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6 - 166. 부탁 (1)
"컥?!"
숨이 턱 막힌다. 부드러움에 질식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 한세아가 나를 꽉 안은 만큼 그녀의 소담한 가슴이 뭉개지면서 숨통을 막았다.
"읍! 으읍!"
얼굴 가득 느껴지는 감촉을 즐길 틈도 없이 나는 다급하게 탭을 쳐야만 했다. 일단 무조건 내가 잘못했고,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할 테니 풀어달라는 선언이었다.
한세아의 힘이 어찌나 센지 나로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녀가 세졌다기보다는 내가 부상을 입은 탓에 힘이 약해진 거겠지.
꽈악-!
하지만 한세아는 내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 강하게 안았다. 살 내음이 더 강하게 맡아진다.
"제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아침이 되기 전에 돌아온다던 사람들 대신 모르는 사람들이 막 찾아오지, 예린이는 일어나서 분위기가 안 좋은 걸 알고 눈치만 보지, 신아진씨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지, 저는 아무것도 못한 채 전전긍긍만 하고 있지. ······사람이 얼마나 걱정했겠냐구요···."
한세아는 서러운 목소리로 속상함을 토로 했다. 나도 풀어달라는 속마음을 토로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허락하지 않았다.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
'···세아씨가 있다는 것은 결국 예린이도 있다는 거잖아.'
나와 지수는 한 방에서 쉬고 있었으니 숙직실 안에 우리 일행이 전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시간이 꽤 흐른 상태이니 지수도 잠에서 깨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옆에는 예린이가 있겠지.
근데.
왜 이렇게 방이 조용한가.
적어도 예린이나 지수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찌 되었든 그녀들이 한 방에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둘 중 아무나 곤경에 처한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한 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굴려 방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여전히 매트 위에 얌전히 누워있는 지수와 그녀 옆에 드러누운 채 자는 예린.
전부 푹 자고 있는 줄 알았지만, 지수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그녀가 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죽은 눈이 된 한세아를 말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안도감이 들었다.
"······!"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뒤이어 벌어지는 일을 보고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만 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지수는 귀를 쫑긋 바싹 세우더니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스르륵 눈을 감았던 것이다. 이불 밖으로 튀어나온 꼬리도 스르륵 안으로 집어넣었다.
마치 자기는 아직 자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주장하는 것 같았다.
수라장을 같이 헤쳐 나간 지수가 눈앞의 전우를 모르쇠로 외면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쪽지 내용이 그게 뭐예요? 믿을 만한 사람들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 써있는 것도 아니고, 뭐요? 안 오면 평생 계륵이라고 놀릴 거라고요? 지금 그게 심각한 상황에서 쪽지에 써둘 이야기예요?"
"······."
내 딴에는 나름 확신을 줄 수 있는 문구라고 생각했건만. 한세아의 말마따나 상황에 맞지 않기는 해도 계륵이라는 농담은 나와 그녀 둘만 알고 있는 이야기지 않은가.
아니, 불안에 떠는 한세아의 긴장을 풀어 주기는 했으나 너무 풀어 줘서 오히려 화가 난 모양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기절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또 -하앙!"
입을 막고 있는 마시멜로를 한 움큼 물었다. 그와 동시에 계속해서 잔소리를 하려던 한세아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밀어냈다.
"허윽, 후우···. 어휴, 이제 좀 살겠네. 세아씨,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나는 참았던 숨을 들이쉬며 한세아를 바라보았다. 입을 살짝 벌린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새하얀 살결에 잇자국이 살짝 남은 것이 보인다.
"······그, 방금 문 것도 잘못했습니다. 수, 숨을 쉴 수가 없어서···."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확 와 닿았다. 뺨을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수준.
"아, 아니에요···. 제가 그 생각을 못 했어요···."
한세아는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였다. 뿔난 한세아는 사라지고 어느새 순하게 변한 그녀만 남았다.
순식간에 어색해진 분위기.
"······."
"······."
나와 한세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누구 것인지는 몰라도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린다.
부스럭-
묘한 분위기에 자는 척을 하는 지수가 괜스레 뒤척거린다.
바로 그때.
꼬르륵···
공복을 참지 못한 위장이 아우성쳤다. 체력 소모도 엄청났고, 오늘 하루 제대로 먹은 것이 없으니 배가 고픈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킥."
옆에서 작게 들린 지수가 웃음을 겨우 참은 소리. 한세아는 듣지 못한 것 같지만, 나에게는 똑똑히 들렸다.
'···웃어?'
나를 외면한 것도 봐주고 있는 중인데 지수는 한술 더 떠서 비웃기까지 했다.
이대로는 괘씸해서 못 참는다.
기쁨은 나누면 2배, 고통은 나누면 절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도 그 말을 실현할 때가 온 듯했다.
하지만.
"현우씨! 배고프시죠? 제가 얼른 밥 가져올게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치는 한세아에 의해 내 뜻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녀의 격한 몸짓을 따라 가슴이 크게 출렁인다.
"제가 없다고 막 움직이면 안 돼요! 가만히 있어야 해요, 알았죠?"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얼굴이 잔뜩 붉어진 한세아는 이내 그 말을 끝으로 방문 밖으로 나가 사라졌다.
달칵!
살며시 닫히는 숙직실 문.
"···갔나?"
나는 그 문을 잠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갔어. 확실해."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귀를 쫑긋 세우며 지수가 확답을 내려주었다.
천연덕스럽게 대화의 물꼬를 튼 그녀가 여전히 괘씸했으나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나는 어른이니까.
"지수야, 너 좀 너무하다. 거기서 나를 모른 척해? 까딱하면 숨 막혀 죽을 뻔했구만."
아니, 지금만큼은 나는 어른이 아니다.
"···아저씨는 몰라. 나 세아 언니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 줄 처음 알았잖아. 그리고 나는 이미 아저씨가 자는 동안 실컷 혼났단 말이야. 나만 혼자 당할 수 없지."
"세아씨가 어떻게 혼냈길래?"
"몰라, 기억도 잘 안나. 그냥 눈이 무서웠던 것만 기억나."
지수는 당시 기억을 회상하는 듯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떨림은 꼬리까지 퍼져 꼬리털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한세아의 눈이 무서웠다는 말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기는 했으니까.
자주 보여주는 모습은 아니더라도 간혹 한세아의 눈이 변할 때면 변명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합죽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나만 그런 줄 알았건만. 지수도 그랬다는 말에 동질감이 느껴졌다.
"아무튼 엄청 화났었다니까? 예린이도 도끼눈을 뜨고 옆에서 같이 바라보는데 할 말이 없더라."
그야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없다. 최대한 조용하게 침입했다가 후퇴한다던 사람들이 캠프를 뒤집어 놓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나도, 지수도, 한세아도, 예린도.
심지어 여기 캠프 생존자들 중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더기 변종도 죽이고, 박현일도 해치웠다는 사실에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만약 내게 푸른 조각이 없었더라면, 심장이 고쳐지지 않았더라면, 이곳이 물류 창고가 아니었더라면, 신아현의 넝쿨이 없었더라면 당하는 건 나와 지수가 되었겠지.
위의 조건들이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은 상태였다면 우리가 이길 수 있었을까?
답은 확실하게 '아니오'였다.
그만큼 변종들을 상대하는 것이 까다로웠고, 우리가 이긴 것이 기적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너 몸은 괜찮아?"
나는 고개만 살짝 돌려 지수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처음 기절했을 때만 해도 지수는 매우 큰 고통을 느꼈었으니 말이다.
"한숨 자고 나니까 많이 나아졌어. 자잘한 상처는 벌써 나았는데 갈비뼈 금간 건 아직이더라. 아, 멍도 좀 남았네. 그래도 회복 속도가 엄청 빨라져서 금방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아저씨는?"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는 지수의 말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도 괜찮아. 가슴은 여전히 욱신거리지만."
"···빨리 낫는 건 좋지만. 역시 몸이 이렇게 변한 건 푸른 입자 때문이겠지?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거든."
그녀의 말대로, 지금 나와 지수가 빠른 회복을 보여주는 이유는 푸른 입자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컸다.
푸른 입자는 이적을 사용하게 해주는 것뿐만이 아닌 각종 신체 능력을 향상시켜 주기도 하니까.
그 덕분에 변종의 묵직한 공격에도 어떻게든 버텨 낼 수 있었고.
그게 아니었더라면 내 몸을 진작에 터져 육편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겠지. 아, 지수야. 너 눈 이제 안 빛나네?"
고개를 주억거리던 와중에 문득 든 위화감. 그것은 날 보고 있는 지수의 눈이 더 이상 빛나지 않아서 생긴 느낌이었다.
바로 그때.
"자고 일어나니까 그렇더라. 그때 잠깐-."
지수는 꼬리로 바닥을 탁탁치면서 말을 잇다가 귀를 쫑긋거리더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다시 뒤집어썼다. 그녀는 하나의 이불 뭉치가 되었다.
"······?"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왜 말을 하다 말고 이불 속에 숨는 것인가. 그러한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해소될 수 있었다.
저벅- 저벅-
문 너머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벌컥-
한세아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그녀의 손에 들린 쟁반에는 참치캔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탑의 머리를 장식하는 것은 실한 계란 2알.
"제가 당부한 대로 가만히 누워서 쉬고 계셨죠, 현우씨?"
"넵."
"좋아요. 그래야 착한 아이죠."
"···넵."
얌전히 대답하는 나를 보며 웃던 한세아는 음식이 담긴 쟁반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참치캔 탑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설마 이걸 나 혼자 다 먹으라고 가져온 것은 아니겠지. 마침 저녁 시간대이니 다 같이 나눠 먹으려고 넉넉하게 가져온 것일 터다.
그래야만 한다.
"그, 양이 좀 많은데요···."
나는 작게 항변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다 먹을 수 있어요. 다 먹어야 하고요. 남기면 혼날 줄 알아요."
한세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숟가락을 들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곧장 고개를 돌려 이불과 하나가 된 지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지수씨도 잠 깬 거 아니까 일어나서 밥 먹어요. 계속 자는 척하면 혼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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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렁이애호가]님이 그려주신 한세아 팬아트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