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1 - 161. 투쟁 (9)
까드드드득! 까가각!
끄드드득! 까각!
짙은 검은 입자의 회오리 속에서 나무 껍질이 비틀리고, 쪼개지는 소리가 수도 없이 들려왔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자명했다.
분명하게 그러한 것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지수가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휘이이이이!
내가 푸른 입자를 최대한 몸에 둘러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검은 입자가 주변의 모든 것을 잡아먹고 있는 까닭이었다.
카카각! 카각!
빠르게 회전하면서 검은 입자에 닿는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부식시켜 분쇄해 버리는 광경은 보는 이들의 몸을 바싹 굳게 만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주변이 더 어두워진 느낌도 들었다.
이윽고.
스스스스···
허공에 와류를 형성한 검은 입자들의 회전 속도가 서서 줄어들더니.
후웅-!
회오리를 이루고 있던 검은 입자들이 한순간에 사방으로 퍼지며 그동안 감추고 있던 것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까극! 끄그극!
[끄으으으으···]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박현일. 아니, 사람이라고 칭하기 무리가 있을 정도로 기이하게 변해 버린 그것. 오히려 나무에 가까워진 그것.
몸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나무 껍질들이 제 크기를 부풀려 나머지 절반을 잡아먹은 것으로도 모자라 아직도 조금씩 몸체를 키워나가는 중이었다.
주변을 갉아먹은 검은 입자에 의해 만들어진 공터 한가운데서 말이다.
"···지수야. 앞으로 얼마나 더 움직일 수 있어?"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지수에게 물었다.
그녀가 어떻게 이능을 각성했는지 모르지만 무한히 지속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당장 나조차도 그러하니까.
속에 담긴 푸른 입자가 바닥나는 순간, 그동안 발휘했던 이적은 하나도 사용할 수 없었다. 단 하나도.
"···5분? 아니, 그보다 더 될 수는 있는데 그래도 10분은 안 돼."
빛나는 금안을 깜빡거리며 나를 보던 지수는 속으로 가늠해 보더니 말했다.
'횟수가 아닌 시간이라···.'
횟수 제한이 아닌 시간제한이라 얼핏 여유롭다고 생각될 수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눈속임에 불과하다.
오히려 시간제한이 걸렸기 때문에 나와 지수는 더 서둘러야만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우리가 마냥 빈틈을 노리는 것을 기다려주지는 않을 테니까.
"지수야, 최대한 시선 끌어 줄 수 있어? 내가 빈틈 노려볼게."
나는 박현일을 경계하며 말했다. 어느새 그의 몸에는 잔가지와 초록빛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죽음을 뜻하는 검은 입자가 생명을 뜻하는 새순을 만들어 낸 모습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광경이었다.
"아직 적응이 좀 덜 됐지만, 할 수 있어."
"···조심해. 이거 가지고 가. 돌려 줄게. 나는 불로 공격하면 되니까."
내가 내민 도끼를 받은 지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끝으로 곧장 앞으로 내달렸다.
파직- 파지직!
빠르게 달리고 있는 그녀의 몸 주위에 스파크가 미약하게 튄다. 그러한 모습은 달린다는 말보다 쏘아진다는 표현이 더 옳았다.
"흐읍!"
탓! 타탓! 탁-!
지수는 날랜 몸놀림으로 도로를 어지럽히는 파편들을 피해 순식간에 거대한 나무로 변한 박현일의 등 뒤로 돌아갔다. 나는 눈 깜빡할 새에 도달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급히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끄르르르르륵···!]
멋대로 폭주한 검은 입자탓일까. 박현일은 아직 의식을 찾지 못했고, 고통스러운 신음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틈에 피해를 누적시켜 둬야 한다.
그리 판단한 나는.
화르륵!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푸른 입자를 한데 그러모아 주먹으로 모았다. 전신에 두른 푸른 장막은 입자를 보충하지 못해 구멍이 송송 뚫려 있어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남은 시간.
단 5분.
쐐애애액!
"히야압!"
섬전처럼 움직인 지수가 그에 따르는 속도로 소방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가 향하는 곳은 박현일의 남은 한쪽 팔. 공격할 수 있는 부위를 제거해 위험을 줄이려는 심산이었다.
바로 그때.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완전히 검게 물든 박현일의 눈이 번쩍 떠지면서 귀청이 떨어질 듯한 포효를 내질렀다. 아니, 그것은 포효가 아닌 절규에 가까웠다. 끝없는 고통이 담긴 절규 말이다.
"아윽!"
괴성을 직격으로 맞은 지수는 한순간 균형을 잃었고, 그 탓에 도끼도 갈 길을 잃어 속에 담긴 힘을 제대로 쏟아 내지 못했다.
···따앙!
맥없이 튕겨지는 도끼와 함께 뒤로 확 젖혀지는 지수의 팔.
그리고.
쉭! 쉬시시식!
그런 그녀를 노리는 건 나무로 변한 박현일에게서 자라나고 있는 날카로운 잔가지들. 마치 송곳 같은 모양을 한 나뭇가지들은 금방이라도 지수를 사정 없이 꿰뚫을 듯했다.
"지수야! 이런 씹···!"
나는 앞으로 내달리면서 주먹에 휘감긴 푸른 불꽃을 압축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감당할 수 있는 만큼 푸른 입자들을 한계까지 억눌렀다.
어차피 불꽃을 날린다고 해도 밀집도가 떨어지는 이상 박현일이 가진 검은 입자를 밀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최대한 응집해서 쏘는 것이 내 최선.
키이잉!
한계까지 뭉쳐진 푸른 입자들은 제멋대로 날뛰며 터지려고 했다.
푸화악-!
훙-!
더 억누를 수도, 그럴 시간도 없는 나는 곧장 푸른 불을 잔가지들을 향해 쏘았다.
퍼어어엉-!
한줄기 선이 된 푸른 불은 잔가지와 부딪치자 폭발하며 지수를 다치지 않게 좀 더 밀어내었고, 나뭇가지들을 태워 뭉툭하게 만들었다.
쩌적-
후두둑- 후두둑-
미처 태우지 못한 잔가지 조각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진다.
부우우웅!
[죽어-!]
나뭇가지 공격은 어떻게든 피했으나 안심할 여유는 없었다. 숨 쉴 틈도 없이 박현일이 나무 팔을 거세게 휘둘러왔으니.
그와 동시에.
촤르르륵!
"끄으윽!"
나는 지수의 손을 붙잡고 강하게 잡아당겼다.
콰앙-!
급하게 뒤로 몸을 날리는 우리 앞에 비대해진 나무 팔이 도로를 강타했다.
쩌저저적-!
지진이라도 온 듯이 사방으로 갈라지는 아스팔트 도로. 더 이상 도로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어 보였다.
"지수야! 괜찮아?!"
"아흐으···, 나는 괜찮- 아, 아저씨! 피! 피!"
귀를 감싸 쥔 채 일어난 지수는 내 팔을 보더니 기함하며 소리쳤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내 팔.
바닥을 구르면서 무언가에 깊게 베인 것인지, 박현일의 공격을 완전히 피하지 못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깊이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패인 상처가 생겨 있었다.
줄줄- 후두둑-
뚝뚝도 아닌 줄줄 새어 나오는 붉은 피. 지금 이 와중에도 피는 끊임없이 떨어져 바닥을 물들이고 있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상관없었다.
겨우 팔이 베인 정도의 고통으로 주저앉고 포기하기에는 내 어깨에 달린 짐이 너무 많았다. 그런 짐들을 결코 내려놓을 생각도, 그러고 싶지도 않은 나는 이 정도로 꺾이지 않는다.
하물며 이미 내 몸에는 이것보다 심한 부상이 새겨져 있지 않은가.
단순히 상처 하나가 늘어났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아직 움직일 수 있지? 시간 얼마나 남았어?"
"···이제 2분."
이러고 있을 시간도 아까웠다. 지수가 능력 사용 시간이 끝나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까드드득!
[날 보고 수군거리지 마!!]
까각! 카가각! 까득!
[그만! 말하지 마!! 난 괴물이 아니야!!]
박현일은 머리를 감싸 쥐고 몸을 마구잡이로 뒤틀고 있었다. 나와 지수는 안중에도 없어진 모양새에 한 가지 직감이 들었다.
속삭임.
그것이 박현일을 자기 입맛대로 조종하기 위해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다는 것을.
「정화하라.」
지금도 내 머리를 울리는 속삭임처럼 말이다.
바로 그때.
두웅··· 둥-
"현우씨! 저희 준비 끝났어요!"
넝쿨망이 출렁이는 소리와 함께 신아현이 나를 불렀다.
'···준비?'
무슨 준비인지는 고개를 들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모여 넝쿨망 위로 굴리고 있는 것. 무언가 담긴 드럼통이 넝쿨망에 하나, 둘씩 쌓이고 있던 것이었다.
"안에 기름 들어 있어요! 그러니까-!"
신아현은 박현일이 눈치채지 못하게 말끝을 흐렸지만 나는 그녀가 무슨 말하고 싶어 하는지 눈치챘다. 드럼통을 떨어트려 바닥과 박현일을 기름으로 덮은 후 태워 버리라는 것이겠지.
푸른 입자와 검은 입자가 잔재한 이곳에서는 불이 잠깐이라도 타오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계획대로만 된다면, 최선의 방법.
나무는 이내 장작이 되리라.
아니, 굳이 태우지 않더라도 기름을 밟고 미끄러지기만 해도 큰 수확이다. 넘어진 상태의 박현일을 상대하는 것은 한층 수월할 테니.
"지수야! 박현일을 이곳으로 유인해야 해!"
"알았어! 이제 몸 움직이는 거 감 잡았어! 진짜 제대로 할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박현일을 드럼통이 담긴 넝쿨망 아래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피가 지속해서 빠져나가 몸이 둔해진 나보다 섬전처럼 움직일 수 있는 지수가 제격.
[끄르아아아악!]
쾅! 쾅! 콰앙-! 콰장창!
근처의 모든 것을 박살내는 박현일. 일그러진 그의 얼굴과 행동에는 오직 다른 무언가를 파괴한다는 목적만 남아 있었다.
"아저씨는 여기서 기다려! 내가 어떻게든 끌고 올 테니까!"
지수는 그 말과 동시에.
타타탓! 타탓!
파지직!
스파크를 튀기며 박현일에게 재차 접근했고.
쐐애액!
날 부분이 아닌 피크 부분으로 소방 도끼를 내려찍었다. 일 점으로 힘이 집중되는 것을 이용해 박현일에게 타격을 주기 위함이었다.
쩍-
거친 나무 껍질을 파고든 피크가 파고들어 틈을 만들어낸다.
[이 개년이━━━!]
박현일은 화물 트럭을 짓이기던 나무 팔을 그대로 들어 올려 위에서 아래로 바닥을 휩쓸었다.
부웅-!
"지수야, 피해-!"
나는 지수가 팔에 얻어맞을까, 하는 생각에 외쳤다. 그의 팔에 정통으로 맞아 본 나였기에 그 팔에 담긴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한층 더 커지기 까지 하지 않았는가.
다행히 이내 안도할 수 있었다.
휙!
파직!
콰아앙-
스파크가 튀는 지수가 몸을 옆으로 날려 손쉽게 팔을 피한 것이다. 박현일의 공격은 애꿎은 도로만 때렸다. 몸을 움직이는 데 감을 잡았다고 하더니 그게 이런 의미였나보다.
그리고.
쐐애액!
지수의 도끼가 다시금 박현일의 몸체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콱! 콰직! 콰득! 콰지직!
후두둑- 후두둑- 부스스-
눈 깜빡할 새에 수차례 휘둘러진 소방 도끼는 무자비하게 나무 껍질을 쪼갰다. 톱밥으로 변한 부스러기들이 계속해서 바닥으로 떨어져 흩날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공격은 그다지 유의미한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게, 도끼에 의해 패인 부분이 생겨나도 순식간에 회복해 버렸으니까.
다만, 화는 제대로 돋운 듯했다.
지수는 이제 빠져야 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는지 곧장 몸을 돌려 내가 있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드럼통이 떨어지는 위치로 말이다.
[으아아아악! 시발!!]
쿵! 쿵! 쿵! 쿵!
박현일은 크게 고함을 내지르더니 등을 보이며 달리는 지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는 이내 땅을 울리며 그녀를 바싹 뒤쫓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아, 아저씨···!"
허겁지겁 달리는 지수의 뒤로 보이는 흉측한 나무가 쫓아오는 모습.
잠깐 사이에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끝난 지수에게 더 이상 스파크가 튀지 않고 있었다. 눈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지만 말이다.
"신아현씨! 옵니다!"
나는 위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박현일이 내는 소음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끄응! 알았어요!"
신아현은 주변의 생존자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더니 다 같이 넝쿨망을 잡았다. 넝쿨을 타이밍에 맞게 풀어 드럼통들을 한꺼번에 쏟아부울 모양이다.
이윽고.
폭!
쿵쿵쿵쿵쿵!
콰직! 콰장창! 콰드득!
지수가 내 품에 안기는 것과 동시에 발에 무엇이 밟히든 상관하지 않는 박현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죽일 거야아아아악!]
"···아니, 죽는 건 너야. 박현일."
나는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내기 위한 종지부를 찍었다.
"아현씨! 지금!"
"다 밀어요! 닥치는 대로 다 밀어어-!"
넝쿨망이 끊어지는 그 순간.
[······?!]
터터터터텅!
데굴데굴-
안에 들어 있던 여러 개의 드럼통들이 박현일에게 떨어졌다. 묵직한 기름통들이 도로를 타고 기세 좋게 굴러간다.
콰지직! 펑-! 까긱! 푸쉬익!
본래 단단한 보관함인 드럼통은 단순히 떨어지는 것만으로는 부서지지 않아야 했으나, 박현일에 의해 밟힌 드럼통은 인정사정 없이 찌그러지고 터지며 안에 들어 있던 기름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콰콰쾅!
간혹 간신히 형체를 유지한 드럼통은 발을 크게 내딛고 있던 박현일을 넘어트리기에 충분했다. 검은 입자의 속삭임이 들리는 그. 분노에 가득 차 시야가 짧아진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까기긱! 와장창-!
까가가각!
그는 남은 한 손을 뻗어 화물 트럭을 붙잡아 균형을 잡으려고 했으나, 트럭은 더이상 박현일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저 허무하게 우그러지는 차체가 죽는 소리를 토해낸다.
"가요! 현우씨! 지수씨!"
신아현이 간절하게 외친다. 그녀는 우리에게 일말의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 다시금 넝쿨을 조종해 박현일에게 날렸다.
"죽어! 이 나쁜 새끼야!"
지수가 도끼를 앞세운 채 내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그녀는 후속타를 날리기 위한 준비를 끝마쳤다.
"으아아아아아!"
나는 이제 정말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불꽃을 두른 주먹을 앞으로 내질렀다. 푸른 불꽃이 한줄기 빛이 되어 앞으로 쏘아진다.
[······어?]
박현일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눈을 크게 뜨게 만드는 광경이 그를 순간 멈칫거리게 만들었다.
박현일의 시야에서 보이는 것은.
지수를 밀어내고 대신 부상을 입은 내가 흘리는 새빨간 피.
자신에게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다가오는 빛나는 금안.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하며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
위를 점거하며 사방에서 쇄도하는 넝쿨 줄기들.
시야를 가득 메우기 시작한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푸른 불꽃.
자신이 뿜어내는 검은 입자를 중화시키는 푸른 입자.
나무로 변해 흉측해진 자기 몸을 비추는 눈부신 햇빛이 만드는 옅은 그림자.
박현일은 자기 목에 걸린 무언가의 조각을 흘깃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여기도━━]
콰아아아아앙-!
어둠이 내려앉은 지상에 어둠을 몰아내기 위한.
······찬란한 무지개가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