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7 - 157. 투쟁 (5)
[아빠, 어딨어···. 아빠. 아빠······]
[종이학 천 개···. 소원···]
[아빠··· 보고 싶다······]
털썩-
변종 특유의 괴력으로 금속 선반을 찢고, 나를 붙잡기 위해 위로 솟구쳤던 새하얀 팔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뚝- 뚝-
뜨거운 무언가가 볼을 간지럽히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슥 문지르니 짙게 묻어나오는 것은 새빨간 피. 금속 선반 사이사이를 급하게 지나가다가 날카로운 부분에 베인 모양이다.
"허억, 허억-, 허억···."
나는 망치 자루를 지지대 삼아 몸을 지탱했다. 전신을 웃도는 탈력감에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질 것 같았으니까. 비록 망치 머리는 사라져서 자루만 남았지만 지팡이 대용으로는 아직 쓸 만했다.
고개를 푹 떨구고 아래를 향한 시선에 우레탄 자루를 꽉 쥐고 있는 양손이 보인다. 울긋불긋하게 올라왔던 푸른 핏줄은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눈이 닿는 곳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피멍이 있는 탓에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더 아래에 있는 것은 움직임을 멈춘 누더기 변종. 놈의 등에는 유해가 끝까지 박혀 들어가 머리 부분만을 겨우 내놓고 있었다. 깊이 파고든 유해는 변종의 몸속에 있는 무언가를 조각내며 누더기 변종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었었고.
유해가 부순 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으나, 나중에 알아볼 시간이 있을 것이다.
'변종의 사체도 처리해야 해.'
활동을 완전히 정지한 누더기 변종은 확실하게 죽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나중에 어떤 일로 되돌아올 지 모르니까.
거미 변종의 사체를 처리했던 것처럼 누더기 변종의 사체 또한 푸른 불꽃으로 태우면 되겠지. 물론, 체력을 회복한 나중의 일이지만.
바로 그때.
저벅- 저벅-
난장판이 된 창고 안으로 들어오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상황이 일단락된 것을 눈치챈 신아현이 들어오는 줄 알고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아현씨, 덕분에 살았-"
짜아악!
아니, 입을 열려고 했다. 중간에 고개를 획 돌아가게 만드는 매콤한 손길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우당탕!
"컥?!"
나는 볼 폼없이 바닥으로 나뒹굴게 되었다. 가뜩이나 겨우 서 있는 상황이었으니 뺨 한 대 맞은 것도 버티지 못하고 넘어진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아저씨 멋대로 판단하지 마."
넘어진 나를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내 멱살을 틀어쥔 손이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떨리는 목소리만큼이나 떨리는 손을 하는 사람은 바로 지수.
"나는, 흑. 짐이야? 나는 도움이, 흐윽-. 안 돼? 나는! 숨어서 보기만 해야 해······?"
그녀는 얼굴 전체가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지금도 쉴 새 없이 눈물을 내보내는 호박색 눈동자에 나는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람 속도 모르고···. 아저씨 혼자만 마음이 편하면 다야? 그럼 내 마음은? 혼자 안전한 곳에서 숨어서 아저씨가 다치는 걸 구경만 해야 하는 나는! 아무것도 못 해줘서 갈기갈기 찢기는 내 마음은!"
"······."
"아무것도 아니야? 흑! 왜···, 그랬어! 이 나쁜 놈아! 방금도 내가 망치 안 던져 줬으면 죽을 뻔한 주제에! 뭐라고 말 좀 해 보란 말이야!"
"······미안."
나는 먹먹해진 기분에 겨우 사과를 전했다.
백 번 천 번 생각해도 지수를 강제로 싸움에서 배제시킨 것은 내 이기심이 맞다. 비록 그것이 지수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선의에서 출발한 마음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지수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고 나 홀로 마음이 편해지자고 한 것도 맞다. 나는 다쳐도 괜찮지만, 그녀가 다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에 불과할 뿐.
실제로 지수가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녀가 마지막에 망치를 던져 주는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지금 죽은 것은 누더기 변종이 아니라 내가 되었을 상황이었건만.
문득 신아현이 멀쩡한 넝쿨을 들고 온 것이 기억났다. 처음에 지수를 묶기 위해 따로 빼 둔 넝쿨이었다. 넝쿨이 모조리 끊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새 넝쿨을 구해왔는지 의문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으허어어엉······."
어느새 내 품에 고개를 파묻고 통곡을 하는 지수. 그녀의 귀와 꼬리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그런 지수의 어깨를 어설프게 토닥여 주었다.
"아저씨, 때려서 미아내···, 흑.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저씨가 다친 게 너무 속상, 흑. 해서어···. 아저씨도 다 생각이 있었을 텐데···. 흐윽!"
"······아니야. 맞아도 쌌지."
"아니야아···! 내가 잘못한 거니까 혼을 내야지! 흐어엉···."
대체 어떡하란 건지.
토닥이는 손을 멈추면 품을 더 파고들며 행동으로 눈치 주고 있으면서, 말로는 엉엉 울며 질책하라는 지수였다.
지수에게 하고 싶은 말도, 해야만 하는 말이 아직 속에 많이 담겨 있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지수야. 일어나."
나는 지수의 양어깨를 붙잡으면서 말했다. 눈물에 짓누른 눈가가 의문을 담아 나를 보았다.
"으, 응? 훌쩍-. 크응!"
"아직 안 끝났잖아. 박현일 그놈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 그러니까 끄응···."
지수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한번 꽉 안아준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를 아찔하게 하는 현기증이 가시지 않고 있었지만 박현일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쉴 수 없었다.
이미 처음의 내 의도였던 신아현 구출 후 바로 후퇴는 이미 어그러져도 한창 어그러졌다. 소란이란 소란을 다 피워 놓고서는 그 남자에게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
이렇게 된 이상, 캠프를 완전히 뒤집어 버린 이상 내가 아니, 우리가 박현일과 마찰을 빚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박현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더 조심해야 했다.
아직 이 캠프는 안전하지 않았다.
"크응! ···아, 아저씨. 그럼 나···."
말을 잇기를 망설이며 눈치를 보는 지수. 나는 그녀가 무슨 말하고 싶어 하는지, 듣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다.
"도와줘, 지수야. 네가 필요해."
나는 이제 체력도, 푸른 입자도 바닥이 났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 혼자 편하자고 지수의 도움을 거절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박현일도 만만치 않게 위험할 것이 분명하니까.
"···응!"
그제야 눈물을 멈춘 지수가 환하게 웃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
"오해는 잘 풀었어요?"
창고 입구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신아현이 나와 지수를 보자마자 대뜸 내뱉은 첫 말이었다. 그녀는 내 손을 꼭 붙잡은 지수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신아현이 지수를 뒤따라 들어오지 않은 이유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박현일을 경계하기 위함일 것이다.
어찌 보면 신아현은 나보다 그 남자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나중에 더 이야기하기로 했습니다. 그것보다 박현일은 아직 안 나타났습니까? 흔적도 안 보이고요?"
"네. 소란이 일어났을 때 당장 튀어나와서 공격할 줄 알았는데, 대체 어디에 숨은 건지 감도 안 잡히네요. 계속 경계하고는 있지만 숨을 곳이 너무 넘쳐나서. 후우···."
신아현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신아현이 누더기 변종으로부터 겨우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시하고 빠져나간다고 해도 캠프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에요. 다 데려가는 것도 문제고, 무사히 데리고 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구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생각해 봅시다. 여긴 너무 뚫려 있으니까요. 주변에 차들이 많다고 해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나는 신아현과 마찬가지로 주변을 경계했고, 생존자들을 데리고 창고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당장 박현일을 찾을 수 없다면 사방이 막힌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나을 것이다. 어차피 놈은 여기서 이대로 도망치거나 우리를 계속해서 노리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바로 그때.
쐐애······ 터억-!
"아저씨! 피해!"
두 귀를 쫑긋거리며 순간 바싹 세운 지수가 나를 강하게 밀쳤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담겨 있었다.
"······?!"
나는 지수가 밀치는 대로 뒤로 확 넘어졌고, 지수는.
···지수는.
···애액!
터어엉-! 으직!
"아아아악!"
갑자기 어디선가 매섭게 날아온 빨간 소화기에 얻어맞아 방금 나온 창고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우지직- 촤르르르르- 쿵!
와르르-
축 늘어진 지수의 몸은 계속 뒤로 날아가듯이 바닥을 쓸다가 창고의 끝에 다다라서 멈췄다. 선반에 쌓여 있던 잡동사니들이 쓰러진 지수의 몸 위로 떨어진다.
"···지수야?"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을 아직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지수를 불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대신 보이는 건.
뚝- 뚝-
바닥에 있는 검게 변색된 핏자국 위를 새로이 뒤덮는 지수의 새빨간 피.
"지수야."
나는 재차 지수를 불렀다. 지수의 몸에서 나왔을 혈액이 창고 바닥을 스멀스멀 잠식하는 것이 보였다. 여전히 내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지수에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돌아오는 답은 있었다.
"뭘 그렇게 불러 대? 약하니까 뒤진 거야, 병신아. 킥킥."
그 답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