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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143화 (144/497)

Chapter 143 - 143. 진실 혹은 거짓2 (1)

일전에 지수가 말하기를, 자기 감각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달리 예민해진 편이라고 했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나보다 더 감각이 향상된 사람들이 있긴 있겠지. 그래도 막 엄청 많지는 않을걸? 근데 갑자기 그건 왜, 아저씨?'

'그냥 궁금해서 한번 물어봤어. 대단하네.'

'그치? 나 대단하지? 내가 최고지?'

'그래, 네가 최고다.'

'그런 의미에서 빨리 귀 마사지 해줘. 대단한 귀니까!'

'···알았어.'

비록 감각이 이전과 별달리 차이가 크지 않더라도 마냥 무시할 것은 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감각도 일정 수준은 넘어서니까.

나와 지수가 기본적으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시각, 청각, 후각.

현재 외부는 매우 어둡겠지. 구름까지 가득 끼어 있을 테니 평소보다 더 어두울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시야가 제한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

푸른 수정으로 불을 피워 주변을 밝히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으나 이내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조각이 발견되었다고 하더라도 충전을 시키지 못하는 이상 결국 푸른 입자가 전부 소모될 것이고, 그때부터는 단순한 푸른 돌멩이에 불과할 뿐이니까.

아니면 푸른 조각이 기물(奇物)인 것을 생존자들이 알아차렸다고 하니 허투루 사용하지 않고 보관만 해 둔 상태일 수도 있고.

나처럼 푸른 입자를 충전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러한 가능성은 낮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다음은 후각.

하수도에 들어오기 전만 해도 후각을 어떻게 교란시킬지 고민이 되었었으나, 이제는 별 상관이 없어졌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나와 지수는 현재 하수도 물에 푹 젖은 옷을 입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각자 몸에서 나는 체향이 가려진 상태.

덜덜덜덜덜덜덜···

냄새가 지워져서 다행이라고 해도 싸늘한 지하 공기에 팔다리가 오한이 들어 떨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여분의 옷이 있는 것도 아니고, 냄새 확산 방지를 위해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청각.

'이건···.'

우리가 생존자들의 청각에 들키지 않기 위해 대비할 수 있는 것은 단순했다. 그저 조심스럽고, 조용하게 움직이는 것뿐.

그 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은가.

바로 그때.

툭- 툭-

어느새 사다리 끝에 다다른 지수가 미리 정해 둔 신호를 보냈다. 사다리를 약하게 두 번 치는 신호. 안전하게 올라왔으니 손전등을 꺼도 된다는 의미였다.

툭- 툭- 툭-

그리고 곧장 이어지는 또 다른 두드림. 이번에는 맨홀 뚜껑을 열 테니 조용히 대기하라는 신호였다.

깜빡- 깜빡- 깜빡-

···딸깍!

나는 긴 숨을 천천히 내뱉으며 손전등을 껐다. 뚜껑 위로 새어 나가는 빛을 막기 위해 우측 수로 하단을 비추고 있던 손전등이 꺼지자 하수도는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손전등 버튼이 평소보다 더 뻑뻑해진 느낌에 손전등이 망가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점점 맛이 가고 있는 손전등이었건만, 돌아가는 길까지 버텨 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좀 험하게 쓰긴 했지.'

손전등이 좀 더 버텨 주기를 바라며 손전등을 탈탈 털어 물기를 한번 뺀 후, 주머니에 넣어 보관했다.

이윽고.

"끄응···!"

지수가 힘 쓰는 소리와 함께.

툭- 그르르르륵-

맨홀 뚜껑이 살짝 들렸다가 옆으로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쇳덩이와 콘크리트 도로가 마찰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듯했다.

그만큼 몸이 많이 긴장하고 있는 탓이겠지.

휘이이이잉-

뚜껑이 열리자 외부의 신선한 공기가 통로를 타고 유입되기 시작했다.

탁한 지하 공기를 밀어내는 바람.

들이쉬는 숨에 묘한 습기가 있는 것이 느껴진다.

"······."

그리고 잠시 이어지는 침묵. 지수가 고개만 빼꼼 내밀어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그녀가 탐색을 마칠 때까지 밑에서 묵묵히 기다렸다.

"아저씨! 올라와! 아무도 없어!"

지수가 작게 속삭였다. 매우 작은 소리였지만 내가 듣기에는 충분했다.

턱- 덜컥- 턱- 덜컥-

나는 사다리 발판에 발을 올린 후, 최대한 조용하게 한 칸씩 올랐다.

끼익··· 끼익··· 끼익···

지수가 올라갈 때는 잠잠했던 사다리는 내 체중이 고스란히 실릴 때마다 죽어 가는 소리를 토해내며 삐걱거린다.

나름 조용하게 올라가려고 했건만, 눈치도 없이 소리를 내는 사다리가 야속했다. 지수가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했지만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머리를 바깥으로 내밀 수 있었다.

그그그극-

"아저씨, 조심해서 나와."

지수가 내가 빠져나오기 쉽게끔 맨홀 뚜껑을 좀 더 밀어 주면서 말했다. 그녀는 귀를 쫑긋거리며 끊임없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하아···."

하수구 통로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나와 지수는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제 진정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곳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잠시 한숨 돌렸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는 다시 움직여야 할 때였다.

"아저씨, 따라와. 저기 가서 이야기하자. 어둡기는 해도 여기는 너무 눈에 띠는 곳이니까."

"알았어. 뚜껑은? 그냥 둘까?"

"···음. 아니, 닫자. 완전히 닫지는 말고. 살짝 열려 있게."

우리는 일단 맨홀 근처에 있는 수풀에 몸을 숨기기로 했다.

그르르륵···

물론, 자리에서 벗어나기 전에 지수가 말한 대로 뚜껑을 잡아당겨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완전히 닫지 않고 살짝 틈만 남게 만들었지만, 주변은 매우 어두웠기 때문에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묵색의 맨홀은 근처의 어둠에 동화되어 아무런 티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맨홀 뚜껑은 쇳덩어리 그 자체라서 상당히 무겁기 때문에 종이처럼 휘날리거나 덜그럭거려 소음을 낼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조치를 대강 취한 나와 지수는 수풀 속에 몸을 밀어 넣었다.

부스럭- 부스럭-

우리의 움직임에 의해 억센 풀들이 이리저리 짓눌려지며 비벼지는 소리를 낸다. 피부에 닿으면 따끔거릴 정도로 매우 억센 풀들은 축축한 옷에 달라 붙으면서 자기들끼리 엉켰다.

부스럭!

이만하면 충분히 몸을 숨겼다고 판단한 우리는 눈이 어둠에 완전히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

이내 눈이 주변의 윤곽을 인지하게 되었고,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거대한 물류 창고들.

눈앞을 가득 채울 만큼, 웬만한 건물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는 물류 창고가 한 채가 아닌 여러 채가 단지에 세워져 있었다.

1층 셔터가 모조리 닫혀 있는 데다가 외벽 근처에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물류 트럭들이 줄지어 정차된 모습은 외부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철옹성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시야를 더 넓게 잡아보았다.

지금 나와 지수가 있는 위치는 물류 단지 구석.

외부와 캠프를 나누는 기준은 초록 페인트가 칠해진 금속 담벼락을 따라 눕혀진 컨테이너들이었다.

1단으로 쌓아진 청색 또는 적색의 컨테이너들은 바깥을 돌아다니는 나무 인간들을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분의 컨테이너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굳이 1단으로 벽을 세운 이유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먼저 위치를 들키지 않는 이상 나무 인간들이 캠프로 이끌릴 이유도 없고, 만약 소음으로 인해 유인이 된다고 해도 단단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컨테이너 성벽을 놈들이 돌파하기에는 요원했으니까.

게다가 두터운 넝쿨 줄기가 컨테이너들이 밀려나지 않도록 감싸고 있기까지 했다.

그 덕분에 나무 인간들이 괴력으로 컨테이너를 우그러뜨리거나 밀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그리고 난리통에 흩뿌려진 넝쿨 체액에 의해 진정하고 알아서 돌아간 나무 인간들의 수도 마냥 적지 않았겠지.

아직 전기가 돌고, 각종 장비들을 사용할 수 있을 때, 캠프의 생존자들이 발 빠르게 움직여 물류 단지를 일종의 요새화 시킨 것 같았다.

물론, 나무 인간들보다 더 위협적인 변종들이 나타난다면 지금의 방벽이 그때도 통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군인들이 통제했겠지?'

예전에 신아현이 말한 내용 중에 군인들이 물류 단지로 가라고 통제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니 가능성은 높았다.

군인들은 물자가 풍부한 물류 단지에 살아남은 사람들을 몰아 넣는 것이 앞으로 살아남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수야, 무슨 소리 들리긴 해?"

"어, 음. ······아니? 근처에 아무도 없나? 여기가 좀 구석이긴 하지만···."

캠프에 감도는 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했다.

다들 자고 있을 시간대인 것을 감안 하더라도 물류 단지는 적막해도 너무 적막했다.

마치 아무도 없거나,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 것처럼.

'사람이 없을 리는 없는데.'

적어도 외부의 위험을 미리 감지할 수 있게 순찰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지수의 말마따나 지금 우리가 있는 위치가 한적할 수밖에 없는 구석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직접 가서 확인하는 방법뿐이다. 여기서 가만히 앉아 생각한다고 해도, 답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지수야, 창고가 몇 개였지?"

"앞에 보이는 저런 창고 건물만 25채였나 그랬을 걸."

대략 면적이 8,000㎡에 달하는 창고가 25채.

듣기만 해도 아찔한 숫자와 크기였지만, 나와 지수는 창고를 전부 뒤지고 다닐 필요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각층을 빠르게 훑어볼 시간도 빠듯하거니와 외곽 지역의 창고에는 사람이 없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고들을 전부 둘러볼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게 해주는 가장 큰 이유는 지수가 신아현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 나는 지수가 이끄는 길을 따라만 가면 되는 것이었다.

킁킁-

지수가 머리를 하늘로 향한 채로 주변의 냄새를 신중하게 맡았다. 한동안 냄새를 맡기 위해 숨을 들이키던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예상대로 다들 중앙쪽에 있는 것 같아. 중심지로 갈수록 여러 냄새가 섞여서 나고 있거든."

"그래? 신아현씨는? 그 사람 냄새도 맡아져?"

나는 기대감을 가지고 물었다. 지수가 신아현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면 뜻밖에 빨리 끝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니, 그 여자 냄새는 안 나지만 대신 항상 들고 다니는 넝쿨 냄새가 나. 좀 진하게."

그녀의 말에 신아현이 상자 안에 조종할 수 있는 넝쿨을 담아서 들고 다녔던 것이 떠오른다.

"그 넝쿨이랑 저기 벽에 붙어 있는 넝쿨이랑 냄새가 달라?"

"약간? 비슷하긴 한데, 미묘하게 달라. 좀 더 깨끗한 느낌?"

"좋아, 일단 가자."

"내가 앞장 설 테니 잘 따라와, 아저씨."

나와 지수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휘이이이이-

달빛을 전부 가리는 구름이 가득 낀 하늘을 방패 삼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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