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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169화 (170/497)

Chapter 169 - 169. 부탁 (4)

"······."

나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입술만 달싹거렸다.

귀를 의심케 하는 말. 그러나 귀에 똑똑히 들린 말.

오늘따라 달은 왜 이리 밝은지.

창문을 투과하는 달빛이 방 안을 희미하게 밝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세아의 얼굴도 밝게 비추고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한세아. 그녀는 답을 채근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그러한 모습과는 달리 아니, 오히려 그런 모습이기에 답을 주기 전까지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 와 닿았다.

"···그, 세아씨. 제가 잘못 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제대로 들었으면서. 해 보자구요. 유정란 만들기."

곧바로 치고 들어오는 한세아에 의해 좌초되고 말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현우씨도 알잖아요. 제가 현우씨에게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아니, 사실 몰라도 상관없어요. 모르면 제가 알려주면 되는 거니까. 알 때까지 계속."

"······."

"세상천지 어떤 여자가 함부로 남자를 따라다니고, 위험하게 남산으로 올라가는 여정을 따라가요? 물론, 그 이면에는 세상을 되돌린다는 큰 뜻이 있기는 하지만, 죄송해요. 저는 그렇게 대단한 여자는 아니에요."

"······."

"좀 심하게 말하자면, 솔직히 세상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저는 현우씨 하나만 보고 온 거니까."

한세아는 내가 부담이 가지 않는 선에서 상체를 내게 기대왔다. 피부끼리 맞닿아 있는 곳에서 쿵쿵거리는 맥박이 전해져 온다.

"현우씨."

떨리는 눈으로 나를 부른 한세아.

"당신이 좋아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수줍게 자기 속마음을 전했다. 그동안 내가 애써 외면했던, 모른 척 했던 마음을.

갑작스러운 고백이었지만, 사실 언제고 일어날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나는 그렇게까지 눈치 없는 놈이 아니다.

한세아는 이것저것 챙겨 주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 탓에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세아의 태도를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와 사소한 행동하나마저도 단순히 동료를 대하는 수준을 넘었다는 걸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무 말없이 있었던 까닭은.

내가 어떻게 될지 몰랐으니까.

이 여정이 성공할지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만약 성공한다고 해도 그 끝에 내가 살아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문제는 한세아가 아닌 나에게 있었다.

비겁하고 이기적인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내 착각이라 할지라도.

만약 감정적인 혹은 그 이상의 교류를 나눈다면 그것은 내가 가진 목표를 달성한 그 이후다, 라고 말이다.

피임 도구가 있다고 해도 절대라는 건 없었으니까.

우스갯소리로 유정란이니 뭐니 했어도 아이가 정말 생기고 만다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해온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한세아의 말을 들은 이상 지금과 같이 멍청하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도 안되고.

"···감사합니다, 세아씨. 저 같은 놈을 좋아해 주셔서."

그리 생각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미안합니다. 아직, 아직은 안 돼요."

한세아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듣다가 이어지는 내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한숨을 폭 쉬면서.

"······그렇겠죠. 뭐,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요."

"아니, 세아씨가 싫다는 게 절대로 아니라···."

나는 한세아가 가진 오해를 풀기 위해 재차 입을 열었지만.

"알아요. 연구소 일이 해결되기 전에는 못 받아 준다는 거요."

그녀는 이해한다며 손가락으로 내 입을 눌러 말을 막았다. 한세아의 얼굴 구석에는 어쩐지 약간 후련한 감정이 숨어 있었다.

"제가 예전에 말한 적 있죠? 현우씨는 얼굴에 다 티가 나요. 혼자 끙끙 앓는 게요."

기억난다. 내가 속으로 좋지 않은 생각하고 있을 때마다 한세아가 다가와 위로해 주었었지.

내 딴에는 최대한 숨긴다고 숨긴 것이건만. 매번 들키는 걸 보니 그다지 의미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그렇다.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해요. 괜한 말로 현우씨를 괴롭힌 것 같아서. 그냥 뭔가 지금이 아니면 진짜로 여정이 끝날 때까지 말 못할 것 같더라구요. 당장 여기만큼 안전한 곳도 앞으로 없을 거구···."

한세아의 말대로, 위로 올라갈수록 멀쩡한 건물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건 자명했다. 군대가 파괴한 건물들도 있을 것이고, 지진 같은 천재지변에 의해 무너진 곳도 있겠지.

더 나아가면 무시무시한 변종들에 의해 지형 자체가 변형된 지역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어디 그것이 내 뜻대로 되던가.

"그래서 그런가. 저도 모르게 조금 조급했나 봐요. 오늘 본 여자도 신경 쓰이고, 현우씨랑 지수씨가 목숨 걸고 싸우고 있을 때 아무런 도움을 못 줘서 신경 쓰이고. 이러다 쓸모없다고 두고 가는 건 아닌가 해서 다 자는 시간에 말해 버렸네요."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쇼. 누누이 말하지만 세아씨는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럼 다행이지만요. 아무튼! 속은 시원해요. 아무것도 모르고 자는 지수씨에게는 미안하지만!"

긴장한 몸을 풀려는 듯 쭉 기지개를 피는 한세아.

"현우씨, 고백한 건 제가 처음이죠? 제가 싫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그것도 잠시, 한세아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밝은 달빛이 비치는 흑빛과 적빛이 오묘하게 섞인 눈동자에는 내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네. 처음입니다. 전부 다요."

"흐흥, 제가 어디가 좋아요?"

"세아씨는 제가 왜 좋은데요?"

"제가 먼저 물었잖아요! 역질문 금지!"

"···으음."

한세아는 매력적인 여성이다. 사근사근거리는 말투와 남을 잘 챙겨 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호감을 사기 좋다.

그리고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한다면.

'역시 가슴이···.'

나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가슴으로 향하는 시선을 막지 못했다. 황급히 눈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그런 움직임마저 한세아에게 포착되고 말았다.

"···음흉해요!"

손으로 가슴팍을 가리며 작게 외치는 한세아. 활짝 핀 손으로도 그녀의 소담한 가슴은 숨겨지지 않고 옆으로 밀려나 여전히 제 존재감을 알렸다.

"······그, 이건 남자의 본능 같은 거라···. ······미안합니다."

나는 다시 한번 시선이 가려는 걸 필사적으로 막으며 말했다. 변명을 이어가려던 나는 지금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든 간에 구차하게 보일 것이라는 걸 깨닫고 사과를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대로 상황이 마무리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이게 좋아요? 에잇! 에잇!"

한세아는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으로 상체를 내게 이리저리 문질러 댔다. 말캉말캉한 촉감이 옴짝달싹도 못하는 나를 자꾸만 자극했다.

"하, 하지 마세요."

단호하게 밀어내기 위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건만, 나오는 목소리는 왜 이렇게 떨리는지. 누가 보면 추행이라도 당하는 줄 알 것이다.

"풋. 아까는 제 가슴도 크게 물어 놓고는, 이건 부끄러워요? 그때 제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알아요? 이거 봐요.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그건 바로 사과했잖습니까···. 숨 막혀 죽을 뻔했다고요."

"그건 모르겠고, 이 자국 좀 보라니까요?"

한세아는 날 놀리는 것에 재미 들렸는지 자꾸만 도발하며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자꾸 그러면 저도 안 참아요. 진짜로요."

나는 짐짓 화가 난 듯이 경고를 날렸다. 이쯤 되면 장난을 멈출 법도 하지만 한세아는 오히려 되물어왔다.

"······안 참으면요? 어떡할 건데요?"

말문이 턱 막혔다.

어떡하기는 뭘 어떡해?

그냥 이대로 눈 감고 자는 거지.

"현우씨."

나지막하게 나를 부르는 한세아.

"역시 할래요? 유정란 만들기."

이제 보니 참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한세아였다. 정확히는 나뿐만이 아닌 그녀도 참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집요하게 내 눈을, 입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을, 나를 쫓고 있었으니까.

꿀꺽-

서로의 숨소리만 들리는 방 안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기껏 침을 삼켰어도 목이 탄다. 입안이 바싹 마른다.

이 이야기는 내가 한세아의 마음에 대한 답을 미룬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니던가.

확실하게 끝맺은 건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여정이 끝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고 정한 것이 아니던가.

"아, 안 됩니다. 이예솔씨가 격한 움직임은 부상을 악화시킬 수도━."

"그만. 다른 여자 이야기하지 마요. 그리고 그건 걱정 마세요. 처음이지만 제가 알아서 잘해볼게요. 그것도 아주 조용히. 현우씨는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요."

내 조잡한 회피는 어찌할 틈도 없이 한세아에게 가로막혔다.

"옆에 애들도 자고 있고···."

한세아도 처음이고, 나도 처음인 만큼 이런 곳에서 마음 편하게 움직이지도 못한 채 끝내고 싶지 않았다. 숙직실이 별로라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둘만 있을 때 뭔가를 했으면 싶었다.

여기는 바로 옆에 지수와 예린도 자고 있지 않은가.

"네. 자고 있죠. 아주 푹 자고 있어요. 어지간해서는 깨지 않을 정도로."

"···이상한 거 먹인 건 아니죠?"

"제가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보여요? 현우씨가 먹은 거랑 똑같은 진통제예요. 그냥 진통 효과만 있는 알약."

한세아는 내 의심이 속상하다는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몸을 일으켜 내 위에 올라타려고 했다.

이대로 가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라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부정할 수 없었다.

"세아씨! 자, 잠깐 멈춰!"

"······? 왜요. 싫어요."

한세아는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 멈추지 않고 내 골반 위에 자리를 잡았다. 부드럽게 하체를 누르는 그녀의 체중이 느껴진다.

"그, 저도 처음이니까 이런 건 나중에 다 끝나고 둘만 있을 때! 그때! 하는 게···."

"현우씨도 처음이에요?"

"네, 네! 그러니까 이런 경험을 지금 낭비하기에는 아깝잖아요? 처음은 좀 더 근사한 곳에서 하고 싶은 로망이 있거든요. 그리고 세아씨도 소중하니까 몸을 아껴야죠. 아까도 말했지만, 뒤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특히 아이는 더욱 그렇고요."

나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주저리주저리 이것저것 말했다.

"제가 소중해요?"

"당연합니다!"

━그렇구나, 하며 한세아는 히히 웃었다. 만족스러운 웃음이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나를 눈에 담았다.

"그럼 증거를 보여주세요. 오늘만 떼쓸 게요. 오늘만요. 현우씨 말대로 지금은 많은 걸 바라지 않을 테니까. 제 작은 부탁이예요."

그러다가 상체를 숙이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따뜻한 숨결이 스치며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지금 이 순간, 내 감각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 것들은.

세아의 열기 어린 자줏빛 눈동자,

볼에 달라붙은 적색 머리카락,

살짝 휘어져 올라간 입꼬리,

나 못지않게 붉어진 안색,

후우, 후우하는 가쁜 숨소리,

기대감을 품은 침이 꼴깍 넘어가는 목.

한세아는 내게서 무언가를 간절하게 갈망하고 있었다.

서로가 정한 선을 넘지 않는 정도의 무언가를, 혹여 무슨 일이 있더라도 황급히 정신을 차릴 수 있을 정도의 무언가를 말이다.

입술을 살짝씩 오물거리면서.

입술을 티나지 않게 깨물면서.

쿵- 쿵- 쿵-

빠르게 고동치는 심장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나는.

쪽-

바로 앞까지 다가온 한세아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아 내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정확히는 입술이었지만.

그리고 누가 볼 새라 무섭게, 미처 입술에 전해진 감촉을 즐기지도 못하고 황급히 떼어냈다.

"······."

"······."

버드 키스.

키스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었으나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라고 하지 않던가. 지금의 나에게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흐흣, 아하핫-."

한세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실실 웃었다. 귀에 닿을 정도로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즐거워 보였다.

"새는 현우씨가 아니라 전데 겨우 그거로 되겠어요?"

"···놀리지 마십쇼."

나는 작게 헛기침하며 불퉁하게 말했다. 기껏 사람이 용기냈건만, 돌아오는 반응이 이렇다니. 억울했다.

"현우씨, 이런 말 알아요? 달이 아름답네요."

"···달이요?"

영문 모를 소리에 멍하니 되물은 그 순간.

하웁!

"······!"

이번에는 한세아가 내 얼굴을 붙잡아 입술을 부딪혀 왔다. 그녀는 두 팔로 내 머리를 감싸며 거리를 완전히 좁혔다. 처음과 달리 사라지지 않는 푹신하고 말캉한 감촉.

서로를 담던 눈이 살며시 감기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세아의 눈동자에 비친 달은.

그녀의 말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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