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71화 (172/497)

Chapter 171 - 171. 정리 (2)

"흐아···, 어떻게 잘 넘겼네요."

한세아는 히히 웃으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녀가 나를 톡톡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게 누가 목에 흔적 남기래요? 제가 새벽에 먼저 일어나지 않았으면 진작 들키고도 남았을걸요? 모기가 있는 것도 아니니 벌레 물렸다고 할 수도 없고."

"······미안합니다."

할 말이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행한 것이긴 해도 그것이 붉게 핀 흔적을 지워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뭐, 나중에 스카프 주면 당장은 그걸로 만족하겠죠. 하지만 언제까지 냄새만으로 만족할지는 모르겠네요. 요즘 뭔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암캐라서 그런가. 그래도 그전까지는 독차지하고 있을래요."

어깨를 으쓱이는 한세아. 그녀의 말에 잠이 들기 전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크게 거창하거나, 별다른 말은 아니었다. 그냥 나중에 지수도 신경 써달라 이야기였을 뿐. 다만 단순히 동료로서 대해 달라는 어조가 아니었을 따름이었다.

'···어차피 지수에게 따로 할 말도 있으니까.'

지수는 상황이 일단락되었으니 그냥 넘어간 듯 보이나, 나는 한번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본디 이런 것들은 마음속에 하나씩 쌓이다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터지고 마니까. 사람들이 굳이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일들을 입 밖으로 꺼내어 대화하는게 이런 까닭이다.

백 번의 무언보다 한 마디의 말.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행동.

서로 감정의 골이 패이지 않게끔 충분한 대화와 행동으로 메우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 내가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나씩 털어놓는 과정은 당연히 부끄러울 것이다. 그야 부끄러울 수밖에 없지.

본디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행위 자체가 낯간지럽고 쑥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단순히 쑥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후회할 가능성을 남겨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은 지수가 몸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고, 이 캠프에 있는 동안 둘만 남은 타이밍에 슬쩍 말을 꺼내면 되겠지.

나는 그리 생각했다.

"일단 신아현씨가 있는 곳까지 부축해 드리고 전 돌아갈게요. 예린이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어른 보호자 한 명은 있어야 하잖아요. 이곳에 좀 더 지낼 것 같으니 방도 깔끔하게 청소해야 하고요."

한세아는 팔을 내 허리에 두른 채로 나란히 걸었다. 부축이라고 하기에는 찰싹 달라붙은 것에 가까웠으나 나는 굳이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지 않은가.

저벅- 저벅-

나와 한세아는 천천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로 속도에 맞춘 발걸음 소리가 겹쳐 들린다.

휘이이이···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에 선선한 공기가 담겼다. 제법 쌀쌀한 바람은 우리 사이에 틈이 없게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기 조심해서 내려! 겁나게 무거울 거여! 안전 장비 다시 확인하고!"

신아현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J동 창고 근처에 다다르자 활기찬 소란스러움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물류터미널 중앙을 차지하는 L동 창고를 기준으로 J동 창고는 좌측에 자리 잡은 큰 창고였다. 전체적인 바닥 면적은 L동과 얼핏 비슷한 듯했으나, 기본적으로 건물이 가진 층수가 크게 차이 나는 모습이었다.

"태민 아저씨! 지금 잡은 그거 중심 좀 잡아줘요! 이대로 들면 넘어질 것 같으니까!"

작동하지 않는 운송 장비를 대신해 넝쿨들로 무거운 물건들을 옮기고 있는 신아현. 그녀는 현장에서 한 발짝 물러나 생존자들이 다치지 않게 조율을 하는 중이었다.

아침부터 차근차근 남은 물자를 확인하며 필요한 것들을 골라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 터미널 사람들.

"···현우씨,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계속 말했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고 빨리 돌아와요. 알았죠?"

"걱정 하지마십쇼.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일 마치고 돌아가겠습니다."

무리보다 안정이라며 신신당부하는 한세아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는 이내 걱정되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수와 예린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신아현씨."

나는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한세아를 잠시 지켜보다가 신아현을 부르며 다가갔다.

"아! 현우씨!"

약간 피곤해 보이는 신아현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쉬는 시간! 다들 잠깐 쉬는 시간 가지고 있어요! 전 잠깐 자리 좀 비울게요. "

그녀는 작업 중지를 알리며 손을 흔들었다. 신아현의 말에 한창 물자 분류 중이던 사람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다가 어색하게 고개를 푹 숙여 왔다.

아직은 얼떨떨해 보이지만 그들 나름대로 감사를 표하는 것 같았다.

나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려던 찰나.

"뭐해요? 어서 가요. 그것들 사체 확인하려고 나오신 거잖아요? 맞죠?"

신아현이 내 손을 잡아끌며 맞은편에 있는 L동 창고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뒤로 넝쿨 한 줄기가 따라왔다.

"어제 세아씨가 진짜 급한 일 아니면 오지 말라고 해서 이제야 얼굴 보네요. 푹 쉬었어요?"

"덕분에 제대로 쉬었습니다. 근데 세아씨가 그런 말을 했었습니까?"

"네. 그래서 혹시 저희가 휴식에 방해될까 봐 어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조용하게 있었죠."

어쩐지 한세아가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하더라니, 그녀가 미리 수를 써서 그랬던 모양이다. 무작정 일을 낸 것이 아닌 계획대로 진행된 것이었다는 사실에 새삼 몸이 부르르 떨렸다.

"뭐, 저희도 애들 케어해야 하고, 다친 사람들 있나 확인도 해야 하니 딱히 거창한 일은 할 수 없었지만요. 그 외로 다 같이 모여 잘 곳도 찾아야 했고요."

-이제 보니 나름 정신없이 움직였네요.

신아현은 긴 숨을 내뱉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직원들이 쪽잠을 청하던 숙직실을 우리에게 양보한데다가 본래 지내던 곳인 L동 창고는 누더기 변종으로 인해 사용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잠은 자셨죠?"

나는 피로가 덕지덕지 붙은 그녀의 눈가를 보며 물었다. 난방이 되지 않는 것은 동일하나 우리 일행은 제대로 된 방에서 잤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뇨, 사체 감시하느라 밤 샜어요. 적어도 첫날은 제가 맡아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제가 지키고 있는 게 시간 버는 것이 용이하기도 하잖아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신아현.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 뭐라고 하지? 아! 현장보존! 그거 해놨어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으니 어제 모습 그대로일 거예요. 그것들 제대로 처리해 줄 수 있는 거죠?"

"네. 그건 걱정하지 마십쇼.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없애기 위해 이렇게 나온 거고요."

"휴···, 다행이네요. 어제 감시하는 동안 피곤해져서 그런가.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죽은 건 분명 확실한데 으스스한 분위기가 계속 느껴지는 게 진짜 소름 끼쳤다니까요. 아니, 시체라서 당연한 건가?"

신아현은 괜스레 소름이 오소소 돋은 팔을 쓸어내렸다.

아마 그녀가 느낀 것은 착각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그녀가 본 사체 아니, 정확히는 그 안에 잔재한 검은 입자가 흩뿌리는 불길함을 느낀 것이겠지.

그리고 일반 수인이 아닌 넝쿨을 조종할 수 있는 이능을 가진 신아현이었기에 확 와닿게 된 점도 있을 것이다. 비록 추측에 불과하지만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직접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끼긱···

나와 신아현은 바닥에 널브러진 각종 잔해들을 피해 누더기 변종의 사체 앞에 도착했다.

이리저리 뒤틀린 금속 선반의 파도.

죽었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탁하게 변한 동공.

커다란 입에서 홀로 빠져나온 검붉게 변한 혓바닥.

좌우로 벌어진 틈 사이사이에서 삐죽 튀어나온 새하얀 팔들.

창고 바닥에 응고되어 끈적하게 달라붙은 검은 체액 덩어리들.

대체로 내가 어제 마무리했던 것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다만 완전히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누더기 변종의 등 부분에 유해가 깊게 박혀 있던 부분이 우악스러운 손길에 의해 쥐여 뜯겨진 외형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러한 일을 한 사람은 지수였다.

그녀가 창고에서 쏘아졌을 때, 유해를 들고 박현일에게 곧장 박아 넣었으니 확실했다.

뜯긴 부위 주변에 전기라도 지져진 것처럼 검게 탄 부분들이 있는 것도 확신을 주는 것에 한몫했고.

"현우씨, 그대로 맞죠?"

"네, 맞아요. 다행입니다."

"바로 그놈 시체도 확인하실 건가요?"

"아뇨, 먼저 이것부터 최대한 처리하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가는 길이기도 하니까. 순서대로 정리하면서 가려고요."

나는 신아현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창고 중앙에서 박현일의 시체가 있는 곳까지 곧장 보였으니 혹여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빠르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까닭이다.

변종이 흘린 체액과 내장을 하나도 빠짐없이 불태워야 하므로 괜히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각을 잡고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이제 불로 막 전부 불태우는 거죠? 제 말 맞죠?"

"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기대랑은 좀 다를 겁니다."

"괜찮아요. 불 만들어 내는 거 한 번만 구경하고 갈게요. 그래도 될까요? 색이 너무 이뻐서요."

신아현은 어제 보았던 불꽃을 넘어선 불길을 보고 싶어 하는 듯 했으나 지금은 무리였다. 무엇보다 내가 그 정도의 푸른 입자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만한 양을 가지고 있었다면 진작 한 번에 쓸어 버렸겠지. 이미 죽은 것을 태우는 건 매우 손쉬운 일이니까.

"혹시 모르니 조금 뒤로 물러나십쇼."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심장에 미약하게 모인 푸른 입자를 손으로 인도했다. 느리지만 꾸준하게 혈관을 타고 푸른 입자들이 이동하는 것이 느껴진다.

푸른 입자들은 이내.

츠츠츠츠-

손 전체가 아닌 검지 손가락 끝으로 몰렸고.

퐁!

앙증맞은 소리와 함께 작디작은 푸른 불꽃이 맺혔다.

"···애걔?"

말과 다르게 한껏 기대를 품고 있던 신아현이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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