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5 - 165. 합류 (3) - 2부 끝
'···왜.'
이렇게 된 거지?
나는 분명 어색했지만 붕대를 제대로 감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돌돌 말리는 붕대가 늘어나더니 이 꼴이 되고 말았다.
아니, 붕대가 늘어난 것이 아닌 그만큼 내 몸에 상처가 많다는 이야기였다. 상처가 보이는 대로 감았고 그 결과, 이런 꼴사나운 모습이 된 것이지.
"······풉."
내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멍하니 고개를 돌려 보니 야무진 손길로 지수를 제대로 케어한 이예솔이 보인다.
한결 편해진 얼굴로 깊은 잠에 빠진 지수는 편한 옷으로 환복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나와 달리 너무 과하지도 않게, 너무 부족하지도 않게 딱 필요한 부분만 붕대가 감겨 있었다.
"역시 제 도움이 필요해 보이시네요. 도와 드릴까요?"
이예솔은 자기 적성을 찾은 듯 살짝 자신감에 차 있었다. 말도 더듬지 않았고.
"···부탁드립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중요 부위는 가려진 상태. 그러니 서로 민망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최대한 빨리 끝낼게요. 아까 보니까 현우씨 늑골에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까요. 갈비뼈 부위에 멍도 잔뜩 있으시고, 숨을 크게 쉬지 못하시고, 살짝 부어 오르기까지 했고···. 맞죠?"
"어···, 맞습니다. 의사세요?"
"아뇨, 의사는 아니고 그냥. 의사 옆에 서 있는 간호사였어요. 그리고 방금 제가 말한 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 말한 거라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걸요. 이 정도는 누구나 보면 알죠."
"아, 간호사셨구나."
의사가 아니기는 해도 이예솔이 간호사였다는 말에 그녀가 달리 보였다. 나는 이예솔이 이 자리에 남은 것이 나와 지수를 처음 만난 사람이라 그런 줄 알고 있었건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신아현이 이예솔을 두고 간 이유는 이예솔이 그나마 의학적 지식이 있는 까닭이었다. 우리는 부상을 입은 환자이기도 하니까 그녀가 남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겠지.
단순히 붕대와 약만 발라주는 일이긴 해도 그걸 누가 해주냐에 따라 인식이 확연하게 달라지지 않겠는가.
'···뭐, 플라시보라는 말도 있으니까.'
그 뒤로.
스윽- 스윽-
이예솔은 말없이 엉망으로 묶인 붕대를 풀어 적당한 수준으로 다시 감아주었다. 내가 미처 닦아내지 못했던 부위에 묻은 핏물도 세심하게 닦아내 주면서.
툭- 툭-
군데군데 연고가 필요한 부분은 손가락 끝으로 살며시 두드려 주는 이예솔. 혹여 살짝 아문 상처가 다시 벌어질까 조심스러운 손짓이었다.
"······."
"······."
어느새 방 안에는 옅은 숨소리만 맴돌게 되었다.
잠에 빠진 지수가 내는 숨소리,
한껏 집중한 이예솔이 내는 숨소리,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만 공기를 들이키는 내가 내는 숨소리.
그러한 침묵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깨졌다.
"···태민 아저씨가 말이 좀 많았죠? 원래는 과묵하신 분이었는데. 나쁜 뜻은 없으셨을 거예요."
조용해진 상황에 어색함을 느낀 것일까. 이예솔이 작게 헛기침하며 물은 까닭이었다.
"아뇨, 뭐···. 싫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피곤하기는 했어도."
나는 무어라 답을 해 줘야 할지 머뭇거리다가 가장 무난한 답을 내놓았다. 참지 못하고 뒷말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히, 오늘은 특히 더 많았어요. 억지가 아닌 진짜로 기뻐 보이기도 했고요. 그야-, 오늘은 기쁜 날이잖아요."
이예솔이 쿡쿡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웃을 일이 아니었으니까.
"비록 스스로 손으로 이루지는 못했지만, 누군가가 대신 딸과 아내의 복수를 해줬으니까요. 아니, 누군가가 아니죠. 현우씨가 해준 거죠. 그래서 현우씨한테 많이 고마우셨나 봐요."
···복수.
가까운 이를 다른 이의 손에 잃어 버리게 된 사람이 가지는 목표.
피해를 받은 사람이 가해자에게 반드시 원한을 되갚아주겠다는 다짐.
"그러니 어찌 오늘이 기쁜 날이 아니겠어요? 다들 지금은 얼떨떨해 보이지만 조금씩 활기와 웃음을 되찾으려고 하고 있어요. 다 현우씨 덕분이에요."
사람이 슬픔을 달래는 방법은 제각기 다르다.
감정이 사라질 때까지 주저앉아 울기만 하는 사람.
감정이 사라질 때까지 속으로 삭히기만 하는 사람.
가슴을 울리는 슬픔을 애써 외면해 오히려 더 밝은 척을 하는 사람.
가슴을 울리는 슬픔을 애써 참지 않고 다른 이에게 모두 털어놓는 사람.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다르지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계속해서 슬픔을 곱씹으면서 사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언젠가 시간이 계속 흘러 감정이 풍화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것.
바로 기약 없는 기다림이었다.
"저요. 이 캠프가 싫었어요. 정확히는 박현일이 나타났을 때부터 그랬네요. 그 남자가 모든 걸 망쳤으니까. 그래서 도망치고 싶었어요."
"···지금도 그렇습니까?"
나는 차오르는 한숨을 억누르며 이예솔에게 물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 캠프만큼 안전한 곳이 없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판단에 불과하지 않은가.
"······눈을 돌릴 때마다 여기에 있었던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올라요. 지금 당장에라도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저를 괴롭힌 남자들을 죽였어도 그건 변함이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요."
"······."
"그래서는 안 되잖아요. 분명 힘들었던 적이 있어요. 분명 죽고 싶었던 적도 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도망가면 안 되는 거잖아요. 저는 어른이니까."
"······."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지만요, 저요. 아이들이 좋아요. 그건 지금도 그래요. 요즘 아이들은 눈치가 좋다는 걸 아세요? 캠프에 오고 나서부터 아이들은 떼도 못 쓰고 눈치만 봤어요. 특히 그 남자가 나타났을 때부터는 더 심했죠. 어른들도 갈수록 이상하게 변하고, 자신들을 둘러싼 상황도 계속 나쁘게 변했으니 당연한 결과예요."
이예솔은 조금씩 움직이던 손도 멈춘 채 말을 이어 나갔다. 내 등에 올리고 있는 손은 떨림을 더해 나갔다.
"······."
나는 묵묵히 그녀가 하는 이야기들을 들어 주었다. 해묵은 감정들을 해소하기를 바라면서.
"그런 아이들이···. 희미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웃었어요. 자신들을 돌봐주는 어른들이 웃으니까 그냥 따라 웃는 거예요. 그걸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아직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구나. 내가 힘든 만큼 저 아이들도 힘들었겠구나.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그걸 이제서야 알아차리다니 저도 참 바보같죠?"
"······."
"아직 살아 있는 아이들이 있어요.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도망은 안치려고요. 저는 이미 흉터가 많이 생겼지만, 최소한 아이들 만큼은 저보다 적게 아팠으면 하니까. 더 이상 넘어지지 않았으면 하니까."
흉터는 사라지지 않는다. 빈자리를 새살이 채워도 그것만큼은 바뀌지 않는 사실.
흉터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고, 욱신거리는 고통을 느끼게 만든다.
다만 흉터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흉터는 오히려 그렇기에 사람을 바꾼다.
그것이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말이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이예솔을 어른으로 만들어 주는 흉터였다.
처음부터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그건 가정조차 불가능한 이야기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현우씨 덕분이에요. 제가 살겠다고 다짐한 것도, 아이들이 웃게 된 것도, 태민 아저씨가 속앓이를 하지 않게 된 것도. 전부요."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히, 어쩌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렀는지 모르겠네요. 이해해주세요, 갑자기 이렇게 될 줄은 몰라서 기분이 좀 이상해져서 그런가 봐요."
이예솔은 읏차,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덧 내가 엉망으로 맨 붕대 뭉치는 사라지고 깔끔하게 매인 붕대만 남아 있었다.
"그럼 푹 쉬고 계세요. 다른 일행분들 오시면 이쪽으로 바로 데리고 올게요. 그리고 지금 주무시고 계시는 지수씨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자잘한 상처는 벌써 다 나으셨고, 상태가 좀 심한 늑골 부위만 조심하면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아, 그렇다고 막 움직이면 안 된다고 전해주세요. 그건 현우씨도 마찬가지구요. 금이 간 늑골이 잘 붙으려면 가만히 있어야 하니까요. 알았죠?"
"넵."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이예솔은 숙직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달칵-
조용하게 닫히는 문.
저벅- 저벅···
조금씩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
"······."
다시 적막이 내려앉은 방 안에서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비록 눈을 감고 있는 동안뿐이지만, 잠시나마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서.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랬으면 했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톡- 톡- 톡-
부드러운 천이 내 이마를 건드리는 느낌에 조금씩 의식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눈만 감고 있는다는 게 그만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아흐-."
몽둥이찜질을 당하기라도 한 듯 온몸이 욱신거리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침음을 흘린 그 순간.
"···현우씨? 깼어요?"
이마를 톡톡 건드리던 천이 움직임을 멈추고 말을 걸어왔다. 아니, 그것은 천 조각이 아니라 내가 기다리고 있던 한세아의 목소리였다.
"······! 세아씨!"
나는 황급히 눈을 뜨며 일어나려고 했으나, 몸을 지그시 누르는 손길에 다시 얌전히 몸을 뉘었다.
"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러면 상처가 덧날수도 있다고요."
서서히 뚜렷해지는 시야에 보이는 것은 주홍빛으로 물든 방의 모습과 붉은 단발을 가진 한세아였다. 다행히 꿈이 아닌 진짜였던 모양이다.
"어, 언제 오신 겁니까?"
"정오쯤? 도착했어요."
내가 깜빡 잠이 든 시간이 이른 아침, 한세아가 캠프로 온 것이 정오, 지금 시간대는 석양이 지는 걸 보니 저녁쯤.
아주 정신줄을 놓고 잤나 보다. 시간만 대충 따져도 10시간은 넘게 잔 것 같으니까.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들이 와서 아니, 신아현씨가 있기는 했지만 아무튼! 현우씨랑 지수씨가 많이 다쳤다고 해서 얼마나···."
한세아는 말을 잇다가 울컥했는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서로 상반되는 감정이 느껴졌다.
한세아와 예린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생각에 드는 안도감과 조각을 부숴 먹은 변명 거리를 생각하지 못해서 드는 낭패감 말이다.
일장 연설을 할 계획이었지만, 너무 피곤한 나머지 아무것도 못하고 자고 말았다.
아직 한세아는 내가 푸른 조각을 부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캠프 생존자들도 모르겠지. 그도 그럴게, 어찌 알겠는가. 조각의 존재를 아는 건 여기 있는 우리 일행뿐이건만.
'아니, 내 목에 조각이 걸려있지 않는 걸 봤을 테니 이미 알고 있으려나?'
결국 나는.
"그, 세아씨. 약속 못 지켜서 정말 미안합니다···. 그리고 조각도 부서졌어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이실직고 하기로 했다. 빙 돌아가는 길이 안 된다면 답은 정공법뿐이니까.
"그건 아까 봐서 알고 있었어요. ······제가 걸어 준 조각이 현우씨에게 도움이 되었나요? 이것만 말해주세요."
잠시 멈칫한 한세아는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네. 세아씨가 푸른 조각을 건네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저는···."
비록 내가 말을 끝맺지 않고 흐렸으나, 뒤에 올 말이 무엇인지는 나도, 한세아도 알고 있었다.
폭-
"다행이에요. 아무것도 못한 제가 그렇게라도 도움이 되어서요. 다행이에요, 정말로."
한세아는 두 팔을 벌리며 우물쭈물하는 나를 품에 넣었다. 말랑말랑한 살의 감촉과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부드러운 살 내음이 맡아진다.
"저 안 혼납니까?"
나도 다행이었다. 보물이라고 생각한 조각이 없어져서 화가 난 한세아에게 잔뜩 혼이 날 줄 알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잔뜩 다치기도 하지 않았던가.
"······."
말없이 등에 손을 올린 한세아.
스윽- 스윽-
눈치보는 아이를 달래듯 등을 살며시 쓸어 주는 손길에 몸이 점점 노곤해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 당장은 포옹을 통해 각자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 당장은.
나와 한세아는 꽉 안으며 이 순간만큼은 훈훈하게 재회를 마무리했다.
"···현우씨, 제 부탁 하나 들어 줄래요?"
"뭡니까? 안될 건 없죠.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뭐든지요."
"···그럼 이제 아무 데도 못 가."
"······예?"
아니, 마무리 지었어야 했다.
······꽈악!
갑작스럽게 한세아가 두 팔에 힘을 주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어디 가지 못하게 묶어 둬서 내가 주는 것만 먹게 만들어 버리고, 그렇게 현우씨랑 나랑 오순도순 살면서 개 하나 고양이 하나 정도는 키워도 괜찮으니까 집 안에 들여 넣고 화목하게 살아야겠다.
현우씨가 잘못한 거예요. 현우씨가 매번 약속도 안 지키고 다쳐서 돌아오니까. 저는 잘못 없어요. 현우씨가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아니라서 혼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요. 저는 잘못 없어요. 다 현우씨가 잘못한 거예요. 자꾸 말 안 듣는 나쁜 아이는 혼나야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