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83화 (184/497)

Chapter 183 - 183. 당정역 (2)

부스럭- 부스럭-

잘그락- 잘그락-

흔들리는 수풀 소리 사이에 자갈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섞여 들린다.

"지수야,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알았어."

지금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있는 곳은 철도길로 넘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 즉, 물류 터미널에서 벗어난 선로 옆 경계선이었다.

"세아씨, 짐 무거우면 언제든지 말해요. 혼자서 많이 부담할 필요 없어요."

"저도 체력 꽤 좋아졌거든요? 걱정 마세요!"

한세아는 짐 가방을 고쳐 메며 내게 말했다. 묵직한 가방이 작게 흔들린다.

모든 짐을 한세아가 짊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짐을 나눠 들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것은 한세아가 들고 있는 양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터미널에서 떠날 당시부터 한세아는 일행의 짐을 책임지겠다며 나선 것이다.

전부터 가방 역할을 맡은 그녀였기에 어찌 보면 당연했지만, 나는 여전히 한세아가 걱정스러웠다.

그도 그럴게, 사람들이 물건을 수북이 챙겨 주는 바람에 가방이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으니까.

수일분의 식량과 식수, 보호대나 밧줄 같은 안전 장비, 휴대용 버너 같은 도구들.

최대한 필요하며 챙길 수 있을 정도로만 담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꼴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현우씨가 준 푸른 수정 덕분에 덜 힘든걸요. 정말 힘들면 말할 테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서 가죠!"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세아가 매고 있는 푸른 조각이 활성화가 되고 있다는 것일까.

단순히 장비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넘어서 몸에 미약한 푸른 입자로 코팅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 푸른 입자는 육체를 강화시켜 주는 효과가 있었다. 비록 작은 조각일 뿐이라 수준은 낮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보다는 확실히 낫지 않은가. 충전이야 내가 상시로 해주면 되는 일이고.

"일단 알겠습니다.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요, 세아씨. 예린아, 내 손잡고 넘어 와."

갈 길이 멀다는 한세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기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린이 높은 턱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도와주면서.

"감사합니다!"

힘차게 대답하는 예린. 아이의 목에는 푸른 가루가 담긴 작은 유리병이 걸려 있었다. 조각이 한차례 변형되고 남은 흔적인 가루들을 싹 모아 담은 것이다.

별다른 효과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았으나 그냥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우니 취한 조치.

'···응? 뭔가 양이 조금 줄어든 것 같은데.'

문득 그런 느낌에 유리병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푸른 가루의 사용은 예린에게 일임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기 물건은 확실히 챙기는 예린이니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제, 제 거예요!"

이것 보라.

유리병에 시선을 준 것은 찰나였건만. 곧바로 알아차린 예린이 병을 손에 꼭 쥐지 않았는가.

"···이잉, 그래도 오빠가 원하면 줄게요······."

귀와 꼬리를 축 늘어트리며 말한 예린에게 나는 괜찮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제야 안심한 예린이 꼬리를 살랑거렸다.

부스럭! 부스럭!

이윽고, 수풀을 완전히 지난 우리는 철도길 위에 완전히 올라오게 되었다.

휘이이이이-

후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위아래로 쭉 뻗은 4개의 선로, 묵빛의 선로 사이에 깔린 자갈밭, 그 밑으로 살짝 드러난 나무판자들.

그리고 일정 간격을 세워진 금속 전철주들.

안전했던 캠프를 떠나 외부로 나오니 활기찬 분위기에서 삭막한 분위기로 확 바뀌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고작 수풀 하나를 넘었을 뿐이건만, 마치 경계선이 그어진 느낌도 들었다.

"지수야, 여기서 당정역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더라?"

"거기까지는 완전 가까워. 2km는 확실히 안 되고···. 한 1.5km? 응, 그 정도 되겠다."

지수는 벨트 가방에서 지도를 넓게 펼친 후 말했다. 이미 떠나기 전 한차례 이야기를 나눈 사안이지만 계획의 점검은 계속해도 모자라지 않으니까.

"철도를 계속 따라서 간다면···. 당정역 다음에 군포역, 군포역 다음에 금정역. 마지막으로 금정역 다음에 명학역이네. 무리하지 않고 하루에 역 3개에서 4개씩 가기로 했으니 오늘 최대 목표는 명학역까지란 말이지."

귀를 쫑긋 세운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지도 곳곳마다 나, 한세아, 예린의 시선이 모였다.

"이번에는 역마다 거리가 짧네요? 아닌가? 비슷한가?"

옆에서 유심히 지도를 보던 한세아가 한 말이었다.

"아뇨, 세아씨가 생각하는 게 맞습니다. 저번에 저희가 지나쳤던 역 사이의 거리보다 확실히 짧습니다. 그래서 오늘 총 걸어야 하는 거리도 저번보다 줄었죠."

각 사이의 거리는 순서대로 1.5km, 1.2km, 2.2km, 1.5km 정도.

다 합치면 대략 6.4km가 된다.

수원역에서 의왕시까지 걸었던 거리가 8km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확실하게 이동해야 할 거리가 줄어든 것이 맞다고 할 수 있었다.

"저번만큼 가려면 아마 안양역까지 가야 하는데 거기는 좀 무리일 것 같습니다. 저희가 앞으로 지나갈 역들이 죄다 도심지쪽에 있어서 명학역까지도 못 갈 수도 있어요."

거리가 준 만큼 남산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이 더 오래 걸리겠지만, 그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 우선해야 하는 게 있었다.

바로 얼마나 안전하게 가느냐,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각 역들의 상태가 어떤지 모르는 우리로서는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을 따름이었다.

도심지를 관통하는 역인 만큼 주변에 나무 인간들이 얼마나 있을지, 건물들의 상태는 어떤지, 지형은 어떻게 변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것들이 없었으니까.

우리보다 앞서 지나갔었던 누더기 변종을 처리했다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미 지나간 길에서 일어났던 일. 우리 앞길에 또 다른 위험이 숨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아니, 거의 확실하게 있겠지.

차량으로 순식간에 도시를 관통하듯 지나가면 또 모르겠지만, 그러지 못하던 이상 이동이 소극적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의 관리 없이 수개월간 방치되었던 탓에 멀쩡한 차량 배터리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매우 아쉬웠다.

'발전기도 부식돼서 돌아가질 않았고.'

이동 수단이 간절했던 내게 김태민이 리어카라도 가져가는 것이 어떠냐 라고 묻긴 했으나 여차하면 곧장 짐을 버리고 도망가야 하니 그것 또한 별 쓸모는 없었다.

'···그래도 일단 받아올 걸 그랬나?'

순간 그런 후회가 들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선로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으니까. 넝쿨들이 잔뜩 깔려 있기도 했고.

괜히 리어카를 챙겨 가겠다는 고집은 쓸데없는 불필요한 소음을 유발할 뿐. 주변을 자극하는 소음은 우리에게 극독이다.

"하긴, 그러네요. 조심해야 하니까요."

한세아는 예린의 보호대를 고쳐 주며 수긍했다.

"다들 지도 충분히 봤죠? 이제 집어넣을게요."

일행을 차례대로 바라본 지수가 말했다.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지도를 작게 접어 벨트 가방에 넣었다.

"자, 출발!"

손을 앞으로 내민 예린의 신호에 맞춰 나, 지수, 한세아는 피식 웃으면서 철도길을 걷기 시작했다.

잘그락-잘그락-

조심스럽게 내딛는 신발 밑으로 밀려나는 자갈.

뚝- 뜨둑-

비벼지는 자갈에 의해 간혹 잘려 나가는 넝쿨 줄기.

"아저씨."

귀를 바짝 세운 채 경계를 하고 있던 지수가 불쑥 나를 불렀다. 그녀는 뒤따라 오는 한세아와 예린을 잠깐 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벌써부터 너무 힘 빼지는 마. 아마 당정역까지는 큰 위험은 없을 거야. 뭐, 거기까지 도착도 금방 할 테지만."

철도길을 기준으로 좌측에는 골프장, 우측에는 컨테이너 단지가 있으니 지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골프장 경계선에는 2m가 훌쩍 넘어가는 나무들이 자라 있어 우리를 외부로부터 가려주고 있었고, 물류 단지 경계선은 잔뜩 쌓여 있는 컨테이너들의 존재만으로도 시야가 가려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경계를 해야 하는 건 변함이 없건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갑자기 뭐가 튀어나올 수도 있는 노릇이고."

"그야 그치만···."

우물쭈물하는 지수. 그녀의 꼬리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삐걱거렸다.

"왜? 혹시 어디 몸 안 좋으면 바로 말해야 한다?"

꼬리와 함께 몸을 배배 꼬는 지수의 몸 상태에 이상이 있나 싶은 마음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본래라면 하루 더 쉬고 출발해야 했으나, 오늘 출발한 것은 순전히 내 고집이었으니까.

왠지 모르게 조급함이 느껴진 탓에 그리한 것이지만 일행의 상태가 좋지 않다면 다시 캠프로 돌아가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다. 아니, 고려 수준이 아닌 무조건 돌아가야겠지.

"아니! 나 몸 상태 완전 좋은데?"

눈을 크게 뜨며 팔다리를 쭉쭉 뻗는 지수. 다행히 컨디션 악화같은 이유는 아닌 모양이다.

"······."

그녀는 이내 말없이 꼬리로 내 팔을 휘감았다.

"······."

나도 말없이 멍하니 꼬리를 보다가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어쩐지 갑자기 말을 걸더라니 꼬리를 이렇게 하고 싶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이러한 행위가 지수 나름대로 안정감을 얻기 위한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굳이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 옆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꼬리를 부담스럽지 않게 만들어 줄뿐.

귀를 쫑긋 세우고, 부끄럽다는 듯 히히 웃는 지수의 뒤로, 예린과 한세아가 사이좋게 손잡고 오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보다 더 뒤에 있는 캠프가 보인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안전한 캠프.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예측 불가의 위험.

이런 사실은 나, 지수, 예린, 한세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걸음을 늦추는 일은 없었다.

연구소에 도달하고 말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앞으로 얼마나 걸었을까.

우리는 당정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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