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6 - 176. 정리 (7)
이른 아침.
웅성웅성-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지내던 숙직실 앞에는 한데 모인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서늘한 아침 공기도 훅 달아오를 정도로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그래서 우리 왜 다 모이라고 하신 거래?"
옆에 있는 동료에게 멍한 얼굴로 물어보는 중년의 여성.
"그새 까먹었어? 우리 몸에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 검사한다고 했잖아."
타박하는 어조로 답해주는 그녀 또래의 여성.
"아차차, 그랬지 참. 요즘 나 건망증이 생긴 것 같은데 이것도 치료해주시나?"
"···그건 안 될걸? 그냥 달고 살아. 까먹은 게 있으면 내가 챙겨줄 테니까."
그녀들은 친근한 사이인 듯 서로 깔깔대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 주위에는 바닥에 얌전히 앉아 있는 아이들과 기운이 없어 보이는 남성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인 이유는 내가 어제 김태민에게 캠프 생존자들을 모아달라고 했기 때문이리라.
바로 그때.
짝!
복도를 울리는 손뼉 소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순식간에 북적북적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소곤소곤한 소리만 남았다.
"자자, 다들 잠시만 조용히 해주세요."
손뼉을 친 사람은 신아현.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면서 말을 이었다.
"어제 제가 말한 것 대강 기억하시죠? 다름이 아니라 여기에 모이라고 한 이유는 여러분들 몸에 검은 입자가 있는지 확인하고 그걸 치료하기 위해서예요. 검은 입자가 몸에 쌓이면 박현일 추종자들처럼 변할 수 있으니 꼭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이해해주시고요."
"아픈 거예요?"
신아현의 말에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면서 말했다. 아이는 치료라는 말에 주사기를 떠올린 듯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하나도 안 아파. 오히려 엄청 신기할걸? 정말이야."
"네···."
신아현의 확답에도 반신반의하는 아이. 그러나 이내 믿기로 했는지 얌전히 손을 내렸다.
이어서 신아현은 내심 불안에 떠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차근차근 하나씩 말해주었다.
그녀의 말이 끝날 때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람들을 보니 생각보다 신아현을 향한 신뢰감이 꽤 있는 모양이다.
"······크흠!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니까 금방 끝날 겁니다."
그런 상황들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슬슬 정화 작업을 진행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복도에 나와 있는 것은 나 혼자. 지수, 예린, 한세아는 좀 더 자고 있으라며 일부러 방에 두고 나온 것이다.
밤늦게까지 떠들었던 탓에 그녀들은 매우 피곤해 보였으니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 보니 일어나서 뭔가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내가 입을 여니 신아현을 향했던 시선이 전부 내게로 옮겨졌다. 왠지 속이 메스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발표하는 것도 질색했던 나였으니 지금 이 자리가 거북하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신아현의 말마따나, 내가 김태민에게 말했던 것처럼 안전을 위해서는 꼭 해야 하는 일이니 피할 수도 없는 일이다.
화륵-
그리 생각한 나는 검지 손가락에 푸른 불을 피워 올렸다. 혹여 사람들이 너무 놀라지 않게 작게 솟은 푸른 불은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 일렁거렸다.
"우와···."
입을 크게 벌리며 감탄하는 아이들. 그것은 옆에 있던 어른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내 예상보다 훨씬 침착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사전에 김태민과 신아현이 충분한 설명을 해주었나 보다.
이윽고.
"자, 일렬로 서시고, 한 분씩 푸른 불 잡고 빠지시면 돼요. 오늘 할 일도 산더미이니까 후딱 하고 가자구요."
신아현이 일렁이는 불을 구경하기 바쁜 사람들을 재촉하며 지시를 내렸다.
"불 안 뜨거워요?"
첫 타자는 신아현에게 아프지 않냐는 질문을 했던 남자아이였다. 아이는 갈색의 두툼한 다람쥐 꼬리를 끌어안은 채로 불안을 달래고 있었다.
"그럼! 형은 가만히 있을 테니까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대봐."
나는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어 주었다. 이럴 때는 빨리 해치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먼저 다가오길 기다리는 것이 옳았다.
나와 신아현은 푸른 불에 닿아도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 눈앞의 아이를 비롯해 뒤에 쭉 서 있는 어른들은 그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괜히 안 좋은 기억을 심어 줄 수도 있는 일이고, 무엇보다 첫 단추가 잘 풀려야 끝 단추도 잘 맞는 법이다.
이것 보라.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아닌 척 아이의 행동을 유심히 보고 있지 않은가.
꼴깍-
침을 삼키며 손을 내밀었다가 집어넣었다가 반복했던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동안 망설였던 것이 무색하게 손을 확 뻗어 내 검지를 움켜잡았다.
"······와! 하나도 안 뜨거워!"
뜨거운 열기가 아닌 포근함이 손에 전해지자 아이는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어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민준아! 정말 안 뜨거워?"
"네! 안 뜨거워요! 그냥 따뜻하기만 해요!"
아이 이름이 민준인가 보다. 씩씩하게 외치는 아이의 모습이 보기 좋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뭐랬나? 아프고 위험한 건 아니라고 그토록 말해주었거늘!"
"이 사람이? 그걸 말로만 들어서 아나? 그래도 참 신기한 광경이구만···."
김태민이 허허 웃으면서 한 말 뒤로, 사람들 몸 안에 있을 수도 있는 검은 입자를 정화하는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차례대로 푸른 불꽃이 솟은 내 검지를 잡았다가 떼는 과정일 뿐이라 그런 것도 한몫했지만 말이다.
단순히 푸른 불을 켜 놓는 행위였기에 나도 그다지 힘든 부분도 없었고.
만약 검은 입자의 침식이 시작된 사람이 푸른 불을 만졌다면, 푸른 입자가 소모되는 것과 동시에 체력적인 소모가 따랐겠지만 다행히도 아직 오염된 사람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니, 이상하게도 푸른 입자가 정말 미세하게 소모되기는 했으나 말 그대로 매우 미약한 수준이라 부담이 되지 않은 것이다.
차례는 한 사람씩 계속해서 지나갔다.
"현우씨···."
"왜 그러십니까?"
"······아니에요, 아무것도. 열심히 하세요. 감사합니다···."
중간 순번이었던 이예솔.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이내 힘없이 발길을 돌려 사라졌다.
"허허, 동생! 나야 뭐 어제 실컷 불을 쬐었으니 이상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받으러 왔다네. 이야, 이거 봐도봐도 신기한 광경이란 말이지. 불멍하기 딱 좋은 불이야. 자네도 멍 때리는 거 좋아하나? 내가 또 멍하면 자신 있거든. 멍에도 여러 종류가-"
"쉿! 태민 아저씨, 뒤에 사람들 기다려요."
"어어, 그렇지."
모터를 돌리려는 김태민을 황급히 막은 후 멀리 보내버리고 나니.
어느덧.
"마지막이시네요."
제일 마지막 순번이었던 신아진이 우물쭈물하며 내 앞에 섰다. 어째 보이지 않더라니 순번이 될 때까지 사람들 뒤에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네, 네···. 그, 저기···."
"이제 반말이랑 멍! 안하십니까?"
신아진이 왜 자꾸 죄스러움을 담아 눈치를 보는지 알 것 같아 나는 우스갯소리로 말을 이었다.
"읏! 그건···."
얼굴이 확 달아오른 신아진.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내게 사과를 건넸다.
"현우씨, 감사합니다. 저랑 제 동생, 캠프를 구해주셔서요. 그리고 죄송합니다. 현우씨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들도 위험하게 만들어서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제가 진작 찾아 뵈었어야 했는데······."
그녀를 보니 마음이 착잡한 것은 여전했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다가 어찌 되었든 일이 잘 끝나지 않았던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뭐, 괜찮습니다. 고개 드십쇼. 몸도 많이 회복된 것 같아서 다행이고요. 근데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궁금한 게 하나 있거든요."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마침 물어보고 싶은 게 있기도 했으니까.
"네! 제가 답할 수 있는 거면 뭐든지요!"
"그거 진짜 컨셉이었습니까? 신아현씨도 컨셉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거였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컨셉이었냐는 것.
그러한 컨셉을 동생인 신아현이 알고 있었냐는 것.
"도, 동생도 몰랐을 거예요···. 아마도."
"진짜 몰랐다고요?"
나도 모르게 허, 하고 탄식이 절로 나오는 대답이었다.
"맞아요. 저도 모르고 있었어요. 거짓말 안 하고 진짜. 제가 도서관에서 현우씨에게 해줬던 이야기 기억해요? 새끼 강아지랑 합쳐져서 그런 것 같다고 제가 그랬잖아요."
자기 언니의 손을 꼭 잡아주고 있던 신아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대신 답했다.
"그랬었죠."
덕분에 결합한 동물의 나이에 따라서 성격과 행동이 변하는 것이라고 알게 되었었지. 비록 지금은 그 정보가 불확실━
"아앗! 아현이가 해줬던 이야기는 사실이에요!"
"······?"
"나이에 따라서 영향을 받는다구요. 실제로 제가 그랬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당신은···."
"네, 그렇죠. 저는 지금 본래 나이대에 맞게 행동하고 있지만, 초기에는 이렇지 못했어요. 예전에는 컨셉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변한 거여서요. 그래서 아현이도 몰랐던 거예요."
나이대에 맞게 행동하는지는 둘째 치고, 중요한 것은 신아진이 시간이 지나자 정신을 차렸다는 이야기였다.
"중간에 정신이 돌아왔다는 말이네요?"
"···정신이 돌아왔다고 하면 뭔가 어감이 좀 이상하지만 영 틀린 말은 아니네요···. 아무튼 맞아요. 어느 순간부터 사고가 제대로 이어지면서 정신이 돌아왔어요."
신아진이 볼을 긁적이면서 답했다.
"그럼 왜 숨긴 겁니까? 그것도 동생에게까지?"
"사람들은 자신보다 낮은 상대를 보면 본심이 나오거든요. 해코지할 속마음을 섣불리 드러내게 해서 위험을 미리 차단할 수도 있고···."
확실히 그렇다. 도서관에서 나, 지수, 예린, 한세아와 조우했을 때도 자매들은 우리를 심하게 경계하는 모습과 풀어지는 모습을 같이 보여주었었다.
그런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 준 것이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니 내심 소름이 살짝 돋았다. 아마 그녀들이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서 택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이런 세상에서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낯선 모두가 위험한 존재이니 말이다.
안타까운 마음이 잠시 들었지만.
"또 뭔가 동생만 보면 몸이 이상해지는 게···. 동생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고, 말을 잘 들어야 할 것 같아서···."
이어지는 신아진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제야 신아현과 신아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짧은 사슬이 찰랑거리는 목걸이, 신아진의 손목을 묶고 있는 넝쿨, 살랑거리는 꼬리, 쫑긋거리는 한쪽 귀, 언니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신아현.
누가 봐도 주인과 개의 사이처럼 보이는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