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8 - 168. 부탁 (3)
"그래요?"
"네, 냄새나고, 어둡고, 빗물이 콸콸 흐른다는 것만 빼면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 라.
나는 한세아의 도움을 받아 벽에 기댄 채로 생각했다.
분명 하수도 안에는 뉴트리아 변종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내가 들은 건 캠프 생존자들이 왕복을 했을 때도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내용.
한세아와 예린이 안전하게 올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인 일이었으나, 그냥 넘어가기에는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세아 언니, 공동 지나가긴 했죠? 거기에 쥐떼 없었어요? 물이 잔뜩 고이는 곳 말이에요."
지수가 몸을 부르르 떨며 물었다. 하수도를 통과할 당시 거대 뉴트리아에게 쫒겼던 상황을 회상한 듯했다.
"아, 사다리 무너진 곳 말하는 거면 거기 지나쳤죠. 덕분에 옷이 푹 젖은걸요. 예린이는 제가 업어서 그나마 괜찮았지만. 근데, 쥐떼라···."
한세아는 침음을 흘리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그런 건 하나도 못 봤어요. 굳이 제일 이상한 걸 꼽으라면 검은 이끼 정도? 그치, 예린아?"
"네! 이끼 이상해! 이상한 소리도 났어요! 쀽! 쀽!"
살랑거리는 지수의 꼬리를 멍하니 보고 있던 예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군요. 뭐, 어찌 되었든 무사하게 도착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세아씨. 예린이도."
나는 잠시 상념을 밀어 두고 늦은 인사를 전했다. 우리 일행이 다시 한 자리에 모이게 된 날이지 않은가. 비록 떨어진 시간 자체는 24시간도 안 되었지만, 그와 별개로 반가운 것은 반가운 것이다.
"현우씨랑 지수씨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그럼 밥도 다 먹었으니 둘 다 진통제 두 알씩 먹어요. 아까 보니까 계속 앓는 소리 내더라고요. 먹어두면 좀 편할 거예요."
한세아는 알약과 함께 생수 한 병을 내밀었다. 예린이도 눈치껏 움직여 지수에게 똑같이 건넸다.
"···뭐 해요? 안 받고?"
순간 손을 내밀다 만 내게 한세아가 재촉한다.
"아, 네네."
나는 일단 그녀에게 알약을 받았다. 계속 알약을 들고 있게 하는 것도 안 될 노릇이니까.
'설마 또 먹고 피 토하지는 않겠지.'
예전에 누나가 준 알약을 먹고 기절한 적이 있었기에 묘하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그럴 줄은 누나도 몰랐던 모양이고, 한세아가 준 것은 단순히 진통제이지 않은가.
꿀꺽-
나는 날계란을 마셨을 때처럼 눈 딱 감고 입에 털어 넣었다. 당연하겠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목을 타고 넘어가는 알약의 느낌만 들 뿐.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식사와 약 먹는 것도 마친 나와 지수는 예린과 한세아의 도움을 받아서 간단하게 세안을 마칠 수 있었다. 물을 끼얹는 목욕을 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니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만 했지만.
격한 움직임은 부상을 악화시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 이제 그만 잘까요? 자는 것도 중요하니까 안 졸려도 일단 누워요. 예린이는 지수씨 좀 눕혀줄래?"
"네!"
한세아와 예린은 그 말을 끝으로 각자 맡은 사람을 매트리스 위에 눕혔다. 반론은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움직임이었다.
어느새 해는 산 뒤로 넘어가고 빈자리를 달이 채우고 있었다.
내가 너무 늦게 눈을 뜬 건지, 생각보다 씻는 게 오래 걸린 건지 시간이 꽤 흘렀나 보다. 천천히 밥을 먹은 것도 한몫했을 것이고.
푹-
등에 닿는 두터운 이불.
매트리스 위에 푹신한 이불도 깔아 놓으니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포근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은 옆에서 느껴지고 있는 따뜻한 체온 덕분일까.
그것도 잠시.
"끄응···."
뒤늦게 느껴지는 욱신거리는 상체, 이상하게 불편함이 느껴지는 자세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것은 나란히 누운 지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바닥에 닿는 꼬리 탓에 이도 저도 못한 채 움찔움찔 떨고만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냥 참아야지.
빨리 낫는 수밖에 없었다.
"신아진씨 상태는 좀 나아졌던가요?"
나는 지수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는 한세아에게 물었다.
"그럼요. 그 사람은 벌써 훌훌 털고 일어났어요. 현우씨도 알다시피 현우씨가 푸른 불로 아진씨에게 붙은 검은 입자를 제거해 줘서 나은 거예요. 아니었으면 같이 못 왔을걸요."
기억난다.
푸른 입자 없이 검은 입자에게 상처를 입게 되면 그 상처는 낫지 않는다.
그것이 박현일을 한때 캠프의 대장 노릇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벌'의 정체. 약을 아무리 발라도, 붕대를 아무리 감아도 멎지 않는 피는 결국 부상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까닥하면 나와 지수도 그 꼴을 면치 못할 뻔했다.
정말이지, 푸른 입자를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한없이 가혹해지는 세상이다. 그만큼 불합리한 세상이고.
"누더기 변종이랑 그 남자 시체는 여기 사람들이 책임지고 감시하고 있어요. 무슨 작은 변화라도 생기면 곧장 달려와서 알려주겠다고 했으니까 오늘은 안심하고 푹 자요."
팔뚝을 톡톡 손으로 두드리는 한세아. 일정한 박자로 움직이는 손길에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느껴진다.
지수와 예린은 벌써 꿈나라로 떠난 듯했다. 어느새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들려오고 있었으니. 나를 빤히 바라보던 한세아도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모두가 잠에 빠진 상태. 다만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한창 해 질 녘에 정신을 차리지 않았던가. 내 아침은 이제 시작이었다.
마침 생각할 거리도 많으니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어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하수도에 존재하던 뉴트리아 변종의 실종.
나와 지수가 지나갔을 때와 캠프 생존자들이 지나갔을 때와 무슨 차이가 있길래 쥐떼들이 사라진 것일까.
똑같이 어둡고,
똑같이 냄새 나고,
똑같이 물이 흐르고.
무엇 하나 바뀐 점이 없건만.
'······가만.'
바뀐 점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명백하게 바뀐 점이.
물.
하수도에 흐르는 물이 바뀐 것이다.
새벽에 내린 거센 소나기가 아스팔트 도로 위에 물을 고이게 했고, 그런 물은 도로 곳곳에 산재한 맨홀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도로 위에는 누더기 변종이 쏟아낸 내장과 검은 체액들이 한가득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푸른 불을 두른 주먹으로 놈의 복부를 꿰뚫는 것과 동시에 온갖 내장들이 내 위로 쏟아졌으니 잊을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곰곰이 생각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추론은 누더기 변종의 체액에 의해 쥐떼들이 놀라 달아났다는 것이다.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그것이 단순하게 뉴트리아 변종들을 쫓는 역할만 했냐는 것.
변종이 흘린 체액이니 그 안에 당연히 검은 입자들이 담겨 있을 테고, 뉴트리아 변종들 또한 검은 입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니 무슨 변화가 생길 수 있지 않나, 라는 의문이 들었다.
무시무시한 누더기 변종의 냄새를 맡은 쥐떼들이 지레 겁먹고 도망가기만 했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지하 터널의 도롱뇽 변종들처럼 또 다른 돌연변이가 생기게 된다면.
'···여기 사람들은 감당 못해.'
처음에야 대처할 수 있겠지. 그러나 언제까지고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지하를 점령한 뉴트리아 변종들은 굳건한 컨테이너 벽을 통과하지 않고, 아래에서부터 공격을 시작할 테니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안전했던 캠프는 삽시간에 지옥으로 뒤바뀌고 말겠지.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러니 내 몸이 얼추 회복되어 움직일 수 있는 대로,
푸른 입자를 만들어 내는 심장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대로.
아예 입구를 봉쇄 해 버리든, 푸른 불길로 통로를 뒤덮든 해서 하수도를 한번 청소해야 할 것이다. 물류터미널에는 어린아이들까지 있으니 꼭 해야 할 절차였다.
다음은━
"현우씨, 자요?"
불쑥 한세아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눈만 감았지 잠에 들지는 않았나 보다.
"저는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세아씨야말로 안 주무십니까? 많이 피곤하실 텐데."
"저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내가 말하라는 듯 눈을 치켜뜨자, 한세아가 말을 이었다. 뭔가 그녀에게 감도는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건 내 착각일까. 조금 전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으니 내 착각이 분명할 것이다.
"있잖아요···."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뜸을 들이는지, 말을 흐리는 한세아. 그녀는 이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여자 누구예요?"
여자? 누구?
"예? 여자요?"
나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여기서 갑자기 여자 이야기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도 그럴게,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한세아의 눈빛이 까맣게 죽으면서 목소리가 서슬 퍼렇게 변할 줄은.
"저랑 예린이가 오기 전까지 현우씨 돌보고 있던 여자 누구냐고요. 아주 그냥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요. 제가 들어오니까 화들짝 놀라면서 도망간 여자, 그 뒤로 코빼기도 안 보이는 여자. 누구예요."
"아."
나는 한세아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나와 지수를 돌보던 여자라고 하면 한 명밖에 없었다.
이예솔. 붕대를 꼼꼼하게 감아주던 사람 말이다.
"아? 아아? 그래서 누구냐니까요?"
한세아는 내 반응이 답답한지 답을 채근했다. 그녀가 좀 더 가까이 훅 다가왔다.
"그, 이예솔이라고 하는데···."
"어쭈, 이름도 알아요?"
"아니, 세아씨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분 간호사이셨대요. 그래서 그 사람이 저랑 지수 응급처치 해준 겁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나는 진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해야 하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억울할 뿐이었지만. 본능이 시키는 대로 입을 놀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으니까.
"맞아, 신아현씨! 아현씨가 그래서 일부러 이예솔씨 붙여 준 거예요. 저흰 환자고, 그 사람은 의사는 아니더라도 간호사였으니까!"
"흐응···."
한세아는 더 말해 보라는 듯 비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끝인데요? 더 없어요. 진짜입니다."
"그럼 그 여자가 왜 현우씨를 그렇게 바라봤는데요."
"아니, 전 세아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짜 억울한데요. 자고 있어서 기억도 없어요."
나는 있는 힘껏 억울하고 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흐음···. 뭐, 믿어 드릴게요. 난 또 하나 더 늘어나는 줄 알았잖아요. 지금 암캐 하나만 해도 충분히 벅찬데."
···암캐?
만약 지금 상황에서 그것이 지수를 이르는 말이라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감이 좀 그렇지 않은가.
매번 생각했던 점이기에 나는 이번에야말로 한세아에게 그런 말은 하면 안된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그럼 현우씨, 저 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같이 해볼래요?"
이번에도 한세아가 불쑥 말을 건넸다.
"뭘요?"
다만 이번에는 내가 가진 약간의 잠 기운과 억울함을 송두리째 날려 버릴 말이었다.
"······유정란 만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