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2 - 182. 당정역 (1)
하수도 작업을 마친 다음날 이른 아침.
"이제 가시네요."
"가야죠, 충분히 푹 쉬었고 몸도 다 나았으니까요."
신아현과 나는 마주 보면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정확히는 신아진, 지수, 예린, 한세아도 함께였다.
캠프에서 지낸 지 5일째 되는 날.
이제는 떠날 때가 온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안전한 캠프에 눌러앉아 살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기에 무거운 몸을 억지로라도 일으켜야만 했다.
"조심해요, 모두들. 그리고 당신들이 원하는 바를 꼭 이루시길 바랄게요. 매일 기도도 할게요. 저도 같이 따라가고 싶지만···."
신아현은 울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막상 진짜로 캠프를 떠나는 우리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가라앉은 모양이다. 옆에 말없이 서 있는 신아진도 마찬가지였다.
"신아현씨는 남아서 캠프 사람들 도와주십쇼. 어제 하수도 작업을 제대로 끝냈어야 하는데 그게 좀 아쉽네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제 거의 하루 종일 진행되었던 하수도 처리 작업은 찜찜한 결말로 끝이 났었다.
청소는 깔끔하게 했으나, 정작 가장 중요한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쥐떼들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현우씨가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계속 신경 쓸게요. 그렇지 않아도 맨홀 있는 곳이랑 작업장에 뚫린 구멍들 쉬지 않고 감시하고 있으니까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빨리 대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다행이지만요."
내 말을 끝으로 대화는 잠시 단절되었다.
"······."
"······."
신아현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캠프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때.
쫑긋!
"응? 아저씨, 뒤에 누가 온다."
신아진의 목걸이와 자기 목걸이를 서로 비교하고 있던 지수가 귀를 쫑긋거리며 말했다. 그녀가 보는 방향에서는 김태민이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동생! 가기 전에 허억, 사진 하나 찍고 가야지! 허억!"
손에 폴라로이드 카메라 한대를 들고 온 김태민. 어쩐지 보이지 않더라니 카메라를 찾느라 그랬나 보다.
"태민 아저씨! 왜 이렇게 늦었어요! 기다리느라 혼났네."
"어휴, 미안해. 이거 여분의 필름을 따로 구해야 하더라고. 그것까지 찾으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없어서 그냥 왔어···."
김태민은 가쁜 숨을 내쉬며 울상을 지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순박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딱 두 장만 찍을 수 있네. 기왕이면 찍을 수 있을 때 많이 찍고 싶었는데 아쉽구만."
"한 장이라도 어디예요. 현우씨! 일행이랑 같이 서봐요. 사진 찍어 줄게요. 남는 게 사진이라고 하잖아요."
신아현도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녀는 이내 카메라를 들고 내게 손짓 했다.
"와! 사진!"
오랜만에 본 카메라의 존재에 예린은 잔뜩 신난 모습이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걸 보니 일행들끼리 기념 사진을 찍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괜찮다 못해 왜 이제서야 떠올렸나 후회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이윽고.
"다들 여기 보세요!"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나란히 서서 뻣뻣한 자세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묘하게 긴장하는 걸 보니 사진 찍는 것이 다들 오랜만이라 그런 듯했다. 가장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하는 건 예린뿐이었다.
"······아잇! 자연스럽게 좀 있어 봐요! 한 번에 잘 찍어야 한다구요! 지금 그림이 얼마나 이상한지 알아요?"
어색한 모습에 참다 못한 신아현이 우리를 보며 핀잔을 주었다.
답답한지 한숨을 폭 내쉰 신아현의 모습에.
"아저씨! 나한테 좀 더 붙어!"
"어어? 너무 잡아당기지 마. 너무 잡지 말라고 했다?"
나와 지수는 괜스레 티격태격하며 긴장을 풀었고.
"언니! 저 좀 잡아줘요! 이렇게 찍을래요!"
"이, 이렇게?"
예린과 한세아는 각자 자세 잡는 것을 도와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신아현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시 카메라를 잡았다. 그녀의 뒤에는 김태민이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이제 진짜 찍어요! 하나, 둘! 셋!"
그렇게 한결 나아진 자세를 취하게 된 우리는 신아현의 카메라가 번뜩이는 것만을 기다렸다. 셔터가 눌리고 플래시가 터지면 카메라에서 사진이 나올 것이리라.
"셋···! 셋······? 어라? 자, 잠깐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 억지로 올린 입꼬리에 잔경련이 일어날 때까지 플래시는 터지지 않았다. 신아현은 당황하면서 카메라를 톡톡 쳐보았지만 카메라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카메라 배터리 없는 거 아니에요? 저 한번 줘 봐요."
나는 자리에서 이탈해 신아현에게 다가갔다.
"건전지는 새 걸로 갈아서 그 문제는 아닐 텐데···. 여기요."
내가 신아현의 옆으로 가서 카메라를 잡은 순간.
찰칵!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플래시가 터지며 사진이 찍혔다.
"어어?! 사진! 사진!"
나와 신아현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카메라를 전방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두 장의 필름 중 한 장을 나, 신아현, 신아진의 사진으로 날려 먹었으니 남은 한 장이라도 건지기 위함이었다.
직감상, 셔터가 자동으로 눌려 있을 것이라고 느껴진 것도 허겁지겁 움직이게 만드는데 한몫하고 있었다.
"지수야! 세아씨! 예린아! 여기! 여기 봐봐!"
내가 다급하게 외친 것이 무색하게.
찰칵!
지잉- 지이잉-
카메라는 곧장 플래시를 또다시 터트렸고, 안에 걸려 있던 사진들이 연달아서 나왔다.
"······끄, 끝난 거예요? 자세도 못 취했는데···!"
"···뭐야? 사진 찍은 거야?"
"훗! 그러게 카메라는 계속 보고 있었어야죠, 언니들!"
별안간 지나가 끝나버린 사진 찍기. 지수, 한세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모두가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와중에 예린은 홀로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찌할 틈도 없이 플래시가 터진 것치고 사진은 생각보다 만족스럽게 나왔다. 당장 렌즈가 치워지니 일행들의 자세가 한층 더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었다. 비록 나는 같이 찍히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예 찍히지 않은 건 아니지 않은가. 캠프 사람들과 찍은 것도 하나의 추억으로 삼으면 될 일이다.
"아, 뭐야! 아저씨랑 같이 찍고 싶었는데! 그리고 내 표정은 왜 이래! 씨잉···."
지수는 사진에 내가 나와 있지 않자 영 불만스러운 눈치였지만, 더 이상 남은 필름이 없었다.
"아무래도 타이머가 걸려 있었던 같아. 그래서 바로 안 찍힌 거고. 다음에는 꼭 같이 찍자."
내가 멋쩍게 웃으면서 한 말에 지수의 날카로운 시선이 신아현에게 향했다.
힉-하고 놀란 신아현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신아진은 그런 동생을 지키겠다고 나섰다가 지수의 기세에 밀려 꼬리를 다리 사이로 말아 넣고, 동생과 같이 뒤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아현씨, 사진 받아요. 얼떨결에 같이 찍긴 했지만 잘 나왔네요."
나는 그녀가 도망가기 전에 사진을 내밀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사이좋게 한 장씩 나눠 가지면 되겠지.
"···흠흠! 소중하게 잘 간직할게요."
나머지 한 장은 한세아에게 주었다.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그녀가 마음 편히 볼 수 있게.
"세아씨, 마음에 들어요? 줄 테니까 가까이서 보십쇼."
"······현우씨, 사진 또 찍을 수 있을까요? 다 같이요."
복잡한 표정으로 사진을 보고 있던 한세아가 내게 물은 말이었다. 그녀가 걱정하는 건 단순히 사진을 찍는 것만이 아닌 그 안에 우리 모두가 찍힐 수 있느냐겠지.
"물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앞으로 가는 거잖아요."
한세아의 목소리에 미약하게 담긴 불안감을 눈치챈 나는 일부러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그렇겠죠?"
"네, 기회가 있을 때 같이 찍읍시다. 그때는 제가 들어가게요."
"흐흣, 당연히 그래야죠. 현우씨가 사진에 안 찍힌 게 너무 아쉬워요. 다음에는 꼭 같이 찍어요!"
그제야 한세아는 불안감을 털어 버리고 밝게 웃었다.
지수, 예린, 한세아가 사이좋게 찍힌 사진은 이것이 유일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한세아가 질릴 정도로 사진을 원 없이 찍을 것이다. 그녀가 바라는 것처럼 모두가 함께하는 사진을 말이다.
그러니 한세아는 아니, 그녀만이 아닌 지수와 예린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반드시.
"현우 동생, 조심해서 가게. 동생은 꼭 해낼 수 있을 거야."
김태민은 내 어깨를 붙잡고 힘을 주었다. 그는 지금 이런 말밖에 해 줄 수 없어서 미안한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형이야말로 몸 조심히 있어요. 허리는 특히 조심하시고."
바뀐 호칭에 김태민은 아이처럼 순박한 웃음을 지었다. 비록 껄껄거리는 웃음소리는 그의 나이를 나타내고 있었지만.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진작 바꿔 불러줄 걸 그랬다.
"신아현씨, 신아진씨. 사람들이랑 함께 잘 버티고 계시길 바랍니다. 나중에 저희가 여기 돌아오면 반갑게 맞이해 주시겠죠?"
"그럼요, 현우씨! 그건 걱정하지 마요! 지금도 붙잡고 싶은 거 간신히 참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만약의 이야기지만 나중에 저희가 남산으로 갈 수 있으면 갈게요. 혹시 알아요? 저희가 큰 도움이 될지?"
"하하, 말이라도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제 할 말은 다 했으니 출발할 시간이었다.
"잘 있어요, 아현 언니! 아진 언니도! 배불뚝이 아저씨도요!"
예린의 인사를 끝으로 담벼락에 서 있는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이윽고.
"가자, 지수야. 세아씨랑 예린이도."
"응!"
"네!"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다음 목적지인 당정역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잠깐 고개를 뒤로 돌려 보니 아직도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구슬땀을 흘리며 물건을 나르는 사람.
다치지 않게 안전 장비를 챙겨 주는 사람.
궂은 일을 앞장서서 하는 김태민과 그를 도와주는 신아현.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혼자가 아닌 서로를 지키기 위해서.
앞으로도 살아남기 위해서.
이번에는 잃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