자는 조금 줄어들어 있었다.
"켁,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말 나온 김에 한번 실험해 보죠. 무슨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도 볼 겸. 낮에는 몸 상태가 별로라서 조심해야 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했으니까요."
나는 한세아가 들고 있는 푸른 조각을 건네받았다. 여전히 내 멱살을 잡고 있는 지수를 겨우 말린 다음, 항상 하던 대로 푸른 조각을 채우기 위해 집중해 보았으나 아니나 다를까.
조각 안의 푸른 입자의 양은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지금도 켜져 있는 촛불에 의해 조금씩 양이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내 심장에 푸른 입자가 남아 있었다면 조각 안의 입자에 변동이 생겼을 테지만, 마치 비활성화된 듯한 심장이라 그런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조각 안에 있는 입자를 내가 흡수할 수도 없었다. 저것은 내가 조종할 수 있는 푸른 입자가 아니었으니까. 내 심장 속 푸른 입자로 충전을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뭔 일방통행도 아니고.'
정확히는 내 심장 속 푸른 입자를 다시 활성화시키는 데에 사용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뭔가 다른 것이 필요했다.
아마도 누나가 말한 그들의 조각이라는, 한세아가 가지고 있는 조각과는 다른 조각이.
"···아무 일도 없네요. 충전도 안 되고······."
한세아는 심각한 얼굴로 푸른 조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현우씨, 현우씨는 제가 가지고 있는 조각하고 여기 캠프에 있는 조각이 확실히 다를 거라고 예상하는 건가요?"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합니다. 멀지 않은 곳에 있고, 가장 가까운 조각이라고 해 봐야 얼마 전에 들었던 캠프의 조각뿐이니까요. 만약 아닐 수도 있지만, 직접 가서 봐야 확실히 알겠죠. 이대로 그냥 위로 올라간다면 저희는 앞으로 세아씨가 가진 조각을 쓰는 게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
"아직도 어떻게 한 건지 모를 이적을 행한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고요. 더는 충전을 못 하니까."
이어지는 내 말에 한세아는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일행의 추위를 달래주고, 총이라는 위력적인 무기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푸른 조각의 힘이 다한다면, 앞으로의 여정은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 것이 분명하다.
비록 위력만큼이나 큰 소음 때문에 쓸 기회는 몇 번 없었지만, 그래도 무기가 하나 더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차이는 매우 크니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내 심장의 푸른 입자를 다시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시도라도 해 보아야 했다.
바로 그때.
"아저씨는 그 목소리를 믿어? 목소리가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잖아? 만약 아저씨가 기억하는 누나의 흉내를 낸 다른 무언가라면? 선한 존재가 아닌 수원역 그 남자처럼 이상한 존재라면?"
잠시 생각하고 있던 지수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근데 아까 말했듯이 나는 그 목소리가 도와 준 게 아니었으면 지금, 이렇게 너랑 말하고 있지 못했을 거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죽였겠지. 틈은 많다 못해 넘쳤으니까."
"아, 아니! 아저씨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야 한다는 게 아니고오···! 나는 그냥 걱정돼서···. 아, 진짜!"
내가 쓰게 웃으며 답하자, 지수는 당황하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바닥을 탁탁지던 꼬리도 움직임을 순간 멈췄다.
"아니야. 나도 너랑 같은 생각하긴 했어. 한 번에 믿기 힘든 이야기이기도 하고,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도 일반적인 일은 아니니까. 애초에 내가 땅을 흔들거나 불을 만들어내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지수의 의문은 타당했다.
정신병이 있는 환자도 아닌데, 대체 어느 누가 환청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는 말인가?
나도 그녀가 말한 것들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나는 그저 믿고 싶었다.
오랜만에 들은 목소리의 정체가 누나이기를.
연구소에 있을 것이라 추정되는 누나가 아직 살아 있기를.
"그래서 더욱 확인하고 싶은 거야. 정말로 내가 들은 목소리가 내가 아는 누나의 목소리가 맞는지, 목소리가 말한 것이 진실이 맞는지에 대해서. 그 과정에서 사람 하나를 구한다는 게 끼어 있을 뿐이지."
"···결국 돌고 돌아서 신아현씨가 잡혀 있는 캠프에 가고 싶다는 결론이네요. 하아."
한세아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탄식했다.
"좋아, 좋다고. 캠프에 간다고 치자고. 어떻게 갈 건데? 어찌어찌 도착해서, 어떻게 조각을 찾을 건데? 거기 사람들도 조각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그걸 순순히 내줄까? 오히려 먹잇감이 제 발로 찾아왔다며 좋아할 것 같은데?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그 여자는 또 어떻게 찾을 건데?"
팔짱을 낀 채 쌍심지를 키고, 연달아 질문을 던지는 지수.
"거기가 어디 있는지는 알아? 거리는? 또 가는 길에 있는 나무 인간들은 어쩌고?"
그녀는 어느새 넓게 펼친 지도 곳곳을 가리키며 열변을 토해냈다. 지수가 지적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억지가 아닌 제대로 풀고 가야할 의문이 맞았다.
지금 우리가 있는 주민센터에서 의왕시 생존자 캠프가 있는 물류 단지까지의 거리는 직선 거리로 대략 2km. 좀 더 돌아가야 할 것을 예상하면 3km는 그냥 넘겠지.
그리고 물류 터미널까지 도달할 동안 마주칠 가능성이 있는, 길거리를 어기적거리며 돌아다니는 수많은 나무 인간들도 매우 위협적인 존재다. 하물며 이적을 쓸 수 없는 지금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지상의 나무 인간들을 피할 방법이 있다면?
"거리는··· 좀 멀지만 괜찮아. 길도 위가 아니라 아래로 다닐 거고. 조각은 가서 생각해 봐야지. 여기서 아무리 생각해봤자 답이 안 나오니까."
길은 지상만이 아닌 지하에도 있지 않은가.
바로 하수도 말이다.
······조금 위험하긴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