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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167화 (168/497)

Chapter 167 - 167. 부탁 (2)

"저는 분명 일어나라고 했어요. 하나, 둘, 셋━"

한세아는 별다른 말 없이 숫자를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이, 일어났어요!"

지수는 다급하게 이불을 내리며 외쳤다. 그녀의 귀는 기가 죽은 듯 앞으로 접혀 있었다. 확 젖혀진 이불을 통해 드러난 지수의 꼬리는 다리 사이로 말려들어가 있었다.

뒤이어.

"으응···."

예린이 눈가를 비비며 일어났다. 지수 옆에 곤히 자고 있던 예린이었으니, 지수가 움직인 탓에 잠에서 깬 것이리라.

"예린아, 잘 잤어? 마침 잘 됐다. 일어난 김에 너도 밥 먹고, 지수씨한테 밥 좀 먹여줄래? 언니는 현우씨 돌볼 테니까."

"네에."

한세아의 말에 예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세아에게 참치캔 4개를 건네 받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어, 언니. 저 더 먹으면 배 터질지도 몰라요. 아까 너, 너무 많이 먹어서 지금도 소화가 아직···."

지수는 인당 1개도 아닌 2개씩 배분된 캔을 보고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손으로 입을 막기까지 하는 그녀.

그러고 보니 지수는 나보다 먼저 눈을 떴으니 이미 식사를 마쳤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 반응을 보니 아주 배터지게 먹은 모양이다.

"지수씨, 참치랑 계란이 뼈에 좋대요. 조각이 있었다면 죽으로 만들어 왔을 테지만, 부서졌다고 하니 어쩔 수 없잖아요. 그냥 캔으로 먹는 수밖에. 계란은 억지로 먹이지 않을 테니 캔이라도 많이 먹어야죠."

"맞아, 언니! 아프면 안 좋으니까 빨리 나아야지! 오빠도!"

"지금 여기처럼 물자가 풍부한 곳이 또 있을 것 같아요? 응급 의약품도 많아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현우씨랑 지수씨 치료하는데 쓴 붕대랑 연고만 해도 만만치 않아서 허덕였을걸요? 그러니까 둘은 편하게 쉬면서 많이 먹기만 하면 돼요."

"맞아요! 많이 먹고 많이 자야 해요!"

"마음 같아서는 움직일 수도 없게 꽁꽁 묶어두고, 제가 원하는 대로 키우고 싶은 걸 참고 있는 거니까."

"맞···나? 힉! 아니, 맞아요!"

열심히 맞장구를 치던 예린은 뭔가 이상한 걸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도 잠시, 헛숨을 들이키며 황급히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두 개 말고 하나만 먹을게요. 다 먹으면 저 진짜 죽어요, 언니."

"알았어요. 너무 과하게 먹는 것도 몸에 무리가 가니까. 하나라도 먹어요."

"···네."

한세아가 이러는 이유가 다친 나와 지수를 걱정해서 그러는 것을 알기에, 지수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필연적으로 나오는 부서진 조각에 대한 이야기에 나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비록 한세아가 괜찮다고 말해주기는 했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렇게 간단하던가.

일행의 화기를 책임져 주던 푸른 조각은 차가운 캔을 먹을 때마다 생각날 것이다. 당장 나조차도 아쉬움을 느끼고 있건만.

내가 무심코 침음을 흘렸을 때.

톡!

미간을 가볍게 건드리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현우씨, 또 이상한 생각했죠. 조각 때문에 그래요? 신경 쓰지 말라니까요. 푸른 조각 아니었으면 현우씨 큰일 날 뻔했다면서요. 그럼 오히려 상황에 맞게 잘 쓰인 거죠."

"그래도 아쉽잖아요."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 조용히 하고 같이 밥 먹어요. 정 신경 쓰이면 현우씨가 나중에 몸으로 갚으면 되잖아요?"

한세아는 마지막으로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지른 다음, 들고 있던 참치캔의 뚜껑을 조심스레 땄다. 순간 확 퍼지는 기름진 냄새에 위장이 아우성쳤지만, 나는 멍한 얼굴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예?"

방금 뭐라고 했지? 몸으로 갚아? 뭘 어떻게?

"조각이 없더라도 현우씨 이제 푸른 입자 사용할 수 있다고 하던데요. 그걸로 저희 지켜 주면 되잖아요.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 현우씨 도와주고."

색이 돌아온 눈망울을 보이며 말을 잇는 한세아.

"아."

"뭐예요. 그 반응은. 이상한 생각한 거 아니죠?"

그녀는 이내 눈초리를 부드럽게 휘며 장난스레 웃었다.

"···아닙니다."

나는 살짝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주홍빛이 낯빛을 숨겨 주기를 바라면서.

"에이, 맞는 것 같은데요?"

"아니라니까요."

"정말요?"

"네, 정말로."

"흐응···."

한세아는 비음을 흘리더니 작게 킥킥 웃었다. 그녀는 참치를 듬뿍 든 수저를 내게 내밀며 대화의 종료를 알렸다.

"알았어요, 믿어 줄게요. 자, 아- 하세요."

내가 알아서 먹겠다는 말은 어차피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나는 얌전히 입을 벌렸다.

입 안을 채운 참치를 우물거리며 먹고 있을 때, 한세아가 슬쩍 지수를 바라보더니 내게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했다.

"···근데요, 현우씨. 저는 현우씨가 생각한 것처럼 갚는 것도 좋아요."

"푸흡-! 콜록! 콜록!"

순간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는 것과 동시에.

"언니!"

지수가 꼬리털을 곤두세우며 빽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예린이가 떠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중이었는지 입가에 참치 부스러기가 붙어 있었다.

"······아."

예린은 바닥에 떨어진 큼지막한 참치 덩어리를 보며 허망한 소리를 냈다.

"아직 3초 안 지났어···."

무엇보다 음식을 아까워하는 예린은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참치를 홀라당 집어먹었다. 참, 야무지게도 씹는다.

"현우씨, 여기 물 마셔요. 다들 반응이 왜 그래요?"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한세아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의 가슴과 단발이 작게 흔들린다.

"······."

말없이 도끼눈을 뜬 채 으르릉 거리는 지수.

"알았어요. 장난 안치면 되잖아요. 얼른 마저 먹어요, 지수씨."

한세아가 확답을 내리고 나서야 지수는 예린이 내미는 숟가락을 입에 물었다. 그러면서 시선은 나와 한세아에게 떼지 않았다. 아주 집요한 시선이었다.

톡- 톡-

"자, 다시 아- 하세요."

한세아는 철부지 아이의 입가에 묻은 것을 닦아주듯 내 입가를 닦아준 다음, 식사를 이어 나갔다.

우물우물-

얼추 캔 하나를 넘어 두 개째를 다 비워갈 때쯤, 한세아가 계란 2알을 내밀면서 말했다.

"이것도 먹어야 해요. 아까 제가 말했죠? 계란이 뼈에 좋다고 한 거."

묘하게 따끈따끈해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일까. 점성있는 액체가 묻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헤헤, 낳은 지 얼마 안 됐어요. 아직 따뜻해요."

"······."

물기가 있는 건 내가 잘못 본 것이지만, 온기가 있다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죽에 들어간 하나의 재료가 아닌 날로 먹어야 하는 식재료로 보게 되니, 괜스레 마른침이 삼켜졌다.

기분이 묘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한세아는 볼을 붉게 물들였다. 언뜻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엄청 신선하다구요. 제가 껍질 깨서 줄 테니까 그냥 후루룩 마셔요. 원래 익힌 것보다 날계란이 더 영양이 많대요."

그야 신선하겠지.

낳은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한세아의 말마따나 영양도 많을 것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이런 세상에서 신선제품을 구한다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고.

그러니 단순히 기분이 이상하다는 것만으로 거부해서는 안 된다. 몸을 빨리 회복시키려면 충분한 영양 섭취가 필수이니 말이다.

···비록 지수는 한사코 거부했지만,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탁-!

한세아는 망설임 없이 껍질을 두드려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을 비어 있는 캔에 담았다. 투명한 흰자와 알차게 뭉친 노른자가 보인다.

꿀꺽-

옆에서 들리는 군침 삼키는 소리. 고개를 돌리니 예린이가 달걀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예린이는 현우씨가 다 나으면 먹자. 지금은 양보하고. 알았지?"

"네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예린. 결국 아이는 계란을 포기하고 다음 목표물인 참치를 찾아 퍼먹기 시작했다.

"얼른 먹어요, 현우씨. 모자라면 제가 더 노력해 볼 테니까······."

한세아는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은연중에 배를 쓰다듬으면서 하는 말에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알은 한세아가 낳으니 그녀가 노력한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문득 뜬금없이 생각나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에 대한 의문. 그러나 그건 별 의미가 없었다. 지금은 한세아가 있어야만 계란이 생기니까. 그것도 무정란으로.

"···잘 먹겠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먹어야 하는 상황이기에 나는 눈 딱 감고 입에 털어 넣었다. 참치 기름과는 다른 고소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히히, 잘했어요. 참치 더 먹을래요? 더 까줄까요?"

먹는 것이 보기 좋다는 듯 밝게 웃는 한세아.

"아뇨, 배 부릅니다. 이제 배도 채웠으니 슬슬 세아씨 이야기도 듣고 싶은데요. 저희 이야기는 지수한테 다 들었죠?"

나는 정중히 사양했다. 더 먹었다가는 소화 불량에 걸릴 것 같았으니.

"네, 아주 그냥 신나서 이것저것 이야기하던데요. 다친 사람을 본 저랑 예린이 기분이 어떤지도 모르고."

"제가 언제 신나서 그랬어요···!"

"거짓말! 언니, 아파하면서도 막 말했잖아! 나도 능력이 생겼니, 뭐니 하면서!"

지수는 발끈하며 외쳤지만, 이어지는 예린의 일갈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래서 많이 혼났는데···. 이제 능력도 안 써지고···."

지수는 귀를 축 늘어트리며 풀이 죽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어쩐지 지수가 한세아를 많이 무서워하더라니 그런 뒷일이 있었다.

하긴, 잔뜩 걱정한 사람들 앞에서 무용담을 자랑스레 늘어놓는 것만큼 눈치 없는 행동은 없긴 하지.

'덕분에 내가 좀 덜 혼난 건가?'

아무튼 이대로 두었다가는 지수가 삐치겠다는 생각에 나는 대화 중간에 끼어들었다. 짝 손뼉을 치자 지수, 한세아, 예린의 이목이 내게 집중된다.

"세아씨, 여기 올 때 어땠어요? 하수도 위험하지 않았습니까?"

"음, 위험한 건 없었어요. 여기 캠프 사람들이 오면서 청소한 건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시라고 하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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