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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147화 (148/497)

Chapter 147 - 147. 진실 혹은 거짓2 (5)

서둘러 건물 바깥으로 나온 나와 지수를 맞이해준 것은.

툭- 투둑- 부스스-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빗방울이었다. 해가 저물고 나서부터 하늘 가득 구름들이 끼더니 기어코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잇···.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아저씨, 조각 구하는 건 글렀으니까 빨리 그 여자나 구하고 돌아가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이미 부서졌다는데. 그리고 이예솔이라는 여자 진짜 데려갈 거야?"

지수는 귀를 적시는 빗방울을 털어내며 투덜거렸다.

"···데려가야지. 두고 가면 우리 때문에 피해를 볼 텐데. 신아현씨한테 맡기고 가면 괜찮을 거야."

나는 그녀를 따라 걸음을 빨리하며 답했다.

우리가 이예솔을 데려간다고 해도 박현일이 캠프에 남아 있는 이상, 의왕시 캠프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결국 박현일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이예솔 하나뿐, 그녀가 사라지면 화풀이를 대신 받을 대상이 나오고 말겠지.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인 선택이지만 별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게, 빗줄기가 점점 거세질 기미가 보이는 데다가 지금 내가 박현일과 마주치게 된다면 반항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당하게 될 상황이지 않은가.

아직 오염되지 않은 생존자들을 구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 또한 구하고 싶었으나 내가 가진 힘은 너무나도 미약했다.

적어도.

적어도 지금 상태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근데 그냥 두고 왔어도 되는 걸까. ···처리하고 오는 게 낫지 않았을까? 피를 보지 않을 방법이 있긴 하잖아."

나는 당구장에 두고 온 남자 둘과 이예솔을 떠올렸다. 급한 마음에 단순히 묶어두기만 하고 온 것이 못내 신경 쓰였다.

"괜찮아. 그 사람들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여자에게 건네준 올가미는 어차피 안 풀리거든."

"······? 한쪽 잡아당기면 풀린다고 했잖아?"

"그거 당연히 거짓말이지. 어느 쪽을 잡아당겨도 조이게 만들어 놨어. 풀리는 줄이 있기는 한데 엉망으로 꼬아놔서 풀 수도 없을걸. 그러니까 이예솔이라는 여자가 그놈들을 풀어 주려고 해도 불가능하다는 말이지."

지수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여자 손에 묶어둔 것도 안 풀릴걸. 낚싯줄도 튼튼해서 끊기 힘들 거고. 남자들이 움직이거나 여자가 움직이기만 해도 알아서 숨통이 조여질 거야. 그러다가 켁! 하는 거지."

결국 남자들은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는 걸 말하는 지수가 살짝 무서워지려고 했다. 여차하면 내가 남자들을 처리할 생각이긴 했으나, 그거랑 지수가 말한 거랑은 조금 다르지 않은가.

결과는 같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달랐다.

"···그렇구나. 잘했어, 지수야."

할 말을 잃어 버린 나는 그냥 지수를 칭찬하는 말을 건넸다. 그녀에게 함부로 까불지 않기로 새삼 다짐하면서.

L동 창고를 거의 다 지나쳤을 때.

"아저씨, 잠깐만. 혹시 모르니까 여기서 좀 둘러 보고 가자."

"알았어."

나와 지수는 수풀 속에 조심스레 몸을 숨겼다. 빗물에 젖은 수풀이 질척하게 옷에 휘감기는 것이 느껴졌다.

이예솔의 말대로라면 우리의 목적지인 징벌방을 감시하는 자들은 없어야 했다. 운 좋게도 제압한 남성들이 오늘 징벌방을 감시하는 불침번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예솔의 말이 사실일 경우이다. 아직 검은 입자에 오염되지 않았고, 여기서 탈출하고 싶어 하는 그녀이니 거짓을 말했을 가능성은 적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기세를 더해가는 빗줄기. 몸에 부딪힌 빗방울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쫑긋- 쫑긋!

가늘게 뜬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귀를 쫑긋거리는 지수.

'후우···.'

나는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애써 억누르며 지수가 상황 파악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내 귓가에는 빗소리 말고 다른 건 들리지 않았으나 그녀는 나와 다르니까.

마냥 가만히 기다리고 있기 뭐한 나는 이예솔이 한 이야기들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우선.'

사방이 컨테이너로 막힌 캠프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뚫려 있는 곳은 정문.

지금은 부서져서 사라진 푸른 수정들이 나온 곳 또한 정문 근처.

그러므로 검은 입자에 오염된 생존자들이 주로 감시하는 구역이 정문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마도 본능적인 위협을 느낀 박현일과 그의 추종자들이 푸른 입자를 경계한 탓에 그리한 것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거슬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각종 장비를 작동하게 만들어 주는 푸른 수정을 부술 이유가 없었으니까. 비록 푸른 입자를 충전하지 못하면 사용량에 제한이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정문의 감시자들을 제외하면, 남은 것은 L동에 전부 모여 있는 생존자들. 물류 터미널의 창고는 하나하나가 전부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한 건물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크기도 크기지만, 갈수록 박현일의 악행에 의해 줄어만 가는 생존자들의 수도 한몫 했겠지.

어찌 되었든 용이한 감시를 위해 층별로 자리 잡은 추종자들 말고는 이곳, 물류 단지의 다른 창고들은 전부 비어 있다고 보면 되었다.

바로 그때.

"아저씨, 가자. 거짓말은 안 했나 보네, 그 여자. 바로 앞 L동 말고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아니지, 징벌방이라고 했나? 거기서도 소리가 들리긴 하네."

확인을 마친 지수가 신호를 보냈다. 나는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기에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스럭! 부스럭!

우리는 수풀 더미에서 빠져나와 신아현이 있는 간이 창고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윽고, 나와 지수는 두터운 넝쿨로 뒤덮여 있는 징벌방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애초에 거리가 60m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주변에 감시자가 없다는 것이 확실시되었으니 곧장 직진을 할 수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내딛는 발걸음 소리와 우리들의 체향은 내리는 비에 의해 지워지기 까지 했으니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꿈틀! 꾸드드득-

외부에서 접근하는 움직임을 감지한 넝쿨들이 적대적인 모습을 표출하기 시작했다는 것. 몸을 일으킨 넝쿨들은 금방이라도 줄기를 세차게 휘두를 듯했다.

"······!"

"지수야! 뒤로!"

나와 지수는 급하게 온 것만큼이나 급하게 뒤로 물러나야 했다.

넝쿨 줄기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껏 큰 소음없이 여기까지 왔건만, 이제 와서 넝쿨과의 충돌로 소음이 난다면 그동안의 노력이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리는 꼴이 아닌가.

다행히도 일정 거리를 벌리자 넝쿨은 다시 잠잠해졌다.

"진짜 가지가지하네···. 그냥 접근하는 거 전부 적대하는 것 같은데."

지수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다른 소리 들려? 방금 우리가 접근해서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변화가 생겼다거나."

나는 혼자 이질적으로 넝쿨에 뒤덮여 있는 간이 창고를 신중하게 바라보았다. 만약 외부의 접근을 신아현이 알아차렸다면 무슨 변화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도서관에서 신아현이 넝쿨을 조종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는 잠깐의 움직임만으로도 매우 지친 모습을 보였으니 가능성은 있었다. 그것이 좋은 변화이든 좋지 않은 변화이든 간에 말이다.

"아니, 달라진 건 없는데···."

"숨소리도? 움직이지도 않고?"

"···응. 자는 것 같은데."

"······잔다고?"

다시 몇 번 귀를 쫑긋거려 본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내쉬는 숨소리에는 조금씩 떨림이 섞이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체온이 떨어지고 있는 탓이었다.

신아현이 자고 있다면, 그럼 저 넝쿨은 누가 조종하는 것인가.

'누가 접근하면 다가오지 못하게 프로그래밍 된 건가?'

알 수 없었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내가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사치라는 것.

부스스스···

이미 목적지 코앞에서 망설이기만을 수 차례, 더 이상 시간을 끌 여유는 없었다. 체온도, 체력도, 그 외 모든 상황들이 나와 지수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그나마 아직 체력적인 여유가 남아 있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지수야, 어쩔 수 없다. 달려서 잘 피해보자. 자고 있으면 깨워야지."

"···아저씨, 제정신이야?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은데 넝쿨을 어떻게 피해?"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앞장 설 테니까 내 뒤에 바로 붙어서 따라와. 막을 수 있는 건 막아볼게."

나는 그 말을 끝으로 곧장 앞으로 내달렸다.

"어어? 아, 아저씨! 아, 진짜···!"

내가 갑자기 앞으로 뛰쳐나가자 잠시 당황하던 지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내 뒤에 붙었다.

타탓! 타타탓!

끄득- 끄드드득-

우리가 빠르게 창고로 접근하는 것을 느낀 넝쿨들이 다시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물을 머금어 탱탱해진 줄기가 서로 비벼지며 마치 물이 묻은 고무가 마찰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부웅-!

빠르게 휘둘러지는 넝쿨 줄기. 그것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는 모양새였다.

"으헉!"

귀를 간지럽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옆으로 굴렀다.

찰팍! 촤촤촤촤···

몸이 바닥을 구를 때마다 아스팔트 도로에 고인 빗물이 내 옷을 적셨지만, 이미 다 젖어 있었기 때문에 크게 상관은 없었다.

지수의 말마따나, 주변이 너무 어두워서 근처에 무엇이 있는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가만히 고정된 물체는 희미한 윤곽선이라도 보였으나, 움직이는 물체는 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

···부우웅!

바닥을 더 구를 틈도 없었다. 목표를 놓친 넝쿨이 재차 줄기를 휘둘러왔으니까. 이번에도 아래에서 위로 올려 치려는 듯 넝쿨은 바닥에서부터 나를 노려왔다.

찰나의 시간에 나는 넝쿨과 징벌방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전력 질주를 한 덕분에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는 불과 10m.

지금 옆으로 바닥을 다시 구르면, 거리는 더 벌어질 뿐이다. 안전을 위해서는 구른다는 선택지가 옳겠지만, 시간이 끌릴수록 휘둘러지는 넝쿨 줄기 다발은 더 늘어나고 말겠지.

결국 당장의 안전을 고르는 선택지는 뒤따라 오는 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함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판단을 마친 나는 망치의 양 끝을 잡아 세로로 세웠다. 넝쿨의 공격을 어떻게든 한번 막아볼 심산이었다.

'한번···. 한 번이면 된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곧 닥칠 충격에 대비했다.

뻐억-!

"큭···!"

물까지 머금은 넝쿨이 주는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게다가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을 정도로 강한 충격은 내 몸을 위로 들어 올리기에 충분했다.

"······!"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부유감이 내 몸을 지배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뒤로 날아간다면 기껏 좁힌 거리가 다시 늘어나고 만다.

"아저씨!"

지수가 온몸으로 나를 눌러 주지 못했다면 그랬을 것이다. 내가 시킨 대로 바싹 뒤에 붙어서 따라온 그녀였기에 제때에 맞춰 공중에 뜬 내 몸을 눌러줄 수 있었다.

찰팍!

"지수야! 가서 문고리 잡아!"

나는 무사히 발에 닿은 바닥에 안도할 새도 없이 곧장 외쳤다. 넝쿨이 되돌아와서 우리를 노리기 전에 먼저 움직여서 징벌방에 도달해야 하니까.

이윽고.

타탓! 타타탓-!

찰박! 찰박! 찰박!

죽어라고 내달린 우리 앞에 징벌방 즉, 간이 창고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컥! 철컥!

문고리를 열심히 돌려보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굳게 잠겨 있는 문.

"신아현씨! 문 열어요! 구하러 왔습니다!"

나는 문틈 사이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등을 노리는 넝쿨로부터 지수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품에 넣었다.

"신아현씨!"

재차 소리쳤지만 간이 창고 안에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와 동시에.

휘리릭!

넝쿨 줄기가 내 복부를 휘감았다. 우리를 창고로부터 떨어트리려는 의도를 가진 넝쿨은 나뿐만이 아닌 지수도 같이 휘감아서 들어 올렸다.

"끄으윽!"

꽉 조여지기 시작한 넝쿨의 힘을 버티며 나는 문고리에서 손을 놓치지 않았다.

쏴아아아아아━

철컥! 철컥! 철컥!

"문 열어! 아오! 신아현! 살고 싶으면 문 열라고!"

완전히 거세진 빗줄기가 소리를 숨겨 주겠거니 하는 마음에 나는 크게 소리쳤다. 여기서 물러나면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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