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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162화 (163/497)

Chapter 162 - 162. 투쟁 (10)

처음 쏘아진 푸른 불꽃이 터진 것을 제외하고는 거창한 폭발은 없었다.

대신.

화르르륵!

사방으로 흩뿌려진 기름을 따라 피어오르는 매캐한 검은 연기와 함께 치솟은 붉은 불길.

타닥-! 타닥-! 타닥-!

나무로 변한 박현일에게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을 태우는 붉은 불씨.

그러한 것들만 남았을 따름이었다.

푸른 불꽃이 아닌 붉은 불꽃만이.

"허억-, 허억-."

하지만 그러한 모습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한계에 다다른 푸른 입자들이 검은 입자의 정화를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해 소멸한 것과 동시에 열기를 잡아먹는 소화제가 제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꾸득- 꾸드득- 꾸득-

푸른 불길이 터진 중심지가 아닌 가장자리에서부터 기세를 부풀리고 있는 소화제. 그것은 점차 중심지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지에 있는 것은.

"쿨럭! 케헥!"

···박현일이었다.

한순간이지만 붉은 화마를 뒤집어쓴데다가 푸른 불을 직격으로 맞은 그는, 정확히는 그의 몸에는 수많은 균열이 가 있었다.

쩌적-

후두둑- 후두둑-

팽창을 이기지 못한 나무 껍질이 갈라지고, 부서지면서 바닥으로 떨어진다.

"우웨에엑!"

뒤로 엎어진 화물 트럭에 간신히 기대 앉아 있는 박현일이 검은 피를 쏟아 낸다. 철퍽 철퍽 소리를 내는 아주 질척한 검은 피를.

그의 가슴팍에는 여전히 검은 나뭇가지가 박혀 있었다. 이번에도 유해가 결정적인 마지막 타격을 가하는 데에 힘을 쓴 모양이다.

지수가 박현일에게 유해를 박아 넣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공격으로도 그를 쓰러트리기 위한 힘이 모자랐을지도 모르겠다.

휘이이이이···

신선한 공기를 품은 바람이 매캐한 연기를 멀리 밀어내는 것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박현일에게 다가갔다.

저벅- 저벅-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박현일의 모습이 좀 더 명확하게 보인다.

무너져 내리는 팔과 다리,

검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눈, 코, 입, 귀,

벗겨지기 시작한 가면처럼 씌워진 나무 껍질,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흩날리는 회색의 재.

부스스···

검은 입자에 의해 폭주한 나무 껍질이 스러지며 인간인 부분만 남게 되고 있었다.

그렇게 드러난 그의 모습은 내 생각보다 매우 젊어 보였다. 지금은 누더기 변종에게 잡아먹혀 사라진 그의 추종자들이 박현일을 왜 형님이라 부르며 따랐는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언뜻 보면 이제 갓 성인이 된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박현일의 지근거리까지 다다랐을 때.

"···나는 불이 싫어. 죽는 것도 싫고."

풀린 눈동자를 한 박현일이 재를 휘날리며 고개를 들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나는 말없이 그를 내려다 보면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대체 몇 명이나 죽인 거야.

물류 터미널에 처음 캠프에 세워졌을 당시에는 최소 수십, 아니 수백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았을 터다.

하지만 지금 남은 사람들을 보라.

얼마나 살아남았지?

누더기 변종의 습격이 아니었더라도 이미 캠프의 생존자들의 수는 확연하게 줄어들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많이 쳐줘도 스무 명 남짓한 인원들. 매우 큰 물류 터미널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한 숫자였다.

그래 놓고 뭐?

죽는 것이 싫어?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이 세상천지에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줄기 희망이라도 보이면 거기에 기대 살고자 하는 것이 사람이다.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이 사람이다.

하루하루 힘겹게 버텨내 언젠가 뜰 태양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이다.

"···살고 싶다. ···살고 싶어. ···살아야 하는데. 너랑 나는 왜 다르지? 왜? 나도 그냥 살고 싶었을 뿐인데."

죽는 것이 확실시된 상황에서도 삶을 갈망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박현일처럼 말이다.

분명 그에게도 무슨 사연이 있었겠지. 하지만 그것이 이미 수십 번이나 넘어 버린 선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어.'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위험한 세상에서 덧없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만 갈 것이다.

이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아니, 오히려 이런 세상이기에 없던 사연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박현일이 내게 했던 말 중 하나.

'죽였으면!! ···죽는 거야.'

그래, 그 말이 맞다. 죽였으면 죽는 거다.

그것이 누구든 상관없었다. 나 또한 언젠가 내가 저지른 일의 업보를 되돌려 받겠지.

하지만 그건 지금이 아니다.

내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따지고 싶은 말은 셀 수도 없었다. 여러 상념들이 거친 풍랑처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러나 나는 박현일에게 단 한마디만을 내뱉었다.

"···안돼."

그가 살려달라는 생존자들을 죽일 때 항상 내뱉었다는 그 한마디만을.

"하! ···그래도 나는 불에 타 죽지는 커흑-, 않는구나. 그건 다행이네."

내 말을 들은 박현일은 답지 않게 평온한 얼굴을 하며 몸에 힘을 풀었다. 마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도 한계에 다다른 건 마찬가지였고, 단순히 내 착각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턱-

나는 떨리는 양손으로 박현일의 몸에 박힌 유해를 밀어 넣기 위해 잡았다.

미안하다.

만약 다음 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푸욱!

거기에서는 원하는 대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마.

부디.

***

"······."

나는 말없이 아래를 보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유해는 내구도가 다한 것인지 어느새 검은 재로 바스러져서 사라진 상태였다.

"아저씨!"

완전히 기운을 잃고 몸을 축 늘어트린 박현일을 멍하니 보던 내게 지수가 달려들었다. 그녀의 꼬리는 지금까지 봐 왔던 것 중에서 제일 빨리 돌아가고 있었다.

우당탕-!

"커헉!"

폭이 아닌 쿵 수준으로 날 덮친 지수를 받아 냈으면 좋았겠지만, 이제는 서 있는 것도 한계라 균형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그나마 이번에는 허리를 부딪치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일까.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지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을 내 품에 비벼대며 쉴 새 없이 나를 불렀다. 손을 쪼물딱거리고 코를 연신 킁킁 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내가, 우리가 살아남았다는 실감하기 위한 과정인 모양이다.

그리고 나도 그녀의 투명한 금안을 보며 그제야 실감이 들었다.

숨을 들이킬 때 폐부를 가득 채우는 신선한 공기,

땀을 식혀주는 선선한 바람 한 줄기,

눈을 간지럽히는 따스한 햇빛,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곁에서 느껴지는 생명력 가득한 체온.

살아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다만 그러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건 언제나 생명을 위협하는 순간에서 벗어난 직후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이, 이현우씨! 괜찮아요? 살아 있어요?!"

나는 멀리서 뛰어오는 신아현을 보며 웃었다. 그녀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규합해 데리고 오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수야."

나는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에 마른침을 삼키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응? 왜, 아저씨?"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지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녀의 귀는 쫑긋거리며 신경을 내게 집중했다.

"우리가 살아남은 건 좋은데···."

"좋은데···?"

"···세아씨는 어떡하지."

"······아."

지수는 탄식을 내뱉은 것과 동시에 몸을 바싹 굳혔다. 살랑거리던 꼬리는 어느새 털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완전히 깜빡 잊고 있었다. 나도, 지수도.

분명 나는 동이 트기 전에 돌아오기로 한세아에게 약속했다. 지금은 아침 해가 떠오른 지도 조금 지난 시간이고.

그녀는 한밤중에 신아현과 조각을 구해 오겠다며 위험한 바깥으로 나간 나와 지수를 매우 걱정했을 것이다. 잠든 예린이를 지키기 위해, 다친 신아진을 돌보기 위해 한세아는 잠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겠지.

'···언제 돌아오나 하염없이 기다렸을 테고.'

그것보다 문제는.

"···지수야."

"왜, 왜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나 세아씨가 준 푸른 조각도 부숴 먹었어."

"···진짜?"

"응, 진짜."

한세아가 소중하게 여기던 조각을 일회용 충전기로 사용하다 못해 완전히 깨 먹어 버렸다는 것.

비록 살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었으나, 더 이상 푸른 조각이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 나는 몰라. 모르는 일이야. 아흑! 나 아파! 아흐윽!"

지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가슴팍을 부여잡고 앓는 시늉을 했다. 아니, 갑작스레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것을 보니 정말로 아픈 것 같았다.

"지수야! ···허억!"

나는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이내 지수와 별반 다르지 않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뚝- 뚝-

온몸에서 격통이 느껴지기 시작하며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흐른다. 조금 전까지 달콤했던 숨은 이제 고통을 주는 숨으로 바뀌었다.

그제야 새삼 기억나는 건 변종의 공격을 수차례 받은 내 몸이 성치 않다는 당연한 사실과 박현일이 던진 소화기를 정통으로 맞고 날아간 지수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

지금에서야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한 이유는 보호와 진통제의 역할을 해주었던 푸른 입자들이 모조리 바닥난 까닭이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버틴 것이 용했다.

바로 그때.

"···현우씨, 지수씨. 둘이 뭐 해요, 지금?"

거친 숨을 몰아쉬며 뛰어온 신아현이 멍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나와 지수는 몸을 일으킬 생각도 못한 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아현씨, 저랑 지수 좀 반듯하게 눕, 혀 허윽, 주, 십쇼···."

숨을 쉴 때마다,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을 간신히 참으며 토해내듯한 말이었다.

더 이상 기절만큼은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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