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72화 (173/497)

Chapter 172 - 172. 정리 (3)

"······."

예상보다 훨씬 작게 솟은 푸른 불꽃에 나는 침묵했다. 아니, 솟았다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는 이 정도가 한계인 모양이다.

"어제랑 많이 다르네요. 어제는 막 푸슈슉! 콰쾅! 화르륵! 이랬었는데. 혹시 모르니 뒤로 물러나십쇼. 킥킥."

입으로 온갖 의성어를 흉내 내며 말은 건넨 신아현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내가 방금 전에 했던 말을 따라 했다.

"뭐, 그렇다고 우습게 보지 마십쇼.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왠지 모르게 울컥하는 심정을 애써 억눌렀다.

"그래도 너무 작지 않아요? 태울 건 엄청 큰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누더기 변종의 사체에 가까이 다가 갔다.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영 믿지 않을 눈치이니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저벅-

코앞까지 거리가 좁혀진 누더기 변종의 사체.

신아현의 말처럼 사체에게서는 묘한 분위기가 풍겨지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죽은 것은 확실하건만. 마치 금방이라도 몸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그저 보기만 했을 뿐인데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아마 놈의 몸통 중심지에서 느껴지고 있는 검은 입자 탓이리라.

'불이 작아도 태우는 건 충분해.'

나는 손을 들어 올려 변종의 사체에 갖다 대었다.

화륵-

손가락에 맺혀 있던 푸른 불은 처음에 손의 움직임에 따라 짓눌리다가 천천히 사체에 옮겨 붙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은 사체를 좀 먹어가는 듯 내 손과 맞닿은 부분부터 회색의 재로 만들었다.

타닥- 타닥-

이리저리 꺾이고 널브러진 새하얀 변종의 팔들을 장작 삼아 번진 푸른 불. 몸의 균형을 잡고 있던 팔들이 사라지자 쿵- 소리와 함께 사체가 좀 더 주저앉았다.

부스스···

밀려난 공기에 의해 회색의 재들이 허공에 확 떴다가 휘날린다.

이윽고.

화르르륵!

완전히 사체를 잡아먹은 푸른 불길이 창고 여기저기에 튄 검은 체액을 연료 삼아 기세를 부풀렸다. 시야를 가득 메운 불에 의해 열기가 느껴질 법도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푸른 입자로 이루어진 불은 그런 종류의 불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푸른 불이 주변을 가득 채울 수록 변종에게서 뿜어지는 기이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포근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내가 수원 고등학교에서 거미 변종을 태웠을 때도 이랬겠지?'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나지 않으나, 아마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짝짝짝짝짝!

"우와! 우와!"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신아현이 물개박수를 치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는 불이 안전하다고 판단했는지 손을 집어넣어 보기도 하고, 넝쿨을 갖다 대어 보기도 했다. 당연하겠지만, 신아현이 다치는 일은 없었다.

"이제 하나는 끝난 거네요?"

불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신아현이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일단은 그렇습니다."

나는 시야를 어지럽히는 재를 치우기 위해 손을 휘적거렸다. 재가 이렇게 많이 휘날릴 줄 알았으면 마스크라도 쓰고 올 걸 그랬다.

"바로 박현일도 태울 거예요?"

신난 기색을 살짝 가라앉히고 묻는 신아현. 그녀는 휑하게 변한 창고 입구 너머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좀 더 너머에 있는 박현일의 시체였다.

"아뇨, 그건 좀 나중에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후우-."

상황은 얼추 끝나고 있는 것이 맞다. 그러나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기에 시간이 좀 더 걸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화 작업을 이어서 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심장에 들어 있던 푸른 입자가 텅 빈 상태가 되었으니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여기서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심장에 다시 푸른 입자가 쌓이기를 기다려야 했다. 한세아가 신신당부했던 것처럼 무리하지 않으면서.

이번에도 살짝 무리한 티를 낸다면 그때는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탁하게 변한 한세아의 눈동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휘이이이···

강제로 뜯겨진 셔터 문을 통과한 한 줄기 바람에 의해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전 이만 가 볼게요. 이 정도면 사람들도 충분히 쉬었을 것 같고, 할 일이 산더미거든요. 현우씨 혼자 계셔도 괜찮죠?"

"네네, 괜찮습니다. 아, 신아진씨 상태는 어떻습니까?"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든 생각에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이미 한세아에게 신아진이 괜찮다고 전달받았던 내용이지만, 직접 물어서 듣는 건 또 다르지 않겠는가.

"지금은 자고 있을걸요? 몸은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나았지만 제가 더 쉬라고 했어요. 괜히 움직였다가 갑자기 상태가 악화할 수도 있으니까요. 언니 몫까지 제가 일하면 되는 거고."

"다행이네요."

"그러고 보니 언니가 현우씨한테 할 말 있다고 하던데 나중에 시간 날 때 언니 데리고 휴게실 찾아가도 될까요?"

"안 될 건 없죠."

"좋아요.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흔쾌히 허락한 내 대답에 신아현은 살짝 웃어 보였다. 그녀는 불이 잔존한 창고를 한번 둘러보더니 몸을 돌렸다.

신아현이 창고에서 나가기 직전.

"···아현씨!"

나는 망설이다가 그녀를 불러 멈춰 세웠다.

"······? 네?"

"그, 혹시 물건 정리하시다가 간단한 액세서리 같은 게 있으면 따로 빼주실 수 있을까요? 마음 같아서는 제가 찾고 싶기는 한데 그러면 정리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요."

"액세서리? 목걸이나 반지 같은 거요?"

"네."

지금 상황에서는 지수에게 사과의 의미로 전할 선물을 찾고, 고르는 게 마땅치 않았다. 비록 아무리 큰 물류 창고라고 해도, 귀금속이 있을 가능성은 낮았으니까.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지 않은가.

그냥 말로 전해도 된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래도 뭔가 눈에 보이는 선물을 곁들이는 것이 효과가 더 좋으리라 판단했다.

마침 신아현이 작업 대장으로 있는 것 같으니 지금 미리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고.

"현우씨가 착용하려고 그러는 건 아닌 것 같고···. 누구한테 주시려고요?"

"지수요. 아현씨도 알다시피 누더기 변종이 쳐들어왔을 때 제가 지수에게 좀 강압적으로 굴었잖습니까. 지수는 괜찮다고 하긴 했지만 제가 자꾸 신경 쓰여서요."

"아하···. 화해의 선물이구나?"

나는 음흉하게 웃는 신아현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죠! 막 엄청 대단한 건 없겠지만, 여기저기 다 뒤지면 뭐라도 하나 나오겠죠. 저만 믿어요! 그런 건 또 제가 전문이거든요."

"감사합니다."

"일단 뭘로 생각 중이세요? 목걸이? 반지? 팔찌? 귀고리? 다 구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정해 봐요. 내가 최대한 맞춰 드릴게."

"음."

우선 귀고리는 안 된다. 장식품이 적은 귀고리라도 기본적으로 귀를 뚫어야 한데다가 지수는 동물 귀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 귀는 매우 예민한 부위이니 쉽게 건드릴 수도 없지 않은가.

'···사람 귀도 있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리에 스쳤지만, 깊게 파고들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상념을 구석으로 치워 버렸다.

세상에는 알아서는 안 될 비밀도 있는 법이다.

다음은 목걸이와 팔찌.

이것들은 전투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컸다. 지수는 나와 함께 선두에서 싸우니 움직이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은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

폼이 큰 목걸이와 팔찌가 안 되는 것은 그런 연유였다.

마지막으로 반지.

몸에 피해가 가지도 않고, 크기만 맞으면 전투에 방해가 되지도 않는 액세서리···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반지를 주기에는 상황이 맞지 않았다. 예로부터 반지는 프러포즈용으로 많이들 쓰였으니 말이다.

'···줄 게 없네?'

한참을 고심하던 나는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풀이 죽었다.

내가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숙이자,

"뭐예요? 왜요?"

실실 웃고 있던 신아현이 당황하며 물었다.

"뭘 줘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격하게 움직일 때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데···."

"그럼 그냥 저한테 맡겨요. 다 알아서 구해 놓을 테니까. 몸에 딱 붙는 거면 된다는 말이잖아요?"

별것 아닌 대답에 맥이 탁 풀린 신아현. 그녀는 이내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현우씨가 바라는 건 알겠으니까 한번 찾아볼게요. 여기 없는 게 없으니 찾아보면 다 나올 거예요. 저는 이제 가서 일할 테니 현우씨도 무리하지 말고 휴게실 가서 쉬어요."

"넵, 부탁하겠습니다."

신아현은 말없이 손을 흔들면서 창고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나가고 나니 L동 창고 안에는 나 혼자만 남은 상황. 지수의 선물에 대한 고민이 일단락된 것과 동시에 창고 안의 상황도 일단락된 상태였다.

누더기 변종의 사체와 응고된 체액을 말끔하게 태운 푸른 불꽃이 제 할 일을 마치고 꺼진 것이다.

"후우···."

정상적인 사람들이 흘린 핏자국들은 검붉은 흔적으로 변해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변종과 관련된 것들은 청소가 되었으니 당장은 안심해도 될 듯했다.

시간이 지나 박현일의 시체도 처리하고 나면 그때는 완전히 마음 놓아도 되겠지.

바로 그때.

반짝-

수북이 쌓인 회색의 잿더미 사이에서 무언가 햇빛을 반사 시켰다.

"······?"

순간 금속 선반이 반사시킨 햇빛인 줄 알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재가 잔뜩 붙은 선반들은 빛을 반사시킬 여력도 없거니와 무광 처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반짝거리는 저것은 대체 무엇인가.

터벅- 터벅-

나는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기로 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재가 훅 일어나 사방으로 휘날린다.

이윽고.

툭- 툭- 툭-

재를 털어내자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 것을 볼 수 있었다.

"···뭐야."

그와 동시에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 손에 들린 것.

누더기 변종의 사체가 사라지고 나온 것.

반사된 햇빛을 사방으로 흩뿌리고 있는 것.

두 조각으로 나누어 진 그것은 바로.

···투명한 수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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