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6 - 146. 진실 혹은 거짓2 (4)
상가 2층 당구장 안.
"어휴···, 무거워 죽겠네. 지수야, 일단 저기에 놓자. 저 의자에 묶어두면 되겠네."
"알았어, 아저씨."
나와 지수는 질질 끌고 온 남자 둘을 벽면에 고정된 의자에 내려놓았다.
좌우로 길게 늘어진 의자의 양 끝에는 곡선으로 휘어진 팔걸이가 존재했고, 거기를 기준으로 꽁꽁 묶어두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완전히 정신을 잃어 버린 마른 체구의 남성과 덩치가 큰 남성.
그들의 얼굴에는 우리가 만들어내지 않은 잡다한 타박상이 새겨져 있었다. 정성스럽게 들쳐 메서 옮길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에 이곳 당구장까지 오는 동안 이리저리 부딪혀 생긴 상처였다.
그도 그럴게, 이놈들이 뭐가 예쁘다고 나와 지수가 그런 수고를 해야 하는가. 이것들은 그 자리에서 맞아 죽어도 싼 놈들이었건만.
심지어 눈을 확인해 보니 눈동자가 검게 물드는 현상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남자들이기까지 했다.
검은 입자에 의해 눈이 검게 변할수록 그 사람은 점점 더 충동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하게 되니 사정을 봐줄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당장 치료할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틱! 지이이익!
팽- 팽-
지수가 벨트 가방에서 낚싯줄 다발을 꺼냈다. 그녀는 줄이 튼튼한지 수차례 당겨본 후, 남자 둘의 팔에 휘감았다.
티디디딕-
지수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기절한 남자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고정되어가고 있었다. 사정 봐줄 것 없이 꽉 조여지는 낚싯줄은 자기들끼리 엉키며 절대 풀리지 않는 매듭을 만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 아니다, 이것까지만 해야겠다."
싸늘한 눈으로 묶인 남자들을 바라보던 지수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들의 목에 또 다른 매듭이 있는 낚싯줄을 걸었다. 올가미 형태였다.
이윽고.
"저기요! 이리 와보세요."
작업을 얼추 끝마친 지수가 뒤에서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던 여자를 불렀다.
"네, 네!"
여자는 흠칫 놀라는 것도 잠시, 나와 지수가 있는 위치로 쪼르르 달려왔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걸 보니 우리가 어지간히 무서운 모양이다.
'···무리도 아니지.'
한밤중에 갑자기 이런 일을 겪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 저는 왜···."
고양이 귀를 가진 여자는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자의 눈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나, 지수, 남자, 다시 나 순으로 번갈아 보고 있었다.
"장갑 있어요? 없으면 이거 끼고 줄 잡고 있어요. 줄이 두 개가 있을 텐데, 왼쪽을 잡아당기면 원이 조여지고 오른쪽을 당기면 원이 풀어지니까 잊지 말고요."
지수는 여자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들고 있던 낚싯줄을 여자에게 건넸다. 여분의 목장갑과 함께.
"네, 네?"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짓는 여자.
"그쪽이 하도 불안해하니까 준 거예요. 아까 보니까 이놈들이랑 사이가 좋진 않은 것 같던데요. 그렇게 짐승이 되고 싶다 하니 짐승 취급 해 줘야죠. 목줄은 당신이 잡는 거고."
"아···."
"아까도 말했지만 저희는 당신을 해치지 않습니다. 이 남자들이랑 한 패가 아니라면요. 대신 궁금한 게 좀 있는데 잠깐 앉아서 이야기 좀 합시다."
우리의 말에 여자는 잠시 손에 들린 줄을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으나, 그 떨림은 처음과는 달랐다. 처음이 두려움에서 온 떨림이었다면 이제는 놓치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느라 생긴 떨림이었다.
나, 지수, 여자는 당구대에 걸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
고양이 귀를 가진 여자의 이름은 이예솔.
군인들의 통제 하에 움직였던 의왕시 생존자들 중 한 명이라고 했다. 군인들이 외부의 위협을 막는 동안 각종 장비들로 벽을 세우는 데 성공해서 지금의 캠프가 존재할 수 있었다고.
뒤이어서.
캠프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다시 원래의 임무로 되돌아간 군인들은 의왕시를 뒤로하고 위로 올라갔다는 이야기, 서로 힘을 합쳐 하루하루를 버텨 내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나타난 박현일이라는 남자에 의해 캠프가 단번에 복속된 이야기, 반항을 해 보았자 돌아오는 것은 피가 멎지 않는 벌뿐이라서 결국 하나, 둘씩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이야기. 등등.
이예솔은 떠듬거리긴 했지만, 나와 지수가 묻지 않은 이야기들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왜인지 모르게 필사적인 행태. 가만히 두었다가는 쉽사리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손을 들어 이예솔의 입을 막았다.
"잠깐만요. 저희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러는데 묻는 질문에만 답해 주십쇼."
이예솔이 해주는 이야기들이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동이 트기 전에 일을 마치고 빠져나가야 하는 시간 제한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마냥 앉아서 듣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가뜩이나 어쩔 수 없이 목적지 코앞에서 후퇴한 꼴이라 초조함이 가득 느껴지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죄, 죄송해요."
"얼마 전에 잡혀 온 여자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이름은 신아현입니다."
나는 우선 신아현의 행방을 물었다. 넝쿨 냄새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긴 했으나 정확한 위치를 알면 더 움직이기 편하니까. 시간 절약도 되고.
"···아현씨요? 아, 그, 넝쿨 움직이는 분이요? 여, 여기서 가까워요. 제가 나온 창고가 L동이고 옆에 있는 창고가 K동인데, 그 사이에 작은 창고가 또 있거든요? 거기에 잡혀 있어요. 아니, 잡혀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들어간 게 맞지만···."
"······? 뭔 소립니까, 그게. 스스로 들어갔다고요?"
"두 명이 같이 잡혀 왔는데, 끝까지 저항하다가 창고로 들어가서 버티더라고요. 그러다가 한 명이 도망치다가 크게 다쳤지만요."
도망치다가 다쳤다는 사람은 역시 신아진이겠지.
시간상으로 보면 도서관 자매가 붙잡힌 건 어제, 신아진만 도망친 것도 어제.
그럼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던 고생한 흔적들은 3일 동안 도망치면서 생긴 것일까.
"······이야기 들어 보니까 박현일이 고작 넝쿨을 못 이길 정도로 약하진 않을 텐데요."
"워, 원래라면 그랬겠죠. 넝쿨이 위협적이고 질기긴 했어도 창고를 감싼 줄기를 끊는 건 결국 시간 문제였으니까요. 창고를 강제로 열려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넝쿨들을 거의 다 제거했을 때, 멀리서 가스관이 터지지 않았으면 그랬을 거예요."
"······."
"항상 고압적이던 박현일이 그렇게까지 굳은 건 처음 봤어요. 그 남자가 갑자기 어딘가로 사라지고 나서 창고 넝쿨을 제거하는 건 흐지부지 됐고요···. 그도 그럴게, 누가 앞장서겠어요? 다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데."
나는 이예솔의 말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녀의 말은 일견 타당하긴 하나, 단순히 다치고 싶지 않아서 창고를 그대로 두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박현일을 따르는 생존자들과 살기 위해 억지로 행동을 동참하는 생존자들로 부류가 나뉘어지는 것 같건만, 고작 박현일이 사라졌다고 모두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다.
오히려 박현일이 자리를 비운 것을 기회삼아 어떻게든 창고를 연 다음에, 신아현을 끄집어내서 점수를 따내는 것이 더 합리적인 행동이지 않은가.
그러한 내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풀렸다.
"박현일이 다 들어가서 조용히 하고 있으라고만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창고를 열긴 했겠지만요. 사람들이 다치든 말든 이 나쁜 놈들한테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니까요······."
"······흠."
"사실 창고도 아니고 징벌방이라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거기가 열려 있으면 매일 누군가는 다치거나 죽었으니까."
캠프가 조용한 이유를 알았다.
내 푸른 불에 지레 겁먹은 박현일이 이곳 캠프의 위치를 들키지 않도록, 쥐 죽은 듯이 숨어 있기 위해 물류 터미널은 평소보다 한층 더 조용하고 어둡게 만든 것이다.
하물며 하늘에도 구름이 잔뜩 꼈으니 캠프의 정보를 미리 알지 못했더라면 그가 바라는 대로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이곳을 그냥 지나쳤겠지.
'그랬으면 내가 이적을 발휘할 일도 없었겠지만.'
뭐가 어찌되었든.
눈과 귀만 가리면 자신이 숨은 것이라 생각하는 꿩처럼, 내가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의 위기를 일부러 외면하려고 했던 것처럼.
박현일도 그런 행동을 보인 것 같았다. 특히나 그는 나무 인간들처럼 강인한 몸을 가지고 있었으니 갑작스러운 천적의 등장에 더 놀랐을 것이다.
비록 지금 서로 마주치면 천적은 내가 아니라 박현일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창고가 아닌 징벌방.
박현일이나 그를 따르는 생존자들이 힘없는 생존자들을 괴롭히는 곳으로 사용하는 장소인가 보다. 신아현은 그런 곳에 들어가서 힘겹게 버티는 중이고.
"그렇군요. 그럼 이것만 묻고 나가겠습니다. 혹시 이런 조각 보신 적 있으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곧장 목에 걸려 있던 푸른 조각을 꺼내 이예솔에게 보여 주었다.
"어?! 그거!"
이예솔은 푸른빛무리가 아른 거리는 사각형의 조각을 보자 눈을 크게 떴다.
"여기서 이런 조각이 나왔다고 들었는데, 그거 다 어디 있습니까."
조각을 알고 있는 듯한 명백한 반응에 나는 조바심을 느끼며 물었다.
위치라도 알아내면 거기서부터 내가 뭐라도 해볼 수 있으니까. 정확한 위치도 모른 채로 캠프를 전부 헤집고 다닐 시각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거 다 부서졌는데요. 불 피우게 할 수 있는 거 맞죠? 그런 게 맞으면 더 이상 없어요."
"······예?"
이어지는 이예솔의 답에 나와 지수는 벙찐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부서졌다고?'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눈앞이 아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푸른 조각은 작아 보여도 그것이 가진 강도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각이 부서졌다니?
지금까지 잘 풀리고 있는 상황에 암초가 등장한 기분이었다.
"···어, 쩌다가. 대체 어쩌다가?"
"박현일이 다 부셨어요. 보기 거슬린다고···. 그래서 지금은 하, 하나도 없는데······."
이예솔은 어두워진 분위기에 눈치를 보며 떠듬떠듬 말했다. 그녀의 귀는 살짝 올라가려고 했다가 도로 내려간 상태였다.
박현일.
또 그놈이다.
정말이지,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 자식.
어찌 보면 내가 여기 캠프까지 오게 만든 장본인.
전부 박현일과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었다. 그것도 좋은 일이 아닌, 전부 좋지 않은 일에.
나는 두통이 이는 것을 느끼며 침음을 흘렸다.
가장 우선순위였던 조각의 확보가 물 건너간 상태.
'그래서 내가 조각을 느끼지 못한 건가?'
조각의 존재가 사라졌다면 말이 된다.
하지만 시간상으로 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누나는 불과 어제 내게 말해 준 것이지 않은가.
조각을 찾으라는 것과 가까이 가면 알 수 있다는 정보를 말해준 것이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박현일이 조각을 부순 것은 그보다 더 오래된 일인 것이 분명하고.
'목소리가 실시간이 아니라 미리 입력된 말을 해준 것도 아닐 텐데···.'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상황이 쉽게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꼬여 있다는 것. 그것만큼은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아저씨, 이제 어떡해?"
지수가 어두운 기색으로 물었다. 그녀는 조각을 얻을 길이 사라졌다는 말에 많이 허탈해 보였다.
"하아···. 나도 모르겠다. 아니다,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지. 일단 신아현씨 구하러 가자."
기껏 하수도를 통해 물류 터미널까지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조각은 젖혀두고 신아현은 확실하게 구해야만 했다.
나와 지수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마쳤다.
"아, 이예솔씨. 혹시 징벌방을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나는 불안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이예솔에게 물었다.
이예솔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으로 기절한 남자들을 가리켰다. 그녀가 말없이 가리킨 남자들이 징벌방에서 신아현이 나올 수 없도록 감시하던 자들이라는 의미였다.
그들이 서텨를 열고 L동 창고에서 나온 것은 이예솔을 끌고 나와 허튼짓을 하기 위함이었던 모양.
그렇다면 지금은 징벌방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뜻이리라.
기절한 남자들이 나와 지수를 만난 것은 악재였겠지만, 우리에게는 호재였다. 운 좋게 먼저 제압할 수 있었으니.
"그럼 순찰하는 사람들은요?"
"징벌방 말고 정문 쪽에 모여 있어요. 뒤쪽은 어차피 다 산이고, 위쪽 도시는 여기보다 더 위험해서 도망치려는 사람들이 없거든요. 아니, 없어졌다는 게 맞네요. 거기로 간 사람들은 다 죽었을 테니까. 이상한 까마귀도 막 날아다니고."
"알려 줘서 고맙습니다."
나는 대충 감사를 전한 후 지수와 함께 건물을 나서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니, 돌렸을 것이다.
"저, 저기!"
이예솔이 다급하게 우리를 멈춰 세우지 않았다면 말이다.
"······?"
"다, 당신들이 누군지는 물어보지 않을게요···. 저희 캠프를 구해 달라고 하지도 않을게요···. 대, 대신 아현씨 구하고 나서 저,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 될까요···? 제발···, 어디든 좋아요. 여기서 꺼내만 주세요. 그, 그냥 가시면 저는···."
이예솔은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이, 이 사람들 하는데 오래 안 걸려서 시간이 끄, 끌리면 의심 당할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다. 나와 지수가 이대로 신아현만 구해서 캠프를 빠져나가 버리면 이예솔은 화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입어야 할 화를 대신 입겠지.
그녀는 피해자이긴 해도, 박현일의 추종자들의 처지에서 보면 캠프를 어지럽게 만든 사람들을 그냥 보낸 방관자니까. 나와 지수에게 원치 않게 휘말려 버린 이예솔은 일종의 배신자로 낙인 찍히고 말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말이다. 그런 것들은 화풀이 할 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니.
"알겠습니다. 신호 보낼 테니 걱정하지 말고 여기에 계십쇼. 저희가 일을 마칠 때까지 허튼짓 하지 않으리라 믿겠습니다."
눈동자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이예솔이었지만, 혹시 모르니 나는 그녀에게 경고를 날렸다.
"네, 네!"
내 말에 이예솔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예솔은 손에 든 낚싯줄을 놓칠 새라 손에 둘둘 감았다.
그녀가 들고 있는 올가미 하나만으로도 남자 둘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온몸이 꽁꽁 묶여 있기 까지 하니 더욱 그렇겠지.
이윽고.
"가자, 지수야."
"응, 아저씨."
나와 지수는 재빠르게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와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K동과 L동 사이에 있는 징벌방을 향해서.
신아현이 있는 바로 그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