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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164화 (165/497)

Chapter 164 - 164. 합류 (2)

"그러니까 내 말은 동생은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는 걸세! 응? 동생, 내 말 듣고 있나?"

"···듣고 있습니다······."

나는 급격하게 몰려오는 피로감을 애써 억누르며 답했다.

내가 숙직실에 들어온 지 어언 5분쯤 되었을까. 김태민은 한시도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악의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닌 정말로 순수하게 신나서 그런다는 것을 알지만 서도, 때로는 그런 점이 오히려 사람을 괴롭히는 데 특효였다.

대꾸할 기력도, 말릴 수 있는 체력도 없는 나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태민 아저씨가 말소리가 쉬지 않고 들리네요. 또 사람 괴롭히고 있었어요? 죄송해요, 현우씨. 오는 김에 사람들에게 갈아입을 옷이랑 약 좀 얻어오느라 좀 늦었어요."

신아현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를 뒤따라 들어오는 것은 넝쿨이 옮기고 있는 지수와 지수를 지켜보고 있는 이예솔이었다.

"아현씨···!"

나는 얼굴에 화색을 띠며 그녀를 반겼고.

"괴롭히다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아현아!"

김태민은 펄쩍 뛰면서 억울함을 토로했다.

"오해는 무슨, 현우씨 얼굴 안 보여요? 완전 피곤해 보이는 구만! 그리고 태민 아저씨, 너무 힘 빼지 말아요. 아직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남았으니까. 그렇죠, 현우씨? 다른 일행도 데려와야 하잖아요."

"알고 있었습니까?"

신아현은 내가 따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주민센터 일행을 데려올 방법을 이미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에 안도감과 의문이 동시에 들었지만 의문은 이내 해소되었다.

"그럼요. 제 언니도 그쪽에 같이 있잖아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아."

어찌 보면 당연했다. 내가 한세아와 예린을 계속 신경 쓰고 있는 것처럼, 신아현 또한 그녀의 언니를 계속 신경 쓰지 않았겠는가.

내 사정을 알고 있는 신아현 덕분에 입 아프게 여러 번 말하지 않아도 되니 그건 다행이었다.

"현우씨, 하수도로 왔죠? 그럼 저희도 그쪽으로 가면 되겠네요. 방향은 현우씨랑 지수씨가 남긴 흔적 따라서 되돌아가는 식으로요."

신아현은 코를 살짝 킁킁거리더니 말했다. 거센 빗줄기로 진득하게 샤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하수구의 잔향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흔적을 따라간다는 것은 후각을 이용해서 한다는 말인 것 같고.

"그렇긴 한데, 비가 좀 많이 내려서 저희 냄새는 다 지워지지 않았겠습니까? 저희가 올 때도 물이 계속 흐르긴 했거든요."

"괜찮아요. 아직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으니 약하게라도 남아 있기는···할걸요? 뭐, 대략적인 방향은 아니까 쭉 가면 어떻게든 도착하겠죠. 그러니까 그건 걱정 하지 마시고, 하수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만 말해주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해볼게요."

나는 신아현의 말에 하수도에 있었던 일들을 회상했다.

미로처럼 얽힌 콘크리트 통로, 수많은 배관이 모여 물을 내뿜는 공동, 그 안에 둥지를 튼 뉴트리아 변종들, 무너진 사다리.

"아마 밑으로 내려가서 통로를 걷다 보면 좀 큰 공동이 나올 겁니다. 파이프들이랑 수로가 한데 모이는 곳이요. 거기만 조심하면 될 겁니다."

"거기에 뭐가 있나요? 설마 저번에 잠깐 얘기해주셨던 도롱뇽 변종은 아니죠?"

"그건 아닙니다. 그냥···."

"그냥···?"

"큰 쥐들이 있어요. 뉴트리아 떼가 거기 살고 있더라고요."

"······."

잠시 침묵에 빠진 신아현은 머릿속으로 커진 쥐들을 상상해 보았는지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초록빛 머리가 같이 흔들린다.

"그거 말고는 위험한 건 없었습니다. 냄새도 그렇게 막 심하지는 않았고."

"일단 알았어요. 현우씨 나머지 일행이랑 제 언니랑 잘 데려올게요."

"허허, 거기에 내가 빠질 수 없지! 드디어 내 힘을 선보일 때가 왔구먼! 걱정 말게, 동생! 반드시 무사하게 데려와 보일 테니!"

"태민 아저씨는 당연히 따라와야죠. 이제 캠프에서 제일 멀쩡하고, 힘 센 사람이 아저씨뿐인데. 현우씨를 제외한다면요. 다른 남자들은 정신 차리려면 아직 멀었고."

"허허, 허허허···. 크흠."

멋쩍은 듯 헛기침을 내뱉는 김태민.

"아, 혹시 종이랑 펜 있습니까? 가는 건 좋지만 세아씨가 당신들을 믿을 수 있게 쪽지라도 전해주려고 합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지금 한세아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예민할 것이 분명하다.

이미 아침 해가 떴는데도 나와 지수가 돌아오지 않고 있지, 신아진을 돌보느라 밤새 눈을 붙이지도 못했지, 혹시 나무 인간이나 위험한 사람들이 도서관으로 쳐들어올까 봐 항상 주변을 경계해야 하지. 등등.

이런저런 요인으로 예린과 신아진이라는 알을 지키기 위해 매우 신경이 곤두서 있을 한세아가 예고 없이 모습을 드러낸 캠프 생존자들을 마주치게 된다면.

최악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다짜고짜 총을 쏴도 이상하지 않다.

비록 푸른 조각이 없어 얼마 쓰지 못한다 하더라도 총이라는 무기는 그 짧은 시간에 대참사를 일으킬 수도 있는 물건이니까.

그러니 최소한의 믿음을 줄 수 있는 물건과 함께 쪽지 같은 것을 넘겨 주어야 하리라.

이윽고, 신아현에게 종이와 펜을 받은 나는 나침반과 함께 급하게 휘갈겨 쓴 쪽지를 곧바로 내밀었다.

나침반은 한세아가 내게 준 물건이니 이것이 대화의 물꼬를 틀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쪽지는 불안한 그녀를 안심시켜 줄 것이고.

"나침반 따라서 남동쪽으로 가면 얼추 맞을 겁니다. 주민센터 쪽 맨홀 뚜껑을 안 닫고 왔으니 이상한 위치로 나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고요."

"고마워요. 그럼 푹 쉬고 계세요. 가요, 태민 아저씨. 갔다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서둘러야죠."

"어어, 그래. 가야지."

신아현과 김태민은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둘은 한시가 급하다는 듯 빠르게 움직였다.

다만.

"저, 저기···."

이예솔은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방에 남았다.

"······?"

"갈아입을 옷 가져왔어요···. 약이랑 붕대도···. 움직이시는 거 힘드시니까 도, 도와드리려고요···. 곧 올 일행이 지금 모습 보면 엄청 놀랄 테니까···."

이예솔은 옷과 구급 상자를 꼭 쥔 채 말을 이었다. 나와 지수를 간호하기 위해 홀로 남은 모양이다.

"아,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좋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꼴이었으니까.

뉴트리아 변종의 이빨에 송송 구멍이 뚫린 바지,

아스팔트에 긁혀 찢어진 상의,

피부 곳곳에 생긴 피멍, 유리 조각에 찢어진 피부,

갈비뼈에 이상이 생겨 함부로 못 움직이는 몸,

피로와 고통을 호소하는 근육, 지끈거리는 머리,

지속된 혹사에 비명을 지르는 심장, 여전히 피 맛이 나는 입.

회복력이 강화되어서 점차 나아지고 있는 것이 망정이지, 중환자도 이런 중환자가 없다.

이대로 있다가는 한세아가 매트리스에 누워 있는 나와 지수의 모습을 보고 기절할지도 몰랐다. 나뿐만이 아닌 지수도 상태가 심각했으니 더욱 그렇겠지.

"저는 제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 지수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같은 여성분이 하는 게 나으니까요."

쥐 죽은 듯이 자는 아니, 기절한 지수는 처음보다 좀 더 호전된 상태. 다만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상태가 매우 나빴으니 빨리 갈아입혀야 했다.

핏물에 푹 젖은 옷이 몸의 회복을 막는데 단단히 한몫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새 옷을 입히는 과정에서 몸의 상처를 치료해야 하기도하고.

"네, 네! ···근데 두 분 연인 아, 아니세요?"

갑자기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이예솔.

"······? 아닙니다."

"아하, 그, 그렇구나···. 그럼 지수씨는 제가 맡을 테니 이쪽 보시면 안 돼요···!"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연고와 붕대를 받았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당장은 빨리 쉬고 싶은 생각만 가득 차 있었다. 이예솔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지수에게 다가가 넝마가 된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스륵- 철퍽- 지지직-

스윽- 스윽-

분리된 옷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와 이예솔이 물수건으로 몸을 닦으면서 생기는 소리들을 뒤로 하고, 나는 내 할 일을 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큭. 어후-."

팔을 살짝 들어 올리기만 했건만. 몸에서 비명을 지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몸이 변하긴 했나 보네.'

그래도 다행인 점은 회복이 기대 이상으로 빠르다는 것이다. 긴 상처가 나 있던 팔뚝을 보니 새삼 깨닫게 된 부분이었다. 깊게 패였던 부위였는데 벌써 딱지가 질 정도로 아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이대로만 가면 금방 부상을 털고 일어날 수 있으리라.

욱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이 지르는 비명을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벗은 옷을 하나씩 옆에 내려놔 물수건으로 몸을 대강 닦은 다음 연고를 주욱 짜 붕대를 감았다.

'일단 상처가 있는 곳은 붕대로 다 둘러야겠다.'

새하얬던 물수건은 금방 핏물에 젖어 붉어졌고, 다른 수건을 가져와야만 했다.

그렇게 수건을 바꾸고, 연고를 바르며 어색한 붕대질을 하기 몇 차례.

나는 붕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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