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9 - 139. 하수도 (1)
건물 바깥으로 나가자 한층 더 지독해진 어둠이 나와 지수를 덮쳤다.
"후우···."
숨을 크게 들이쉬니 폐부를 가득 채우는 서늘한 공기.
[······끄······악]
···까각······까각···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는 밝은 달빛마저 없으니 한층 더 음산한 분위기가 되었다.
주민 센터로 몰려들지 않아서 살아남은 나무 인간들이 내는 소리가 멀리서 어렴풋이 들려오고 있는 탓일까.
외부가 안전하지 않음을 감지한 본능이 몸의 감각을 날카롭게 만들기 시작했다.
"저기로 들어가면 되겠다, 아저씨. 바로 앞에 있네."
내 손등을 톡톡 친 지수가 바닥을 가리켰다. 정확하게는 아스팔트 도로의 구멍을 담당하는 원의 형태를 한 금속 덩어리, 바로 맨홀이었다.
"장화는 아저씨 신어. 나는 워커 있으니까 괜찮아."
"알았어. 고마워."
나는 지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 수로의 상태가 어떤지 예상만 될 뿐,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한세아가 신신당부하면서 건넨 장화.
'현우씨, 그래도 비교적 최근에 비가 내리긴 했으니까 많이 미끄러울 수 있어요. 다치지 않게 꼭 신어요. 잊지 말구, 꼭!'
가슴 장화였다면 좋았겠지만, 수원역 지하 터널에서 한번 착용한 이후 완전히 넝마가 되어 버렸으니 그나마 멀쩡한 형태를 유지하는 장화 부분만 분리한 것이다.
구멍이 송송 뚫리고, 이리저리 찢어져 펄럭이는 걸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윽고, 아래로 내려갈 준비를 마친 나와 지수는 맨홀 뚜껑 앞에 나란히 섰다. 묘하게 긴장되는 순간에 나는 맨홀에 뚫려 있는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뚜껑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흐읍···!"
턱- 드르르륵- 드그그극-
묵직한 쇳덩이가 살짝 들리는 소리, 이어서 들리는 단단한 금속이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도로를 긁는 소리.
그리고 밤하늘보다 어두운 공간인 하수도로 내려갈 수 있는 사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꿀꺽-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식은땀이 흥건해진 손바닥을 괜스레 옷에 문질러 닦았다.
···딸깍!
"후우! 지수야, 내가 앞장 설게. 신호하면 천천히 내려와."
나는 손전등을 아래로 비추며 지수에게 말했다. 아래로 비추어진 손전등 빛에 의해 바닥까지 이어진 통로가 확 밝아졌다.
그렇게 보이는 것들은 통로 벽에 단단히 고정된 사다리, 얇은 쇠 파이프 다발, PVC재질로 된 배관 파이프들.
"느낌 이상하다 싶으면 괜히 버티지 말고 바로 올라와. 응?"
"알았어."
지수의 걱정을 뒤로하고, 사다리에 발을 걸쳤다. 발에 몇 번 힘을 주어 사다리가 안전한지 확인하고 나서 나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손전등을 입에 문 상태로.
턱- 턱- 턱- 턱-
한 번에 한 칸씩, 서두르다가 괜히 미끄러져서 다치지 않도록 신중하게 한 발씩 내디뎠다.
찌익···
몇 개월 동안 관리가 전혀 되지 않은 탓일까.
사다리뿐만이 아니라 통로 이곳저곳에서 검은 이끼가 지저분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찌직- 찌이익-
사다리 기둥을 새로 잡을 때마다 수분기 가득한 검은 이끼가 짓눌려지며 거무죽죽한 물을 토해낸다. 미끄럼 방지를 위해 목장갑의 붉게 코팅된 부분이 검은 이끼에 닿을 때마다 검게 물들고 있었다.
그나마 장갑을 낀 상태라 이 정도에 그친 것이지, 만약 맨손으로 왔다면 톡톡 터지는 이끼의 느낌과 손목을 타고 똑똑 떨어지는 물기가 주는 찝찝한 감각이 그대로 전해지고 말았을 것이다.
······아니, 사실 겨우 한 겹 가지고는 별 의미가 없었다.
장갑을 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과 없이 전해지는 감촉에 계속해서 쭈뼛쭈뼛 소름이 돋고 있었으니까.
턱- 턱- 턱- 턱-
자꾸만 부르르 떨리려는 몸의 반동을 억누른 채 수직으로 된 통로의 사다리를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내딛는 장화에 사다리 발판이 아닌 안정감 있는 콘크리트 바닥이 닿았다.
"어휴···."
나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
입에 물고 있던 손전등의 위치를 내 손으로 옮긴 후, 나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전방과 후방으로 쭉 뚫려 있는 통로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손전등이 움직일 때마다 침잠해 있던 어둠에 급하게 일어나 물러나면서 미로처럼 이리저리 얽힌 배관 파이프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수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원기둥을 반으로 자른듯한 내부, 좌우로 살짝 솟아 있는 평평한 시멘트 바닥, 길게 뻗은 통로만큼 쭉 뻗어 있는 파이프들, 움푹 파인 곳에 형성된 물길, 지하에도 어김없이 있는 넝쿨 다발들.
그리고.
휘이이이잉-
바람을 타고 묻어오는 희미한 악취.
한때 온갖 오수가 흘러 들어왔던 지하수로는 생각보다 냄새가 심하지 않았다.
오수를 만들어 내는 인간들이 없고, 온갖 것들을 양분으로 삼는 넝쿨들이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하수도에 깊게 배인 악취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툭! 툭!
당장 눈앞에 보이는 나무 인간이나 도롱뇽 변종도 없으니 얼추 안전하다고 판단한 나는, 사다리를 건드려 지수에게 신호를 보냈다.
턱- 턱- 턱- 턱-
이어서 들리는 지수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소리.
이윽고, 긴장한 얼굴을 한 그녀가 완전히 내려왔다. 지수는 내가 멀쩡히 서 있는 걸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엑···. 냄새 나."
지수가 내 옆으로 바싹 붙으면서 투덜거렸다. 그녀는 기다란 천으로 코와 입 부근을 꽉 동여미고 있었다.
···왠지 낯이 익어 보이는 천의 생김새에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끝내 내뱉지는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다행히 물이 별로 안 차 있어서 옷이 젖을 일은 없겠다. 그냥 바닥만 밟고 가면 되겠네."
"나침반 봐봐. 어디로 가야 돼?"
"잠깐만."
나는 주머니에 들어 있던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핑그르르 돌아가는 붉은 바늘. 붉은 바늘은 이내 N자 표시가 된 곳에 멈췄다.
"주민 센터 기준으로··· 물류 단지가 북북서 방향에 있었으니까 일단 앞으로 가면 될 것 같은데?"
"······아저씨 믿어도 되는 거 맞아?"
지수가 의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나 못 믿어?"
나는 짐짓 당당한 어투로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자신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살면서 나침반을 써 보면 얼마나 써봤겠는가. 군대에서도 대강 배웠을 뿐이건만.
그래도 방향은 알아볼 수 있는 게 어디냐며 속으로 변명하고 있을 때.
"아니야, 아저씨 믿지. 응, 너무 믿어서 탈이지. 빨리 가자, 동이 트기 전에 돌아오려면 서둘러야지."
지수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수의 말마따나, 우리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많다고 할 수는 없었다.
터벅- 터벅- 졸졸졸-
우리가 내딛는 발소리 사이사이에 물이 흐르는 소리가 섞인다.
···통! ···통! ···통! ···통!
어디선가 떨어지는 물방울이 속이 텅 빈 파이프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꾸르르르···
바닥에 깔린 넝쿨 줄기가 게걸스럽게 지하 수로의 물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통로에 울린다.
수원역 지하 터널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지만, 위험한 것들이 없어 보이는 게 그나마 다행일까.
"아저씨, 아마 돌아올 때는 여기를 못 쓸지도 몰라."
지수가 내 손에 들린 손전등으로 이리저리 비춰 보며 말했다. 그녀는 내 손을 놓아주지 않고 있었기에 나는 지수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 왜?"
"여기 들어올 때 하늘 봤어?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잖아. 아직 확실하지는 않은데 비가 올 수도 있어서 미리 말해주는 거야."
"흠···."
"그리고 통로 벽이랑 천장 보면 다 축축해 보이는데, 아마 물이 저 끝까지 찼던 것 같지 않아?"
주변을 확 밝히는 손전등 빛에 의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내부 통로의 모습.
지수의 말대로 수위가 매우 높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무죽죽한 흔적이 수로의 천장에 남아 있었다.
콘크리트 벽면만이 아닌 천장에도 자리를 잡은 검은 이끼가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으니 비교적 최근까지 수위가 매우 높았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며칠 전에 내린 폭우 탓이리라.
"그러게. 그럼 올 때는 상황 봐서 움직이든가 하자."
"에휴, 그래. 당장 우리가 제때 도착할 수 있을지도 의문인데."
"어어? 너 아까 나 믿는다고 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말해?"
비관적인 지수의 말에 나는 짐짓 속상하다는 투로 소심하게 항의했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박색 눈동자를 들이대며 따졌다.
첨벙- 첨벙- 첨벙-
"지금 제대로 가는 거 맞아, 정말로?"
발목까지 차오른 물살에 물장구를 치는 지수.
"그렇다니까···? 방향에 맞게 가고 있다고. 억울하다, 진짜."
나도 할 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하수도 자체는 지하철이 다니는 터널과는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통로가 일정하지 않았다.
나와 지수가 안심하고 걷고 있던 콘크리트 길이 갑자기 사라져 있기도 했고, 통로의 형태 자체가 바뀌기도 했다.
그러니 길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물길을 따라서 걸어야 했고, 미로처럼 구조가 바뀐 길을 방향에 맞춰 이리저리 꺾어 움직여야 했다는 말이다.
나는 물류 단지에 무사히 도착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 고집을 들어 준 지수와 한세아에게 미안해서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건만.
이런 억측은 많이 억울했다. 그래도 애써 웃으면서 넘기━
"아저씨가··· 말대꾸?!"
━려고 했지만, 자꾸만 까부는 지수에게 응징을 가하고 말았다. 이 정도면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으니까.
"어쭈, 그런 못된 말을 하는 게 요 입이냐?"
"악! 이거 놔라? 놓으라고 했다?"
나와 지수는 괜스레 투닥거렸다.
천천히 바뀌어 가는 분위기에 묘한 위화감을 느끼면서, 차오르는 긴장감을 떨쳐 내기 위해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는 어둠의 끝에 있을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쉬지 않고 앞으로 계속 걸었다.
첨벙······ 첨벙······ 첨벙······
물소리가 통로를 타고 길게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