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75화 (176/497)

Chapter 175 - 175. 정리 (6)

넓게 파헤쳐진 구덩이 안.

그 중심부에 솟은 두터운 나무뿌리.

뿌리의 텅 빈 내부에 자리 잡은 어둠.

아니.

···통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단순히 알맹이가 없는 뿌리가 아니었다. 지름이 대략 3m인 공간. 이것은 무언가가 이동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일종의 길이었다.

수분과 양분을 흡수하는 역할을 넘어서 통로가 되어 버린 뿌리.

물론 내 억측일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그도 그럴게, 햇빛이 내리쬐는 뿌리의 내부에는 어떠한 흔적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바로 무언가가 움켜잡았던 것 같은 커다란 손바닥 자국들이 말이다. 그리고 저러한 자국을 낼 수 있는 건 내가 불과 어제 처리한 누더기 변종뿐이리라.

예상했던 대로 누더기 변종이 이 뿌리를 통해서 캠프에 들어온 모양이다. 그 탓에 작업장을 지키고 있던 추종자들이 처음으로 먹힌 것이고.

"······."

나는 갈라진 뿌리의 끝부분을 잡고 살며시 고개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자칫 구멍 속으로 빠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괜히 손에 힘이 꽉 들어간다.

휘이이이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바람이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바람이 통한다는 것은 이 통로가 막혀 있는 것이 아닌 어딘가 뚫려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딘지는 모르겠네.'

뿌리를 타고 내려가면 지상과 연결된 다른 부위로 나갈 수 있겠으나, 나에게는 그 정도 용기는 없었다. 흘깃 바라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건만, 어떻게 뿌리 벽을 타고 내려가겠는가.

그것은 각종 안전 장비를 착용해도 마찬가지였다. 중간에 밧줄이 끊어지는 걸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으니까.

만에 하나 그렇게 되고 만다면,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어둠에 잡아먹혀 다시는 빛을 볼 수 없게 되고 말겠지.

"동생! 뭐가 좀 보이나?"

나를 올려주고 있던 김태민이 위쪽 상황이 궁금한 듯 물었다.

"어제 캠프로 쳐들어온 누더기 변종이 여기로 들어왔나 봐요. 뿌리 안이 텅 비어 있어요. 그놈이 남긴 흔적들도 보이고요."

"허···. 그럼 원래 안이 비어 있었던 건가? 아까도 말했지마는, 처음에는 뿌리 꼭대기가 꽉 닫혀 있었었거든."

김태민의 말에 불현듯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기억 하나.

의왕시에 이어진 철도길을 막고 있던 거대한 나무뿌리벽을 가리키며 지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녀는 분명 뿌리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했다.

확실히 착각은 아니었다. 지수가 들었던 소리는 이내 나, 한세아, 예린에게도 들려왔었으니까.

사각사각- 거리는.

나무가 갉히는 소리가.

그때 당시에는 섣불리 뿌리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냥 우회해서 의왕시로 들어왔었지만. 어쩌면 그 뿌리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뿌리가 서로 연결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뒤이어 들었다.

저수지로부터 시작된 나무뿌리.

터미널 작업장에 솟은 나무뿌리.

두 장소의 거리는 약 4km 정도로 차이가 꽤 된다. 지도를 봐야 더 확실하게 알 수 있겠으나, 얼추 그 정도일 것이다.

만약 이것들이 내 추측대로 연결이 된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디로 왔는가?

어디에서부터 뻗어져 왔는가?

단순히 아파트 위의 거목 정도의 크기로는 이 정도로 뿌리를 넓게 뻗을 수 없겠지.

그렇다면.

"태민 아저씨, 혹시 근처에 산이 좀 많아요? 제가 여기 지리를 잘 몰라서요. 아, 이제 저 내려주셔도 됩니다."

나무가 좀 더 크기를 키우고, 넓게 뿌리를 필 수 있는 그런 곳이 있지 않겠는가.

"응? 산? 여기 산 많지! 당장 서쪽에 있는 게 수리산, 동쪽에 백운산과 광교산, 위쪽에는 모락산, 관악산, 청계산 등등···. 주변에 널린 게 산일세."

김태민은 묘하게 시무룩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상 의왕시부터 위에 있는 안양시는 산으로 둘러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이거참, 마침 산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내가 등산이 취미였거든. 지금이야 도시 공기도 깨끗하고 그러지만 예전에는 먼지가 가득 끼었잖나. 그래서 하루 리프레시도 할 겸 신선한 공기도 마실 겸 해서 고른 취미가 바로 등산이라네. 움직이는 건 힘들더라도━"

나는 모터가 돌아가기 시작한 김태민을 애써 외면하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산.

온갖 나무들이 뿌리를 내린 지형.

그런 지형들이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이 산재하고 있던 것이다. 유독 굵기가 두꺼운 나무뿌리들은 산에서 왔을 가능성이 커졌다.

사방을 점거한 산들에서.

"동생. 그럼 이제 우리가 어찌하면 좋겠나?"

한바탕 말을 쏟아 낸 김태민이 진정된 얼굴로 물어왔다.

"저 정도 구멍은 제가 어떻게 못 해요. 단순하게 순찰 인원 늘리고 임시방편으로 덮개 만들어서 막아 둬야죠. 무슨 일이 일어나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게요."

그는 내가 뒤가 안전하게 처리해줬으면 하는 기대감을 갖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나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도 그럴게, 푸른 불로 태운다고 해도 통로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 데다가 어느 정도로 푸른 입자를 쏟아부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은 까닭이었다.

여기에 평생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참방! 참방- 찰박-

나와 김태민은 구덩이 밖으로 이동하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 말 나온 김에 물어볼 게 있습니다. 하수도로 왔다 갔다 하셨을 때, 쥐떼들 못 보셨다고 하던데요."

"어어, 그렇지. 물리면 다칠까 봐 옷도 두껍게 입고 갔었는데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네. 옷이 물을 먹어서 엄청 무거웠지만 그것들이 나오지 않아서 내심 다행이었지. 무엇보다 안전이 제일이지 않은가."

갑작스레 사라진 뉴트리아 변종 무리.

아마 놈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는 누더기 변종의 체액을 감지한 탓이리라.

서로 가진 세력과 체급이 비슷했다면 수원역에서 그랬듯이 각자 영역을 걸고 싸웠을 테지만, 거대 뉴트리아들이 아무리 있어도 누더기 변종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놈들이기 때문에 도망친 것이겠지.

포식자의 변 냄새를 맡은 동물들이 지레 겁먹고 도망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이 언제까지 유지가 될지가 문제다. 그리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쥐떼들이 어떠한 변이를 거쳤을지도 문제다. 검은 입자는 변이를 끝없이 일으키니까.

자신들의 둥지를 되찾기 위해 돌아온 놈들이 한층 더 위협적으로 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던가.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지금 하수도가 빈 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할 수도 있어요."

"흠."

"제가 당장 할 수 있는 사체 처리는 했어도 경계는 꾸준히 하셔야 할 겁니다. 여기 작업장이랑 맨홀이 있는 부분들을 중점적으로요."

"알겠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고. 흣차, 내 손 잡고 올라오게."

김태민은 먼저 훌쩍 도로 위로 올라가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수월하게 위로 몸을 올릴 수 있었다.

휘이이이-

선선한 바람이 내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준다.

"후우···."

나는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뒤틀어 풀어 주었다. 무리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다시금 온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욱신거리려고 하는 게 왠지 지수와 한세아가 있는 곳에 돌아가면 한 소리 들을 성싶다.

그래도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은 무사히 마쳤으니 후회는 없다.

···아니, 살짝 후회는 된다.

화가 난 한세아는 무서웠으니까.

"동생 몸이 좀 안 좋아 보이는데? 빨리 가서 쉬어야 할 것 같아. 괜히 다 낫지도 않았는데 무리시켜서 미안하구만."

김태민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쓰러지기 직전인 것처럼 들쳐 업을 태세였다.

"걱정 마십쇼. 가서 쉬면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그럼 어서 돌아갑세."

나와 김태민은 각자 있어야 할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진흙이 묻은 신발이 질척거리는 소리를 낸다.

걸어온 길을 역순으로 되돌아가면서 보이는 것들은,

쓰러진 송전탑, 흔들리는 고압선, 찌그러진 컨테이너, 터진 타이어, 깨진 유리창 등등.

대부분이 망가진 것들이었지만, 일부는 사람들의 손길에 의해 조금씩 정리가 되어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금 생존자들 수가 얼마나 됩니까?"

나는 도로에 박혀 있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을 이리저리 피해 가며 김태민에게 물었다.

"25명이라네. 동생 일행들을 제외한 수지."

김태민은 잠시 속으로 가늠하더니 입을 열었다.

'···25명이라.'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캠프 크기에 비해 너무나도 적은 수였다. 그래도 이 정도라도 살아남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근데 왜 그러나?"

"아, 내일 작업하기 전에 다들 제가 있는 곳에 모여 주셨으면 해서요. 오늘 말고, 내일."

"그거야 어렵지 않지. 동생 부탁대로 함세."

고개를 끄덕였으나 의문을 품고 있는 김태민.

"뭐, 별건 아니고. 몸에 검은 입자가 있는지 확인하려고요. 있더라도 제가 치료해 줄 수 있거든요. 푸른 불 기억나시죠? 그것처럼 아프거나 위험한 건 아니니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그의 의문을 풀어 주기 위해 말을 이었다.

"그냥 넘어가면 박현일 추종자들처럼 될 수 있으니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 정화하고 넘어가야 하기도 하고요."

나와 같이 지내는 지수, 예린, 한세아는 검은 입자의 침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곳 생존자들에게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심각한 문제였다.

그대로 방치하다가는 제2의 박현일이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푸른 불꽃을 잠시라도 쬐어 주면 미약한 검은 입자 따위는 순식간에 날아가 버릴 텐데 그것을 굳이 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저 내가 약간의 수고스러움만 참으면 될 일이다.

"···매번 신세만 지는군. 고맙네, 동생."

"하하···.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내일 다 같이 오시는 걸로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화를 끝맺었다. 단순히 낯간지러운 탓도 있지만, 어차피 여기서부터는 각자 갈라져야 할 길목인 까닭이었다.

나는 지수, 세아, 예린이 있는 숙직실로.

김태민은 캠프 생존자들이 있는 곳으로.

이윽고,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숙직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꿀꺽-

생각보다 늦은 시간에 눈치가 보여 들어가기를 망설이고 있을 때.

"오빠!"

예린이 문을 벌컥 열고 도도도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아저씨, 왜 밖에서 서성거려? 안 들어오고."

지수가 툴툴거리며 핀잔을 주었다. 벽에 기댄 채로 앉아 있는 그녀는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현우씨,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잖아요. 에휴···많이 힘들죠? 고생했어요. 어서 와서 쉬어요."

허리춤에 팔을 올린 한세아는 짐짓 화난 표정을 해 보였다. 그것도 잠시, 내 얼굴에 묻은 마른 진흙을 조심스럽게 떼어 주었지만.

행동은 각기 달랐으나 나를 반겨 주는 일행에게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오빠! 오늘 뭐 했어요?"

"나도 좀 궁금하네? 이제 같이 움직여도 될 것 같은데 언니랑 예린이가 자꾸 못 나가게 막지 뭐야. 으으, 좀 쑤셔 죽겠어. 이러다가."

"지수씨, 좀만 더 참아요. 아직은 안 돼요."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들에게 나는 차근차근 오늘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그렇게 지수, 예린, 한세아는 내 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조잘조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해가 저물고, 밤이 되어.

하루가 끝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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