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80화 (181/497)

Chapter 180 - 180. 정리 (11)

저벅- 저벅-

나는 예린이 알려 준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쭉 직진만 하면 된다기에 길이 헷갈릴 일은 없었다. 애초에 복잡한 길목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윽고, 사방이 탁 트인 1층짜리 창고가 점차 모습을 내기 시작했다.

[천일택배]

다른 창고가 높은 층수를 가진 것과 달리 이 창고는 물류를 장기간 보관하는 용도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창고 앞에 줄지어 세워져 있는, 특정 택배사 로고 스티커가 붙여져 있는 화물 트럭들을 보니 당일 들어온 물량을 당일 처리하는 장소인 걸로 추정이 되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니.

쐐액-!

파지직!

소방 도끼를 사방으로 휘두르며 이능을 연습하는 지수가 보였다. 격하게 움직이고 있는 그녀는 구슬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한 뒤로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인 모양이다.

지수가 연습하고 있는 창고는 이미 캠프 사람들이 한차례 정리를 마친 상태였다.

깔끔하게 정리된 금속 선반, 한쪽에 놓여 있는 종이 상자들, 두꺼운 비닐로 재포장된 무언가, 층층이 쌓인 플라스틱 박스들.

그리고 전신 거울이 창고 중앙에 우뚝 설치되어 있었다.

"······?"

뜬금없이 서 있는 전신거울에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일단 지수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로 했다.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지수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서 였으니 의문을 푸는 것보다 그게 우선이었으니까.

"이렇게? 아니, 이렇게인가? 아니아니, 이건가?"

한창 도끼를 휘두르던 지수는 팔짱을 낀 채 고심에 잠겼다. 미약한 스파크가 튀었지만, 그녀의 기준에 부합하지는 않았나 보다.

다시 허공에 팔을 휘적거리고, 도끼를 몇 차례 휘두른 지수는.

파지직!

"아! 이렇게다! 이거였네···!"

좀 더 강하게 일어난 스파크에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방 뛰었다. 그녀의 긴 흑발과 꼬리가 같이 흔들린다.

'감 잡았다더니 진짜 빨리 익혔네.'

나는 괜스레 차오르는 긴장감에 식은땀이 나는 손을 옷에 쓱쓱 문지르며 지수에게 걸어갔다. 무슨 말로 대화를 시작할까 고민하면서.

히히 웃으며 기분이 좋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지수는 정신이 너무 팔린 나머지 아직 내 접근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후우···."

지수가 갑작스레 전신 거울 앞에 선 것은.

탁!

"너 뭐야, 김지수. 왜 이렇게 멋있어. 이게 내 힘···?"

한껏 진지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거울을 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크읍! 으하하핫!"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내가 웃음을 펑 터트린 것과 동시에,

"······아."

거울 속 지수의 금안과 내 눈이 서로 마주쳤고,

"히야악!"

한박자 늦게 반응한 지수가 꼬리털을 바짝 곤두세우며 크게 뜨인 눈으로 뒤돌아보았다.

자아 도취에 빠진 모습은 순식간에 날아가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그녀. 덜컥하고 굳은 몸을 보니 많이 놀란 모양이다.

"큭, 크흠! 연습 잘하고 있었네."

나는 자꾸만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고 돌이 된 지수에게 말했다. 이미 웃고 말았지만 지금이라도 모르는 척해주는 것이 좋은 판단이리라.

"······."

"이야, 도끼 휘두르면서 스파크가 조금씩 튀는 거 멋-크읍, 멋있더라."

"······어디까지 봤어? 아니, 어디부터 봤어···?"

지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물었다.

"어···, 네가 이게 아니라고 고민하고 있을 때부터?"

"그럼 내가 거울 보고 말한 것도 다 본 거네."

꽉 쥐여진 그녀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꼬리는 덤이었다.

"그렇긴···한데. 지수야, 농담 아니고 너 진짜 멋있었어."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나는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리고 지수를 달래기 위해 진심 어린 칭찬을 연달아 건넸다.

"그리고 나 얼마 보지도 못했어!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아무튼 지수 네가 멋있는 건 인정."

"···그만해. 더 말하지 마."

"아니, 진짜 멋있었다니까? 하나도 안 이상해!"

"그만 하라니까?"

"지수 너 진짜 멋있었다고! 자신감을 가져!"

"하······."

지수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한숨을 푹 쉬며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퍼억-

"아악!"

나는 배를 붙잡고 바닥을 뒹굴게 되었다.

"내가 그만하라고 했지. 아저씨가 잘못한 거야."

"아윽···. 왜, 왜 때려···. 나는 그냥 네가 멋있-큭-다고 한 건데···. 이능없어도 멋있다고 말하려고 한 건데···."

"또 맞고 싶어?"

주먹을 살살 흔드는 지수의 모습에 나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진심이었건만. 힘으로 내 입을 막는 것은 비겁하지 않은가.

그 순간.

툭-

품에 감춰 놓고 있었던 상자가 바닥에 떨어졌다.

"···응? 이게 뭐야?"

"아, 잠깐만! 지수야, 잠깐만!"

나는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직 무슨 말을 하며 건네줄지 생각도 마치지 못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다니.

"쓰읍! 가만히 있어!"

그러나 지수는 눈을 부라리며 내 손을 탁 쳐냈다. 그녀는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보았다. 나는 변명도 못하고 끝났다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

"뭐야, 초커네? 이거 어디서 났어?"

"······! 알아봐주는 거야?"

"알아보고 자시고 이거 초커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예전에 이런 디자인 인터넷에서 본 적 있는 것 같거든. ···이건 좀 더 매니악해 보이지만."

"초커 맞아!"

나는 벌떡 일어나면서 목걸이를 들고 있는 지수의 손을 붙잡았다. 지수는 흠칫하며 몸을 움찔 떨었지만 뒤로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거 네 선물! 지수 너 이맘때쯤 생일이라며."

"어? 어떻게 알았어? 내 생일인 거."

"내가 네 생일을 모르겠냐? 다 알고 있었지. 생일선물 겸 화해의 선물로 준비한 거야."

사실 몰랐다. 정확히는 예린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그 이후로 안 것만 해도 어디인가.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지수는 다른 의미로 붉어진 얼굴로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화해의 선물? 아니,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저기 의자는 아니지만, 앉을 만한 상자들 있어."

내 손을 잡아 창고 안쪽으로 이끌었다. 그녀의 꼬리는 프로펠러처럼 붕붕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윽고, 나와 지수는 플라스틱 박스 위에 나란히 붙어 앉았다. 붕붕 휘둘리던 꼬리가 자연스럽게 내 팔을 휘감은 것은 덤이었다.

"너 요즘 자꾸 꼬리로 내 팔 감는다?"

어김없이 꼬리가 팔을 감아오는 것에 나는 바로 할 말도 잃고 지수에게 물었다. 며칠 전만 해도 꼬리로 휘감지는 않았는데 갈수록 빈도가 늘어나고 있었으니까.

내 기억상으로는 지수의 꼬리는 매우 예민한 부위였었다. 그래서 함부로 만지지 못하게 했었거늘. 이제는 만져도 괜찮은 것인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아저씨만 보면 꼬리가 이렇게 하고 싶다는데 어떡해. 그렇다고 아읏- 만지지는 마. 만지지 말라니까······그냥 그대로 둬."

나는 꼬리를 살짝 집었다가 곧장 반응하는 지수 탓에 바로 내려놓아야만 했다. 그녀가 자발적으로 꼬리를 휘감는 것은 되지만, 역으로 내가 꼬리를 잡는 것은 안 되는 듯했다.

괜히 꼬리를 만졌다가 삽시간에 어색해진 분위기.

"······."

"······."

나와 지수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침묵을 지켰다. 주변은 조용했지만,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지수는 버클형 초커를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선물 고마워, 아저씨."

내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대며 말을 걸었다. 그녀의 쫑긋거리는 귀가 톡톡 내 볼을 간지럽힌다.

"···대단한 선물은 아니지만,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난 좋아. 아저씨가 줬으니까."

그동안 혼자 고민을 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시원하게 대답해주는 지수. 괜히 마음 고생만 했다. 그래도 좋다니 다행이었다.

"그래서? 화해는 무슨 말이야?"

지수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물음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번에 변종 나왔을 때 있잖아. 그때 내가 너한테 함부로 대한 게 미안해서. 내 고집대로 널 창고에 가뒀었잖아."

"아, 그때? 에이, 난 신경 안 써. 이제 괜찮아. 이해해."

"진짜 미안. 그때는 그냥 다른 생각이 안 들었었어."

나는 누더기 변종의 습격이 있었던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다.

거세게 내리는 비,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번개, 수많은 팔들이 내는 물장구 소리.

그리고 뒤이어 끔찍한 모습을 드러내었던 누더기 변종.

믿기 힘든 정보를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맞이한 위기 속에서 나는 오로지 지수의 안위만이 걱정되었었다.

그래서 다소 강압적으로, 그녀의 의견을 듣지도 않은 채 지수를 간이 창고 안으로 밀어 넣고 말았고.

결과적으로는 마지막에 지수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모두가 위험해지고 말았겠지만,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네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았거든."

"뭐야···, 부끄럽게. 그리고 나도 아저씨가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거든요?"

지수는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얼굴에 웃음이 만연한 걸 보니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래, 나도 알아. 그래서 더 미안해. 내가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됐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주는 선물이야."

"아니야, 따지자면 나도 아저씨한테 잘못한 거지. 내가 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는 건 알고는 있었는데 스스로가 납득을 못 했었나 봐. 아니, 못했었지."

지수는 내 팔을 휘감은 꼬리를 한층 더 조였다. 어느새 웃음은 사라진 상태였다.

"아저씨한테 도움이 될 거라고, 될 수 있을 거라고 항상 생각해왔는데, 정작 변종의 소리만 듣고 겁에 질려서 더욱 그랬던 거 같아."

"······."

"앞으로는 더 위험해질 게 뻔한데 내가 여기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물러나면, 나는 그냥 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나는 말없이 지수의 손을 잡아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생각해서, 너무 생각해서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걸리적거리는 짐이 상대가 아닌 자신이 될까 봐 두려워서 각자 고집을 부렸던 것이지.

많은 말을 나누지는 않았으나, 다행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수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말을 덧붙여 봐야 괜스레 분위기만 어색해질 뿐.

내가 지수의 귀 뒤쪽을 살살 긁어 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아, 맞아! 나도 아저씨한테 선물 줄 거 있는데!"

지수는 순식간에 침울한 기색을 다 날려 버리고, 해맑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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