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74화 (175/497)

Chapter 174 - 174. 정리 (5)

"크흠! 미안하구만. 나이가 드니 눈물이 많아져서···."

김태민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해소된 덕분일까. 그의 얼굴 한 켠에는 후련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상처가 완전히 아물려면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아물 기미가 보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다행인 일이다.

"정화 작업은 다 끝났습니다. 이제 이 근처에서 다시 지내셔도 됩니다. 아니, 지내는 건 무리겠네요. 멀쩡한 게 없어서."

나는 모르는 척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L동 창고를 보며 중얼거렸다.

창고 외벽은 그나마 멀쩡해 보이나, 셔터가 뜯기고 내부 선반이 엉망으로 무너져 있는 모습은 잠을 청하는 곳으로 적합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이곳에는 좋은 기억들이 남아 있지 않겠지.

"고맙네. 나중에 여기에서 건질 수 있는 건 건져서 분류해야겠어. 동생, 혹시 잠깐 시간 되나?"

"저야 뭐 널널하죠. 왜 그러세요?"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나서 남은 일이 없어진 참이다. 푸른 입자를 사용한 작업은 무리지만 단순히 돌아다니거나 입을 여는 것 정도는 쉽다.

게다가 박현일의 시체가 있던 곳에는 하얀 재만이 남아 있기에 더이상 이곳에 볼일이 없는 것도 한몫하고 있었다.

중간에 투명한 수정 조각이 나오기는 했으나, 내가 줍기도 전에 시체와 함께 불타 사라졌으니까.

아마 개체마다 수정 내구도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정문 쪽에 이상한 걸 찾아서 말이야. 사실 같이 가서 봐줬으면 해서 온 거거든. 우리가 푸른 수정을 찾기 위해 땅을 팠었다는 이야기는 아현이에게 들었다고 알고 있는데, 맞나?"

기억난다.

주민센터 도서관에 있을 당시 서로 가진 정보를 교환하면서 나온 이야기 중 하나였고, 나와 지수가 이 캠프로 오게 만든 가장 큰 이유였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네, 맞습니다. 거기에 문제가 생겼습니까?"

"음···. 문제라면 문제지."

곤란해 보이는 김태민의 표정에.

"그럼 일단 가보죠. 가서 직접 확인하는 게 빠를 것 같네요. 가면서 저도 할 말이 있기도 하니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말로 하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것이 상황 파악이 빠를 것이라 판단한 까닭이었다.

"자, 나만 따라오게. 어차피 직진만 하면 되고 멀지도 않아!"

이윽고, 나와 김태민은 작업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따스한 햇볕과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걷고 있을 때.

"어?"

나는 당혹성을 내뱉었다.

앞으로 계속 이동을 하니, 그동안 커다란 창고 건물에 가려져 있던 고압 전신주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규칙적인 간격으로 세워진 철탑.

단순히 그것뿐이었다면 나도 그냥 지나쳤겠지만 현재 내 시야에 들어오는 송전탑들은 하나같이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넘어져 있었다. 고압 전선줄들이 이리저리 엉켜 있는 채로.

도미노처럼 엎어진 송전탑들은 도로에 있던 화물 트럭과 컨테이너들을 깔아뭉개고 있는 상태였다.

철도길 근처라 송전탑 여럿이 있을 법도 한데 어쩐지 보이지 않더라니 이런 연유였나 보다.

"···이것들 왜 넘어진 겁니까?"

나는 송전탑 중단부를 가리키며 김태민에게 물었다. 굳이 중단부가 아니더라도 넘어진 충격에 의해 송전탑의 철골들은 'ㄱ'자로 꺾여 있는 부분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심지어는 철골 중간에 찢긴 부분도 있었다.

"아까 동생이 없애 준 하얀 덩어리가 그랬네. 불을 강제로 끄는 포자 말일세."

김태민은 볼을 긁적였다. 그는 이내 침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마는···. 탑 곳곳에 소화제가 달라붙어서 순식간에 팽창하더니 이 꼴이 되었다네. 그래서 그런가? 불안정하지만 조금이나마 공급되고 있던 전기가 완전히 끊기고 말았어."

"···소화제가 이렇게 만들었다고요?"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사실, 소화제 포자가 전신주에 달라붙는 것은 이상한 현상은 아니다. 일정 수준의 열기나 전기가 감지되면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존재를 드러내는 것들이니까.

다만 내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점은 소화제가 철골을 찢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냐는 것이다.

송전탑은 기본적으로 철골로 이루어져 있는 데다가 높은 강도의 지진과 바람 세기에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던가.

심지어 툭 튀어나온 철탑 지지대 부분을 보면 아래에서부터 밀어 올려진 듯한 흔적도 보이는 것 같았다.

"탑이 조금씩 흔들리더니 점차 위로 솟더군. 그러다가 지진이 오니까 한꺼번에 우르르 무너졌지. 끊어진 송전선에서 불티가 파박 튀는 모습은 무시무시했고. 그 탓에 완전히 흉물이 되어 버렸어. 그렇지 않아도 보기 좋은 건 아니었거늘."

김태민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가만 보니까 소화제 덩어리는 무조건 일정 크기 이상으로 커지는 모양이야. 그러니까··· 흡수한 것 이상으로 말일세. 충분히 크기를 부풀린 뒤로는 금방 숨이 꺼지지만."

그의 말에 문득 무너진 수원역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와르르 부서져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 사이사이에는 하얀색의 덩어리들이 자리 잡고 있었었다. 일단 수원역에 화재가 일어난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러니 소화제 포자 덩어리들이 생기지 않았겠는가.

그럼 역이 그런 모습이 되었던 것은 불길을 잡아먹고 크게 팽창한 소화제가 건물을 무너트리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리라.

갈라진 벽과 기둥에 포자가 비집고 들어가 크기를 키우기만 해도 건물 내구도는 상당히 낮아지니 말이다.

나는 꾸준히 앞으로 걸으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게 생기고 나서 외부에서 접근하는 나무 인간들이 많아지길래 날 잡고 사람들 모아서 바깥에 내다 버렸네. 다음날 아침에 보니 버린 것들은 흔적도 없이 싹 사라졌더군. 그게 사라지니 여길 오는 놈들의 수도 꽤 줄었어."

당연히 그럴 것이다. 열기를 잡아먹은 포자 덩어리들은 나무 인간들을 유인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니까.

그것들은 이내 나무 인간에게 먹힘으로써 활동 에너지를 제공해 주는 역할도 하는 것으로 추정하는 중이었다.

만약 캠프 생존자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다면, 나무 인간들은 소화제에 끊임없이 유인 당해 캠프를 괴롭혔겠지. 포자를 분리해 버린 것은 잘한 일이다.

나와 김태민은 이런저런 것들을 주제 삼아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길세. 저 구덩이 안에 있는 나무뿌리가 보이나?"

나와 김태민은 어느 흙구덩이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흙구덩이가 아닌 진흙탕이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본래 마른 흙들만이 있었을 곳에는 빗물이 한가득 담겨 있었으니.

나는 아래에 고인 흙탕물보다 그중앙에 있는 나무뿌리에 시선을 집중했다.

홀로 우뚝 솟아 있는 두터운 나무뿌리.

그것의 첨단에는 뭉툭한 부위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마치 안에서 무언가 튀어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원래는 저런 모습이 아니었단 말이지. 나 혼자 가서 확인하기에는 영 꺼림칙해서···. 허허, 나랑 같이 가 줄 수 있겠나?"

"아뇨, 여기 계십쇼. 저 혼자 갔다 오겠습니다."

"응? 하지만···."

김태민은 나와 나무뿌리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얼마 안 걸릴 겁니다."

나는 대강 손을 들어 그를 만류한 후, 주변을 훑어보았다.

푸른 조각을 찾기 위해 형성된 작업장.

한때 수많은 차량들이 세워져 있었을 주차장은 이제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주차장 라인을 따라 설치된 임시 바리케이드, 구석에 무너져 있는 쇠 파이프 더미, 그 위에 묻은 핏자국들.

그리고 아스팔트 도로를 누른 수많은 손자국들.

내 예상이 맞다면, 바로 이곳이 누더기 변종이 들어온 입구일 것이다. 아니면 그냥 지나친 경로이거나. 어찌 되었든 놈이 여기를 지나간 것은 확실했다.

쇠 파이프 더미와 아스팔트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들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리 판단한 나는 몸을 긴장시키면서 경사 아래에 있는 구덩이로 내려갔다.

철퍽! 철퍽!

질척질척한 진흙이 신발을 잡아먹는다.

뿌즈즉-

짓눌린 흙뭉치가 품고 있던 물을 토해낸다.

그와 동시에.

"동생!"

김태민이 나를 다급하게 불렀다. 그는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뒤따라 구덩이로 내려왔다.

"역시 같이 가는 게 맞아! 동생 무리하면 안 된다고 아주 신신당부를 했단 말이지. 그, 누구더라? 아! 붉은 머리 아가씨가 그랬다네. 혹여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꼭 도와줌세."

이미 수고스럽게 내려온 것을 다시 올라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그저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했다.

다만.

"······장화는 어디서 났어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장화를 신고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김태민은 뻣뻣해 보이는 장화를 신고 있었다.

"당연히 동생 것도 챙겨 왔지! 자, 여기!"

그는 내게도 장화를 내밀었으나, 내 신발은 진흙에게 잔뜩 당한 상태. 조금만 더 빨리 말해줬다면 좋았겠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더럽혀진 것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이라도 갈아 신는 것이 낫기 때문에 나는 김태민이 건넨 장화로 바꿔 신었다. 더러워진 신발이 나를 원망하는 것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일 것이다.

이윽고.

"천천히 따라 오세요."

"동생이야말로 조심하게. 넘어지면 좋지 못한 꼴이 될 테니."

나와 김태민은 구덩이 중앙에 있는 나무뿌리로 향해 움직였다.

철퍽! 철퍽!

중심지로 향할수록 구덩이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찰박! 참방! 참방!

'···얕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깊네.'

움푹 파이는 만큼 안에 고인 물웅덩이 또한 깊이를 더해 나가는 건 당연한 수순.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무리 깊어도 종아리까지만 물이 찬다는 것이다. 그래도 장화로 갈아신지 않았더라면 좋지 못한 꼴이 될 뻔했지만.

진흙에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내딛는 발걸음. 느리지만 꾸준하게 두터운 나무뿌리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나무뿌리. 나는 내 키를 훌쩍 뛰어넘는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저 좀 올려줄 수 있어요? 위가 어떤지 상태를 봐야 할 것 같은데."

"어렵지 않지!"

"감사- 헉!"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태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팔로 내 몸통을 훌쩍 들어 올렸다.

내가 마냥 가볍지는 않을텐데 역시 힘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이러면 잘 보이나? 잘 안 보이면 말해주게. 위치 정도 바꾸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오우···. 잘 보입니다. 아니다, 조금만 앞으로 가주세요."

한순간에 눈높이가 달라진 것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첨벙-

김태민은 내 요청에 따라 뿌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볼 수 있었다.

휘이이이···

속이 텅 비어 있는 나무뿌리 안.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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