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84화 (185/497)

Chapter 184 - 184. 당정역 (3)

부스럭-!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역에 진입하기 전에 있는 수풀 더미 속에 들어가 있었다.

[당정역]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역사와 벽면에 붙어 있는 간판이 보였다.

"세아씨, 망원경 좀 꺼내주십쇼."

나는 찬찬히 주변을 훑어보면서 말했다.

당장 내 시야에 보이는 것들은.

좌우를 빼곡하게 채운 담벼락, 두 개로 나눠진 2층짜리 역사 건물, 스크린 도어가 설치된 1층 승강장, 넝쿨이 축 늘어진 승강장 지붕 정도.

'···나무 인간은 안 보이고.'

건물도 멀쩡하고 별다른 위험은 없어 보였지만, 그것은 가까이 가서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여기요, 현우씨."

가방을 뒤적거린 한세아가 내게 쌍안경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건네받고 곧장 눈에 가져다 대었다.

내가 한세아에게 쌍안경을 달라고 한 이유는, 도심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입구를 담당하는 당정역인 만큼 우리가 진입하기 전에 최대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작은 정보 하나라도 아는 것과 아예 모르는 것은 천지 차이니까. 한번 발을 들이밀면 내빼기가 쉽지 않으니 역 진입에 신중을 기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수야, 뭐라도 들리면 바로 말해."

"걱정 하지마, 내가 한두 번 해 보나? 아저씨야말로 이상한 거 보이면 바로 말해줘."

지수와 대화를 끝으로 나는 전방에 신경을 집중했다.

좌에서 우로 찬찬히 시야를 이동시키면서.

시야는 동그란 두 개의 원에 한정되었지만, 그만큼 거리감이 줄어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제일 앞에 있는 경고문.

<경고>

철길로 다니지 맙시다.

※위반시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철도안전법 제48조 및 81조)

-한국철도공사 KORAIL

흰색 바탕의 팻말이 자갈밭에 박혀 있었다. 이러한 문구가 보인다는 것은 역이 가까이 있다는 의미. 실제로 우리는 역 근처에 있으니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시야를 좀 더 넓게 잡았다.

승강장 끝을 알리는 펜스,

승강장 지붕을 떠받치는 기둥,

그 옆에 우두커니 붙어 있는 벤치와 쓰레기통,

작동을 멈춘 에스컬레이터와 판이 깨진 계단,

승강장에 설치된 스크린 도어,

시멘트 바닥에 뿌리를 내린 풀.

펜스는 멀쩡한 상태였지만, 스크린 도어의 유리는 확대해서 보니 금이 쩍쩍 갈라진 모습이었다. 살짝 툭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건만, 저 상태에서 용케 무너지지 않고 있었다. 아마 연이은 지진 탓에 일어난 현상이리라.

살살 부는 바람에 의해 소리 없이 흔들리는 이름 모를 풀을 끝으로, 나는 지상 1층은 충분히 봤다고 판단했다.

이번에는 시야를 1층을 넘어선 역사 2층으로 이동시켜 보았다.

양 대합실을 잇는 중앙 다리, 군데군데 타일이 벗겨진 외벽, 흉하게 드러난 철골, 뿌옇게 변한 유리창.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핏자국들.

"······."

유리창 안쪽에 먼지가 워낙 많이 붙어 있어 내부가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뜻언뜻 존재감을 드러내는 핏자국들은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게 했다.

군인들이 나무 인간들을 처리한 흔적이거나 예전에 있었던 생존자들이 남긴 흔적이겠지. 무슨 상황이었든 간에 아비규환이었던 것은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휘이이이-

피부에 닿는 바람이 한층 서늘해진 것은 기분 탓일까.

"···위험한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조용히 지나가면 될 것 같아요."

나는 참고 있었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래, 적어도 당장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내부에 먼지가 그대로 쌓여 있는 걸 보니, 요 몇 개월간 움직인 것들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역사 건물 깊숙한 곳에는 또 모르겠지만 우리는 역사 건물 탐색이 주목적이 아니니 크게 상관은 없었다.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출발할까요?"

한세아가 쌍안경을 가방에 넣으려고 하자.

"아, 저! 저도 망원경으로 볼래요!"

예린이 그녀의 손을 착 잡으며 말했다. 한세아가 망원경을 꺼낼 때부터 눈을 반짝거리더니 자기도 확대해서 보고 싶은 모양이다.

"으흠!"

예린의 옆에는 지수가 아닌 척 힐끔거리고 있었다.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지수도 쌍안경으로 보고 싶어 하는 눈치에 나와 한세아는 피식 웃었다.

"자, 너무 오래 보지는 말고. 지수 너도 알았지?"

"감사합니다, 오빠!"

"···응!"

힘차게 대답하는 예린과 부끄러운 듯 귀를 쫑긋거리는 지수. 그녀들은 쌍안경으로 여기저기 둘러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수와 예린이 망원경을 만족할 만큼 사용한 뒤에 우리는 당정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절그럭- 절그럭- 절그럭-

신발 밑창에 짓눌린 자갈들이 낮은 비탈을 타고 굴러간다.

파삭- 부스스-

관리가 되지 않아 썩은 나무판자들이 힘없이 바스러진다.

이윽고, 당정역 승강장 끝에 도착한 우리 앞에 어느 문구가 보인다.

<출입 금지>

이곳에는 열차가 정차하지 않습니다.

Trains do not stop at this spot.

-KORAIL-

펜스에 케이블 타이로 고정된 팻말에 적혀 있는 말이었다.

스윽- 슥-

나는 말없이 일행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스크린도어에서 거리를 벌리자는 의미였다. 금이 간 유리를 본 지수, 예린, 한세아의 낯빛에 긴장감이 더해졌다.

꼴깍-

역사가 있는 쪽으로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마른침을 삼키는 일행.

휘이이이··· 부스스-

간혹 부는 바람에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다가.

······툭!

이질적인 소리가 지수의 귀에 들릴 때면 그녀의 시선이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다. 나, 예린, 한세아가 즉시 걸음을 멈추고 몸을 낮추는 것은 당연한 수순.

휙- 휙-

괜찮다는 지수의 손짓이 있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충분히 확인하고 진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나무 인간들이 쏟아져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몸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 들었다.

자꾸 머리를 잠식하려는 불길한 상상력도 몸을 뻣뻣하게 만드는 데에 한몫하고 있었다.

스윽-

나는 식은땀이 찬 손을 바지 자락에 문질렀다. 진득하게 묻은 땀이 햇빛을 반사시켜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그것도 잠시, 역사 건물 바로 아래에 도달하면서 생긴 그림자가 손자국을 숨겨 주었지만.

바로 그때.

끼긱···!

무언가 비틀리는 소리가 적막한 승강장에 멀리 울려 퍼졌다.

"······!"

"······!"

귀에 똑똑히 들린 소리에 우리는 다시금 행동을 멈추고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쿵-쿵-쿵-쿵-쿵-

지수만 들을 수 있는 미세한 소리가 아니었기에 심장 박동이 크게 널뛰려고 했다. 아니, 심장은 진작부터 거세게 고동치고 있는 중이었다.

"흐아···."

나와 지수는 도끼를 꽉 쥐었다가 한세아가 조용히 가리킨 방향을 보고 나서야 힘을 풀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건 덤이었다.

<의왕→당정(한세대)→군포>

우리를 화들짝 놀라게 만든 소리는 승강장 지붕 골조에 연결된 표지판이 낸 것이었다. 한쪽 연결 파이프가 끊어져 지상으로 길게 늘어진 탓에 비틀리는 소리가 난 모양이다. 마침 바람도 불고 있었고.

이제 당정역의 범위에서 벗어나기까지 앞으로 남은 거리는 대략 100m남짓. 현재까지는 우리의 과민반응을 제외하고는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껏 예민해진 신경 때문에 벌써 짜증과 피로감이 한가득이다. 그렇다고 해도 방심은 금물이니 긴장을 풀 수는 없는 노릇.

'애초에 긴장이 풀리지도 않겠지만.'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이내 앞으로 향했다.

서로를 의지하면서 한 걸음씩.

***

얼마나 걸었을까.

역사 건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타닥타닥 울리는 전선줄 소리에서 멀어지고,

눈치 없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대던 전광판이 검은 점으로 보이기 시작했을 때.

"후우···."

"하···."

그제야 각자 꾹 참고 있었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좌우의 위험은 여전했지만, 적어도 위에서 쏟아질 수도 있는 위험은 끝났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이제 하나 지나친 건데 왜 이렇게 피곤하지?"

지수가 스스로 귀를 주물럭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마 한동안 푹 쉬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어. 진짜로 피곤하긴 하지만 그게 더 심하게 느껴지는 거지."

"그런가? 뭐, 아저씨 말대로 그럴 수도 있겠네."

무조건 그렇다라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휴식을 취한 반동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진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몸이 달라진 환경에 새로이 적응하기 위한 과정이겠지. 마음가짐이 달라진 탓도 있을 것이고.

"세아씨, 잠깐 가방 내려놓고 뒤돌아 보십쇼."

"네? 왜요?"

"잔말 말고 빨리요. 근육 좀 풀어 드리겠습니다."

"아···."

한세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짐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살짝 드러난 어깨 부근에는 가방 끈이 눌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파도 조금만 참으십쇼."

나는 한세아의 어깨를 꾹꾹 눌러 주었다.

"네-헥! 아악···! 악!"

잠깐 사이에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어깨 근육이 경직되다 못해 완전히 굳은 상태였던 것이다. 이런 건 미리미리 조금씩 풀어둬야 나중에 고생을 덜한다.

"아흐···."

처음에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아파하던 한세아. 그녀는 이내 풀리는 근육을 느낀 듯 한층 가벼워진 앓는 소리를 냈다.

"예린이는 이상없지?"

"네! 전 괜찮아요!"

예린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을 끝으로 나, 지수, 한세아는 군포역으로 다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지수의 말마따나 이제 당정역이라는 하나의 난관을 넘었을 뿐, 앞으로 넘어야 할 역들이 많았으니까.

여기서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아직 갈 길이 머지 않은가.

그러나 세상 일은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말대로.

무사히 당정역을 지나친 것처럼 앞으로도 큰 위험없이 역들을 지나치기를 바라면서 걷고 있던 우리에게.

"아오···."

거대한 몸체를 지닌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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