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77화 (178/497)

Chapter 177 - 177. 정리 (8)

신아현이 손을 내밀면 신아진이 거기에 얼굴을 비비고, 그럼 동생은 언니 머리를 쓰다듬고.

아주 그냥 서로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다.

신아진의 컨셉이 사라졌어도 그들의 관계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했지만, 사랑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이런 세상에서 서로에게 서로가 소중한 가족이니 사이가 애틋할 만도 했다.

애틋해도 너무 애틋한 게 아닌가 싶지만 거기까지는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니까 그러려니 넘어갈 일이고.

그래도 언제까지고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크흠!"

나는 헛기침을 하며 그녀들의 이목을 끌었다.

가만히 두다가는 부담스러운 광경을 보게 될 것 같았고, 추가로 할 말이 있어서 한 행동이었다.

"아현씨랑 아진씨 둘 다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안으로 들어오시죠. 보여드릴 게 있거든요. 묻고 싶은 것도 있고요."

"그거야 뭐 어렵지 않죠. 좋아요, 마침 저도 현우씨에게 전달해야 할 말도 있으니까. ···아니, 방금 한 말은 잊어줘요. 그 건은 나중에 제가 다시 말씀 드릴게요."

신아현과 신아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민 아저씨는 갔나?'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복도를 쭉 훑었으나, 내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먼저 간 모양이다.

"태민 아저씨 찾아요? 아저씨는 바쁘다면서 자기 차례 끝나자마자 갔어요. 꼭 있어야 하나요? 아니면 제가 듣고 말 전해 줘도 되는데."

날 따라 복도를 보던 신아현이 내가 누구를 찾는지 눈치챈 듯 입을 열었다.

하긴, 김태민은 작업장 뿌리통로의 입구도 막아야 하니 한가하게 있을 시간이 없을 것이다.

"별건 아니고 그냥 조용하다 싶어서 봤어요."

무조건 있어야 한다 정도는 아니었기에 나는 너스레를 떨며 손을 휘휘 저었다. 킥킥 웃는 자매를 뒤로 하고, 나는 숙직실 문을 열었다.

벌컥-

문이 열리자,

"현우씨,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요?"

"아저씨도 여기 앉아서 도와줘. 빨래를 한 번에 해서 정리할 게 산더미야."

밤새 바깥에 널어 두었던 세탁물을 개고 있는 중인 한세아와 지수가 나를 반겨 주었다.

"오빠! 이거 봐요! 잘 접었죠!"

예린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옆에서 한세아를 도와주고 있었다.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반듯하게 개인 옷을 자랑했다.

"어어, 잘했네. 다들 건강해서 빨리 끝났습니다, 세아씨."

나는 예린의 머리를 살살 어루만져 주면서 그녀들의 물음에 하나씩 답해주었다. 평화로운 일상의 모습에 괜스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그리고 지수야. 아니, 다들 개는 건 잠깐 멈추고 가운데로 모여 봐요. 아현씨, 아진씨도 들어오시고요."

"······?"

의문을 얼굴에 띤 일행들은 이내 행동을 멈추고 세탁물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 두었다.

이윽고, 내 지시에 따라 한 자리에 모이게 된 지수, 예린, 한세아, 신아현, 신아진.

"다름이 아니라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조각 2개와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본래는 시간을 들여서 보여주려고 했지만, 자고 일어나니 조각의 형태가 완전히 변해 버린 데다가 푸른 입자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냥 조각을 일행에게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툭-

마름모 형태의 조각과 둥근 원형의 조각이 아침 햇볕을 받아 반짝거린다. 코르크 마개로 막힌 유리병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동시에.

"어?! 푸른 조각!"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그녀들은 화들짝 놀라며 조각을 손으로 가리켰다.

다만 예린이만큼은 놀라지 않았다. 아이 또한 신기하게 보기는 했으나 그것뿐이었다. 예린은 고양이 눈으로 푸른 조각의 존재를 미리 인지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지금 조각을 보여 준 이유 중 하나로 예린이가 이미 눈치를 챈 까닭도 있었다.

"우선, 물어볼 게 많겠지만. 먼저 제 이야기를 듣고 질문은 나중에 해주십쇼."

입이 근질근질한 듯 계속 입술을 달싹거리던 일행은 내 말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나는 하나씩 어제 말해주지 않았던 내용을 그녀들에게 말해주었다.

누더기 변종을 태우니 반으로 갈라진 조각이 나왔던 이야기, 박현일에게도 조각이 나왔으나 푸른 불을 버티지 못하고 깨졌다는 이야기,

그리고 징벌방에 있었던 남자는 나와 비슷한 경우인 것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까지.

"······."

"······."

"······."

내가 하는 말들을 전부 들은 지수, 예린, 한세아, 신아현, 신아진은 침묵에 빠졌다. 가끔 침음을 흘리는 걸 보니 각자 머리가 복잡해진 모양이다.

나는 그녀들이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다.

"···좋아요. 조각은 그렇다 치고, 현우씨가 그 남자랑 비슷한 경우일 거라는 건 무슨 말이에요?"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신아현이었다.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 일단 푸른 입자로 변해서 몸이 사라진 남자 기억하시죠?"

자신을 '엘트라'라고 밝힌 남자.

나는 그 남자가 푸른 입자로 내 심장 속 조각을 고쳐주고, 지수에게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적을 허락해주었던 것을 떠올렸다.

비록 그 대가는 죽음이었지만.

"그럼요. 바로 눈앞에서 봤는걸요."

"제가 푸른 불을 쓸 수 있는 것처럼 그 남자도 이능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슷하다고 말한 거고요. 혹시 캠프에서 같이 지낼 때 뭔가 특이하다던가 하는, 그런 행동 본 적 없으십니까?"

신아현은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전 그 사람 이름도 그때 처음 알은걸요. 귀가 좀 뾰족하고, 길었다는 것만 빼면 이상한 행동도 하지 않았었고요. 요즘 세상에 외형이 좀 변한 것 정도는 큰일이 아니잖아요? 게다가 오히려 묘하게 존재감이 옅어서 있는지도 잘 몰랐다고 해야 할까요···."

"···귀가 뾰족했다?"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가 남자를 봤을 때는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린 모습이었으니까.

그것도 잠시.

"아니, 아무튼 그 남자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이야기네요?"

나는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맞아요. 가끔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걸 들어서 그 사람이 위에서 내려왔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그것뿐이었어요."

그렇다면 신아현이 넝쿨을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긴 것처럼 엘트라도 의도적으로 이능을 숨긴 것인가?

푸른 입자를 다룰 수 있었던 엘트라였으니 이능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아니면 이능을 발현하지 못했던 다른 이유가 있거나.

'···정신이 불안정해서 그랬나?'

존재감을 죽이고, 혼잣말을 했다고 했으니 그럴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

바로 그때.

"···현우씨, 조각이 변종의 시체에서 나왔다고 했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한세아가 나를 불렀다.

"네, 그렇습니다."

"현우씨가 바닥에 둔 조각들···. 제가 예전에 주웠던 푸른 조각이랑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침을 꼴깍 삼키는 한세아.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럼 바닥에서 나온 조각들은 어디서 나타난 걸까요? 단순히 돌멩이가 아니잖아요. 시체에서 나온 조각과 지하에서 나온 조각들이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요···?"

한세아는 조각을 얻었다는 사실보다 그 경로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도 내심 신경 쓰이던 부분이었고.

푸른 조각.

이것들은 그녀의 말마따나 평범한 돌멩이가 아니다. 광석의 일종으로 보이긴 하지만 푸른 조각들은 지금까지, 정확히는 세상이 바뀌기 전까지 발견 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그러한 조각들이 세상이 바뀌고 나자 뜬금없이 도로 밑, 시체 속 같은 장소에서 발견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좀 더 나아간 가정이긴 해도, 혹시 나무뿌리들이 지하를 헤집고 다니는 것이 이러한 푸른 조각들을 찾으려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세아와 여기 캠프 생존자들이 갈라진 도로 주변에서 주운 푸른 조각들은 나무뿌리가 미처 찾지 못하고 남은 잔여물들이고.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내가 나무도 아니고, 그것들의 행동 목적을 어찌 알겠는가. 푸른 조각들이 생기는 이유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그렇다.

"글쎄요. 거기까지는 저희가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네요. 예전에 세아씨가 푸른 조각을 주웠을 때도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셨잖아요, 맞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답했다.

"···맞아요.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특별한 건 없었어요. 그냥 갈라진 도로 틈에서 나왔다는 것밖에···."

한세아는 한숨을 폭 쉬며 가슴팍을 툭툭 두드렸다. 순간 보기 좋게 흔들리는 가슴이 눈길을 끌었다.

"근데 아저씨. 이거 안전한 거 맞지?"

이번에는 지수가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그녀는 내가 조각을 내버려둔 순간부터 푸른 조각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중이었다.

"어어, 안전할 거야. 어제만 해도 그냥 투명하기만 했는데, 하루 지나고 보니까 푸르게 변했더라. 아마 내가 가진 푸른 입자가 옮겨 간 것 같아."

"그럼, 그럼 나 이거···."

지수는 귀를 쫑긋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조각이 2개이니 하나는 자신이 갖고 싶은 모양이다. 그리고 푸른 조각을 통해 이능을 다시 사용하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

"원래 하나는 너 주려고 했어. 나머지 하나는 세아씨 드리고, 유리병에 담긴 건 예린이 몫으로. 가루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더라. 그래도 괜찮죠?"

나는 신아현과 신아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현우씨가 얻은 보상인데요, 뭘. 저희는 신경 안쓰셔도 돼요. 사람들 구해주신 것만 해도 충분히 감사하니까. 들어 보니 충전을 못 하면 무용지물인 것 같고요."

자매의 답에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우는 지수. 그녀는 곧장 손을 뻗어 조각을 집으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행동에 제동을 걸었다.

"······? 왜, 왜···. 나 이거 준다고 했잖아···."

"줄 거야. 줄 건데. 마지막으로 확인할 절차가 남았어."

"뭔데?"

지수는 꼬리로 바닥을 탁탁치며 답을 채근했다. 빨리 조각을 다루고 싶은 마음에 어지간히 몸이 달아오른 듯했다.

"예린아, 이거 조각 어때 보여? 검은 입자는 안 보이지?"

"음···."

미간을 찌푸리며 조각과 유리병을 노려보는 예린. 아이는 잠시 조각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씩 웃으면서 엄지를 척 들었다.

"괜찮아요! 언니가 써도 돼요!"

안전하다는 신호였다.

"선물 감사합니다, 오빠! 잘 쓸게요! 친구들이 좋아하겠다!"

그러면서 예린은 푸른 가루가 담긴 유리병을 잽싸게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도 고마워요, 현우씨. 덕분에 밥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겠어요."

한세아는 원래 가지고 있던 목걸이 줄에 조각을 묶었다. 그녀의 가슴골에는 푸른 조각이 다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뒤로, 잔뜩 신이 난 지수는 꼬리를 쉴 새 없이 붕붕 휘둘렀다.

그러다가 결국 꼬리에 얻어맞은 예린에게 한 소리 듣고 나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은 여전했지만 말이다.

***

시간이 좀 더 흐른 오후.

"현우씨! 잠깐 여기로 와봐요."

바람을 쐬고 있는 나를 신아현이 손짓으로 불렀다.

"······?"

"빨리빨리! 몰래 주고 싶다면서요!"

"아아! 네!"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한 나는 황급히 신아현에게 다가 갔다. 이제 보니 그녀는 허리춤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 내가 일전에 부탁했던 지수의 선물이리라.

"생각보다 빨리 찾으셨네요. 감사합니다. 근데 뭔가요?"

"엄청 대단한 건 아니지만, 지수씨에게 딱 맞는 선물을 찾았어요. 그게 뭐냐면···두구두구!"

신아현은 바로 말해주지 않고 뜸을 들였다.

"···짠!"

내가 말없이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후후 웃으면서 상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신아현이 내민 선물. 손바닥만 한 크기인 걸 보니 몸에 착용할 수 있는 액세서리인 것 같았다.

"지금 열어 봐도 되죠? 주기 전에 뭔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어···, 음. 여기서 열어본다고요? 바로 주는 게 아니라? 뭐······네! 열어 보세요."

신아현은 잠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식은땀을 삐질 흘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녀가 워낙 빠르게 땀을 훔쳐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여기서 열어볼 줄은 몰랐나 보다. 그래도 선물을 주는 처지에서 내용물이 뭔지는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의아한 얼굴로 신아현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이내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와 동시에.

"······뭐예요, 이게."

고개를 휙 들면서 당혹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왜 당황했는지도 알 수밖에 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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