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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181화 (182/497)

Chapter 181 - 181. 정리 (12)

"선물?"

나는 뭔지 제대로 물어보기 전에 지수와 함께 일어나야만 했다. 여전히 내 팔은 그녀의 꼬리에 묶여 있었으니까.

"사실 내가 준비한 선물은 아니고, 여기 사람들이 창고 정리하면서 나온 물품 중에 내가 쓸만한 걸 따로 빼둔 거야. 그렇다고 막 강제로 뺏은 건 아니다? 다 물어보고 가져온 거야! 가져가도 된다고 했어! 진짜야!"

제 발 저린 지수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줄줄 읊었다.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뭔데?"

그녀가 남의 물건을 함부로 빼앗거나 그럴 성격은 아닌 걸 알기에 나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부스럭- 덜그락-

"잠깐만! 여기에 뒀었는데···."

지수는 박스 더미 사이를 뒤적거렸다.

허리를 숙이고 엉덩이를 뒤로 쑥 빼는 자세에 나는 슬쩍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자세가 불편할 텐데도 그녀는 꼬리를 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찾았다. 이거야!"

지수는 길쭉한 무언가를 손에 들고 허리를 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길이 1미터 상당의 벌목 도끼였다. 일견 고급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도끼 자루 상단에는 [FISKARS X27]라는 영어가 새겨져 있었다.

회색의 도끼날, 검은 도끼 자루, 주황색으로 코팅된 손잡이.

"오! 마침 필요했는데!"

새것인데다가 튼튼해 보이는 도끼를 보며 나는 반색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수가 구해주었던 망치가 완전히 박살이 나서 새로이 구해야 했던 참이었건만. 이번에도 지수가 새로운 무기를 구해 준 것이다.

"아저씨 망치는 변종이랑 싸울 때 부서졌잖아. 그래서 내가 잽싸게 하나 구해놨지!"

"잘했어!"

나는 양손으로 지수의 귀를 마구 쓰다듬으려다가 한 손만 들고 주물럭거렸다. 꼬리가 묶인 팔은 지수가 내민 도끼를 받아야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높게 들 수도 없었고.

그렇게 한다면 지수의 몸이 들리지 않겠는가.

꼬리는 예민하기까지 했으니 잡아당기는 건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럼 이제 나랑 아저씨랑 도끼 친구네?"

지수는 해맑게 웃었다. 내 팔에 묶인 꼬리가 들썩거렸다.

"그러네. 근데 지수 네 도끼는 상태 괜찮아? 내가 쓰던 망치는 워낙 낡아서 얼마 버티지 못했다고 쳐도, 소방 도끼는 좀 오래 쓰지 않았어? 아무리 튼튼해도 어딘가 문제 생겼을 것 같은데."

나는 꼬리의 반응에 피식 웃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휴식 기간 없이 몇 개월간 혹사 당해 왔던 소방 도끼의 상태가 신경 쓰인 것이다.

"괜찮던데? 아저씨도 한번 봐봐. 완전 멀쩡해."

지수는 박스에 기대져 있던 소방 도끼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말대로 도끼의 이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목재로 이루어진 자루는 여전히 튼튼했고,

빨간 페인트칠 된 도끼날은 여전히 단단했다.

손질이 깔끔하게 되어 있는 소방 도끼는 서늘한 기운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

그리고 도끼를 유심히 살피던 나는 이것이 왜 아직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끼 구석구석에 미세한 푸른 입자가 박혀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흡수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옳았고, 그러한 푸른 입자가 도끼를 멀쩡한 상태로 유지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이거···."

"응? 왜?"

귀를 쫑긋거리며 묻는 지수.

"이상한 일은 아니야. 도끼에 푸른 입자가 들어가 있네. 그래서 멀쩡한 것 같아. 자, 여기 돌려줄게."

나는 그녀에게 도끼를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위험한 건 아니고 오히려 좋은 현상이니까 안심하고 써도 될 것 같아. 뭔 일 있어도 내가 막아주면 되니까."

"응! 아저씨만 믿을게."

지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지금껏 들고 있던 목걸이를 내게 내밀었다.

"······?"

이걸 왜 돌려 준다는 말인가? 내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안 받고 뭐 하냐는 듯 눈을 치켜떴다.

"아저씨가 목걸이 해 줘야지! 원래 이런 건 선물 준 사람이 걸어 주는 거라고."

"···그래? 알았어. 조각도 같이 줘. 홈에다가 끼워줄게."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기에 나는 순순히 초커와 푸른 조각을 받고, 결합시켰다. 푸른 조각은 애당초 본래의 자리였다는 듯 홈에 딱 맞게 들어가 끼워졌다.

이 정도면 목걸이가 끊어지지 않는 이상 조각을 잃어버릴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만큼 쉽사리 빠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이야기였다.

팟-

잠시 빛을 내뿜은 푸른 조각과 하나가 된 초커.

"크흠! 지수야, 꼬리 풀고 뒤로 돌아봐."

나는 괜스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작 목걸이 하나 걸어 주는 것이건만. 왜 이리 긴장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으, 응."

떨리는 것은 나뿐만이 아닌 지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녀는 삐걱거리는 몸으로 천천히 뒤로 도는 어색한 움직임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달칵-

스윽- 슥-

고리에 들어간 가죽끈을 조심스럽게 빼내어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지수의 새하얀 목덜미. 그녀는 긴 흑발을 한데 모아 내가 목걸이를 걸어 주기 쉽게끔 만들어 주고 있었다.

"···할게. 너무 조이면 말해?"

미세한 솜털이 오소소 일어나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알았어."

나는 손을 뻗어 초커를 지수의 목에 살짝 둘렀다. 푸른 조각이 전방으로 향하도록.

내 손과 지수의 목과 닿은 순간.

"히익!"

지수가 몸을 움찔 떨었다. 혹여 너무 세게 조였나 싶은 마음에 덩달아서 나도 몸을 떨었다.

"왜, 왜?! 숨 막혀?"

"아, 아니. ···괜찮아. 지금이 딱 좋은 것 같아. 응, 딱 좋아."

괜찮다는 반응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작업을 이어 나갔다.

달깍-

고리에 끈을 집어넣고 고정만 시키면 되었기 때문에 작업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끝났다.

지수의 목이 꽤 얇은지라 튀어나온 끝부분이 상당히 길었지만, 여분의 끈은 나중에 깔끔하게 정리하면 될 것이다.

"됐다. 괜찮지?"

"응, 좋아."

지수는 몇 차례 고개를 돌려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나 어때?"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자기 모습에 대해 물었다. 지수는 이내 부끄러운지 고개를 슬쩍 돌리며 볼을 붉게 물들였다.

지수의 목에 있는게 초커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진한 배덕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도.

"어울리네. 예쁘다."

쑥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돌리고, 살짝 붉어진 얼굴을 하며, 반짝거리는 금안을 가진 지수는 뭇 남성의 마음을 무심코 홀릴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아저씨, 목걸이 선물의 의미가 뭔지 알고 있어?"

지수는 불쑥 고개를 앞으로 내밀면서 입을 열었다.

"아니, 그건 모르겠네. 무슨 의미가 있는데?"

액세서리 부위마다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내가 아는 건 반지 선물의 의미밖에 없었다.

"흐흥, 나중에 아저씨가 알아와! 나는 말 안 해줄래."

"뭔데? 그냥 말해주면 안 되나?"

"안 돼! 그것보다 아저씨도 도끼 한번 휘둘러 봐. 몸에 맞나 확인해야지."

지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내 목걸이에서 도끼로 화제를 돌렸다.

아무리 물어도 답해주지 않을 기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지수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쐐액! 붕!

쐐애액-

조금 뒤로 물러나서 도끼를 짧게 휘둘러 보고, 큰 궤적을 그려보기도 했다. 도끼의 무게는 오함마보다 가벼웠지만 더 튼튼하고 강한 느낌을 주었다.

"진짜 괜찮네, 이거. 길이도 길어서 마음에 들고. 고마워, 지수야."

"에이, 뭘."

나와 지수는 서로를 바라보며 킥킥 웃었다.

***

예린과 한세아가 있는 숙직실로 돌아가는 길.

"아저씨, 우리 곧 여기 떠난다고 했잖아."

지수가 저물고 있는 해를 보면서 물었다.

"그렇지."

나는 한세아를 떠올리며 답했다.

나와 지수가 몸을 풀고 있을 때, 한세아는 떠나기 위한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에 다 같이 확인을 하긴 해야겠지만, 그전까지는 자신에게 맡겨만 두라고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던 한세아.

지금 우리가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도 그녀 덕분이었다.

"그 전에 마지막으로 할 일만 끝내고, 그러고 나서 위로 올라 가야지."

"하수도 말이지? 정말 거기에 문제가 생겼을까?"

그래, 하수도.

뉴트리아 변종들이 있었던 하수도를 처리하는 것이 우리의 마지막 작업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배불뚝이 아저씨랑 아현씨가 물어 봤거든. 내일 다 같이 하수도 청소하러 가니까 도와줄 수 있냐고 말이야."

"당연히 도와줘야지. 우리는 어차피 떠나니까 뒷일은 책임질 수 없다고 해도 그냥 두고 가면 찜찜하니까. 그치?"

"아저씨 말이 맞긴 해.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지막까지 도와주는 게 나도 마음이 편해. 여기는 아이들도 있으니 말이야."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었다.

이윽고.

"어서 와요, 현우씨. 그리고 미리 생일 축하해요, 지수씨."

"언니! 오빠! 빨리 여기 앉아요!"

나와 지수는 숙식실로 돌아올 수 있었고, 그런 우리를 한세아와 예린이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녀들은 초코파이로 이루어진 탑에 생일초들을 꽂는 중이었다.

"푸른 조각 덕분에 초를 킬 수가 있어서 다행이지 뭐예요? 막 대단한 상은 차리지 못했지만 조촐하게나마 준비해봤어요."

"아···. 고마워요, 세아 언니!"

지수는 입술을 살짝 씹었다가 부드럽게 웃고 있는 한세아에게 달려가서 폭 안겼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많이 기쁜 모양이다.

나, 예린, 한세아는 지수를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는 지수는 꼬리를 붕붕 돌리면서 자꾸만 헤프게 웃었다.

서서히 해가 저무는 것을 배경 삼아, 느릿하게 울려 퍼지는 생일 축하 노래가 우리의 마음을 울렸다.

***

다음날 아침.

나와 지수, 그리고 만반의 준비를 한 생존자들.

캠프의 가용할 수 있는 인원들 전부가 맨홀을 통해 하수도로 내려가서 통로 구석구석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내가 푸른 불로 자극을 주었어도,

모두가 큰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렸어도.

하수도의 이상 현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우리가 착각이라도 하고 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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