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3 - 163. 합류 (1)
"헉! 자, 잠깐만 버텨요. 아저씨! 태민 아저씨!"
신아현은 급하게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불렀다.
'···아저씨?'
아저씨라는 호칭은 대개 남자를 이르는 말이다. 나는 아직 살아 있는 남성이 있다는 소리에 신아현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따라 보았다. 어딘가에 묶여 있었던 것처럼 몸에 줄을 감고 뛰어오는 사람이 보인다.
"태민 아저씨! 들것 좀 가져와요! 하나 말고 두 개!"
이어지는 신아현의 외침에 달려오던 덩치 큰 남자는 헐레벌떡 오던 것만큼이나 황급히 방향을 틀어 어느 창고로 향했다. 그녀가 말한 들것이 방금 향한 그 창고에 있나 보다.
"커흑! 나, 남자가 있, 긴 했군요···?"
나는 숨을 최대한 옅게 내쉬면서 작게 물었다.
지수는 언제 기절한 것인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가슴이 작게 오르락 내리락하는 걸 보니 숨은 쉬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네, 아직도 말을 듣지 않는 남자들은 잠을 따로 재웠거든요. ···뭐, 추종자들은 다 죽은 데다가, 남은 남자들도 태민 아저씨를 제외하고는 둘 정도밖에 없으니 이젠 상관없어진 일이지만."
움직일 수 없는 나 대신 신아현이 안색이 파리해진 지수를 위해 그녀의 자세를 곧게 고쳐주었다. 그러자 지수는 한결 편해졌는지 좀 더 고른 숨소리를 냈다.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인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벗겨진 아스팔트로 인해 생긴 흙구덩이,
도로 사이에 반짝거리는 유리 조각들, 울퉁불퉁한 도로에 살짝 고인 물웅덩이, 움푹 패인 화물트럭 차체, 뒤집어져 하단부를 보이는 SUV와 경차들, 널브러진 금속 셔터, 바닥을 굴러다니는 쇠 파이프, 납작하게 구겨진 드럼통.
여기서 제일 멀쩡한 걸 고르라면 쉽게 고를 수 없을 정도로 대부분이 엉망인 광경.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화물 트럭 앞에 기대져 있는 시체로 변한 박현일과 L동 창고 안에 있는 누더기 변종의 사체였다. 기지개를 킨 태양이 지상을 제대로 비추면서 보지 않으려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것들도 한시라도 빨리 정화해야 하건만, 지금 내 상태로는 어림도 없었다.
단순히 땅을 파서 묻는 것으로 처리가 끝나는 게 아닌 푸른 불꽃으로 태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비록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박현일과 누더기 변종에게는 상당한 검은 입자가 남아 있었으니까.
새벽 내내 혹사 당한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는 게 기적이었다. 푸른 입자가 채워지려면 시간과 체력이 더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이 우선이고.
그렇다고 저것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쿨럭! 신아현씨, 저 시체들 함부로 만지거나 처리할 생각하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전해 주십쇼. 혹시 모르니까 감시하는 사람들도 세워 두시고요."
나 대신 저것들을 경계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내 주변에 있지 않은가. 정확히는 물류 터미널에 말이다.
"알았어요. 걱정하지마요.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미리 말해 뒀어요. 함부로 만지면 큰일 날 수도 있다구요. 그래서 지금 L동 창고 출입 금지 시켜 놓고 다른 창고 정리 중이에요. 오늘 밤을 버틸 곳이 필요하긴 하니까요."
"그럼 다행입니다. 후우···."
어쩐지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더라니 각자 맡은 역할을 하기 위해서 흩어진 모양이다.
"···사람들 다 불러 모을까요?"
신아현은 내 눈치를 보며 소심하게 물었다.
"예? 왜요?"
나는 그녀의 진의를 알 수가 없어 되물었다가 이내 이어지는 신아현의 말에 기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한순간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고통도 잊을 정도였다.
"현우씨가 다 구해줬으니 감사 인사도 할 겸···?"
"뭔?! 아니, 전 그런 거 바라고 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각자 할 일 하는 게 더 나아요. 아니, 그래야만 하죠. 당연히."
내가 무슨 갑질하는 회장도 아니고 사람들을 집합시킨다는 말인가. 그런 건 바라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내 쪽에서 사절이다. 상상만 해도 부끄러워서 죽을 지경이니까.
바로 그때.
탁탁- 탁탁탁!
"허억-, 아현아. 여기 들것 2개 가져왔다."
둔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중년의 남성이 구슬 땀을 흘리며 다가왔다.
동네에서 흔하게 보이는 아저씨 체형에 덥수룩한 수염이 달린 그는 순박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머리 위로 솟은 동물 귀는 반으로 접혀 있는 모습이었다.
"이분들이에요. 저희 캠프를 구해주신 분들이요. 지금 부상이 심하시니까 조심해서 옮겨 주세요. 휴게실 정리는 끝났죠?"
"어어! 그럼! 먼지랑 쓰레기는 최대한 치워뒀어. 아이고, 반갑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안전하고 신속하게 옮길 김태민이라고 합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아니 자신을 김태민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고개를 연신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아, 네. 저는-"
뭔가 인사를 나눌 타이밍인 것 같아서 입을 열려고 했지만.
덥석-
내 몸을 불쑥 들어 올리는 손길에 나는 입을 꾹 닫아야만 했다.
"어?"
"자자, 지금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시니 말은 아끼시고! 저희가 푹 쉬실 수 있게 장소 마련해 뒀습니다! 일단 가서 쉬시죠! 당장 급한 말은 아현이에게 하셨지요?"
내가 가볍지는 않을 텐데도 나를 가볍게 들어 올린 김태민은 사람 좋은 얼굴로 미소를 띠었다. 그는 이내 신아현과 함께 나와 지수를 들것에 차례대로 실었다.
"예, 그렇긴 합니다···."
묘하게 기시감이 느껴지는 김태민의 태도에 얼떨떨한 표정을 하며 답했다. 나는 분명히 이러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언제였지?'
내가 골머리를 싸매며 기억을 떠올리려는 와중에도 김태민과 신아현은 착실히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태민 아저씨, 아저씨가 현우씨 들고 가요. 저는 지수씨 들고 따라 갈게요."
"알았다. 먼저 갈 테니까 천천히 따라 와."
들것에 달린 줄을 이용해 나와 지수의 몸이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키는 그들.
이윽고, 가장 먼저 옮길 준비를 마친 김태민이 나를 양손으로 들면서 바라보았다.
아, 기억났다.
"그럼 출발합니다! 흔들릴 수 있으니까 입 다무시고-, 떨어지지 않게 줄 꽉 잡으시고!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사람 좋은 얼굴, 무언가 기대감을 가진 미소, 전방으로 고정된 시선.
그것은 바로 첫 휴가에 들뜬 나를 보면서 웃었던 택시 기사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도 김태민과 똑같은 말을 했었지.
'그러다가 어떻게 됐더라···?'
총알처럼 달려 나가는 택시.
그 안에서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나.
신난 듯 잔뜩 웃어 젖히는 택시 기사.
그렇게 결국, 나라는 지켰지만 속은 지키지 못했던 그날.
"자, 잠깐━."
나는 머리를 스쳐 지나간 악몽과 같았던 기억에 급하게 멈춰 세우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한세아에 대한 이야기도 미처 꺼내지 못한 채로.
휘이이이이-!
***
"도착했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나는 멍한 얼굴로 말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김태민이 나를 옮기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상사는 없었다. 오히려 김태민이 자신했던 것처럼 안전하고 신속하게 들고 날랐다고 할 수 있었다.
하긴 예전에 탔던 그 택시가 유별났던 것이지, 어찌 사람이 그 수준으로 움직이겠는가.
심지어 별로 흔들리지도 않았다.
"저희가 최대한 치운다고 치운 건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김태민은 나를 조심스럽게 매트리스 위에 내려 놓으면서 말했다. 탄력 있는 매트가 등에 부드럽게 달라붙는다.
"깔끔하네요.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석재로 된 타일이 있는 창고가 아닌, 언뜻 보면 일반 가정집으로 보일 정도로 설비를 갖춘 휴게실이었다. 정확히는 휴게실보다는 숙직실에 가까워 보였다.
제대로 된 마루가 있고, 마루 위에는 푹신한 매트리스와 이불이 깔린 모습.
그리고 주변에는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흔적이 있었다. 김태민이 말했던 것처럼 누군가가 방금 전까지 치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째서인지 지금은 자리를 비운 상태고.
"···허허. 저희를 구해주신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당장은 이 정도밖에 해드릴 수 없어서 미안하군요."
김태민은 웃는 낯에서 처음으로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 것은 깊은 후회. 되돌릴 수 없는 과거였다.
"반항도 포기한 채 힘겹게 살아가던 저희를 살려주지 않았습니까. 무시무시한 괴물들도 해치워 주셨고요."
"크흠! 그보다 말 편하게 하십쇼. 저보다 나이 많으실 텐데 높임말은 좀 불편합니다."
속을 간지럽히는 말에 거북함을 느낀 나는 화제를 돌렸다. 더 듣다가는 내가 버티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오! 그럴까? 이야, 이 친구 힘이 세기만 한 게 아니라 싹싹하기까지 하구만! 허허, 형이라고 부르게! 형님은 내가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말이야."
"······예."
형이나 형님보다는 그야말로 아저씨에 가까웠기에 신아현처럼 나도 김태민을 아저씨라고 부를 생각이었으나 반박하기보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지금 좋은 분위기를 망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내가 구석에 갇혀 있어서 자네 아니, 동생의 활약을 다 보지는 못했지마는 귀로는 다 들었지!"
껄껄 웃는 김태민.
그리고 그는.
"또 듣기만 했을까! 내가 여기저기 지나다니면서 그것들이 죽어있는 모습을 보니까 싸우지도 않은 내 심장이 벌렁거리더군. 이거 참, 민망한 말이지만 내 자신감이 그대로 쫙 쪼그라들었다 이 말일세. 나도 힘 하면 자신이 있었거든! 그런 나를 바로 겁 먹게 한 괴물들을 동생이 둘이나 해치웠다니. 정말 대단해! 내 자신감 회복을 위해 한번 건드리려고 했다가 아현이에게 아주 혼쭐이 났지 뭔가.
만졌다가 큰일 나면 어쩌려고 그러냐는 말에 듣고 보니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지. 내가 생각이 짧았던 거지. 아, 그래도 걱정하지 말게나! 욕심부려서 그것들을 건드릴 생각은 없으니까!
"
내 눈치가 다 사라질 정도로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아 되뇌었다.
'···아현씨, 제발 빨리 와주십쇼······.'
절실하게 보고 싶은 사람은 한세아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터를 꺼줄 신아현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