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5 - 185. 군포역 (1)
"아저씨, 저거 보여?"
지수는 걸음을 멈추며 전방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것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금속 덩어리. 바로 1호선 열차였다.
"어."
나는 손을 들어 일행의 걸음을 막았다. 내가 그러지 않아도 뒤따라 오던 한세아와 예린의 다리는 이미 멈춘 상태였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위치는 당정역을 지나 군포역에 다다르기 전에 있는 고가 도로 아래였다.
군포역 도달까지 불과 200m 정도만 남은 상황.
"···빙 돌아가는 건 안 되겠네요."
한세아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열차를 보더니 침음을 흘렸다.
그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열차. 이것이 걸음을 멈추게 한 직접적인 요인이었다.
단순히 선로 위에 정차 되어 있는 열차였다면 몸을 숙이고 지나갔겠지만, 선로에서 탈선이 되어 있으니 그것은 무리였다. 그냥 지나가고 싶어도 옆으로 몸을 뉘이고 있는 전철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최대한 조심해서 넘어간다고 해도 무조건 한 번 이상은 밟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똬리를 틀고 있는 1호선 전철이 양 옆의 담벼락을 아슬아슬하게 무너트리지 않았다는 것일까. 아니, 무너진 곳이 있긴 하지만 그러한 부분은 열차가 단단히 틀어막고 있었기에 추가적인 위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조용히, 그리고 조심만 한다면 예기치 못한 위기는 최대한 피할 수 있으리라.
물론, 어디까지나 전철 내부에 나무 인간들이나 변종들이 없다는 가정하에 성립하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지수야, 소리 들려?"
나는 언제든지 도끼를 휘두를 준비를 마쳤다.
"······."
귀를 열차로 쫑긋거린 지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들은 없는 모양이다.
"······."
결국 넘어가기도 해야 하고, 직접 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일자로 세운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지수, 예린, 한세아는 내 신호에 맞춰 천천히 1호선 전철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절그럭- 잘그락-
그극- 그극-
선로 사이의 나무판자와 자갈들이 서로 비벼지는 소리가 난다.
쿵- 쿵- 쿵- 꼴깍-
심장 박동 소리를 중간에 끊는 침 삼키는 소리.
"후우···."
긴장감에 살짝 붓기가 올라온 손을 괜스레 쥐었다 피었다를 반복했다.
이윽고.
"···내가 먼저 올라가 볼게."
지하철 하단부 앞에 도착한 지수가 뒤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그녀의 몸 주위에는 어느새 작게 파직거리는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조심해."
이능을 각성한 지수의 움직임이 날래고 조용해졌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기만 할 뿐.
끄덕-
지수는 안심하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파직- 탁-
심호흡하며 통통 뛰던 그녀는 이내 발을 박찼고, 하늘을 보고 있는 지하철 옆면으로 올라가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리고.
"······!"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던 지수가 꼬리털을 바싹 곤두세우는 것 또한 거의 동시였다.
지수가 도끼를 들지 않는 것을 보니 위험한 것들은 없는 것 같건만, 왜 저런 반응을 보여 준다는 말인가.
······덜컹!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뭔가 보기는 한 것은 확실하므로 나는 곧장 문턱을 잡고 객차 위로 올라섰다. 손에 진득한 검댕이가 묻어나고 소리가 조금 났지만 아직은 예상 범위 안이었다.
"왜 그···."
나는 떨리는 눈으로 앞을 보고 있던 지수를 부르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와 지수가 밟고 있는 1호선 전철 내부의 모습은 예전에 지하 터널에서 보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새였다.
곰팡이가 잔뜩 핀 시트, 깨진 유리창을 통해 들어간 넝쿨, 손잡이를 휘감은 줄기, 스펀지 위에서 싹이 튼 잡초, 고여 있던 물이 증발한 흔적.
그래, 여기까지도 우리들의 예상 범위 안이었다.
다만 내가 순간 멈칫한 이유는 당연하게도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온 까닭이었다.
각종 컨테이너들이 실린 평판차,
여러 자재가 담긴 무개차,
액체류가 들어 있는 조차.
그것들이 하나같이 이리저리 꼬여 있는 채로, 서로 엉망으로 뒤집어진 채로 선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열차들의 무덤이 여기 있었다.
***
"혀, 현우씨! 위에 뭐가 있길래 그래요?"
밑에서 불안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한세아. 그녀 덕분에 나와 지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일단 우리가 밟고 있는 전철 내부에는 위험한 것이 보이지 않으니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예린과 한세아를 올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언제까지고 그녀들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세아씨, 제 손잡고 올라오십쇼. 구동축 부분 밟으면서 올라오는 게 한결 수월할 겁니다."
그리 판단한 나는 한세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순간 손에 검댕이가 잔뜩 묻은 것이 기억났지만, 한세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을 잡고 다리를 올렸다.
"끄응···."
한참을 구동축과 씨름을 하는 한세아. 그녀가 어찌어찌 중간까지 몸을 올렸을 때, 나는 그녀의 가방과 함께 어깨 밑으로 손을 넣어 힘껏 들어 올렸다.
"흐앗!"
인형 뽑기 집게에 걸린 것처럼 내게 잡힌 한세아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것도 잠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내 팔을 꽉 붙잡았다.
"···막 무겁거나 그러진 않았죠? 네?"
한세아는 이내 내 품에 들어오면서 부끄러운 얼굴을 하며 물었다. 나와 지수처럼 한 번에 올라가지 못한 것이 민망한 모양이다.
애초에 서로 들고 있는 짐의 부피가 달랐으니 무게에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건만. 이럴 줄 알았으면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가방 먼저 받을 걸 그랬나 보다.
"어휴, 엄청 무겁던데요?"
"······!"
"가방이요. 가방."
"아잇! 너무해요!"
내 너스레에 화들짝 놀란 한세아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무거울 리가 있겠는가. 만약 무겁다 하더라도 그것은 신체적인 특성에 기인한 어쩔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예린아, 어디 긁힌 부분은 없지?"
"응! 난 괜찮아, 언니. 말짱해!"
옆을 보니 지수는 진작 예린을 위로 올린 상태였다. 그녀는 아이 주위를 빙빙 돌면서 혹여 다친 곳이 있나 확인하는 중이었다.
일행에게 맴돌기 시작하는 긴장감을 조금이나마 몰아내기 위해 장난을 쳤지만, 그것은 여기까지였다.
이제는 다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흐음, 앞이 이래서 지수씨랑 현우씨가 그런 반응이었던 거네요."
객차의 깨진 유리창문을 피해 서 있던 한세아가 전방을 보고 중얼거렸다. 다양한 종류의 화물 열차가 죄다 탈선한 모습은 그녀의 얼굴을 멍하게 만들었다.
"시체는 보이지 않구···. 현우씨, 이 열차들 그거네요. 하나 같이 위쪽으로 향하는 걸 보니까."
한세아는 나를 바라보았다. 처음에야 조금 놀랐지, 시간이 조금 지난 후 놀란 마음이 진정 되자 화물 열차들이 무슨 역할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지수도 마찬가지였다.
"네, 보급 열차 같습니다."
우리는 같은 결론에 다다랐다.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이었다.
안에 담긴 것들이 무엇인지 여기서 확인은 되지 않지만, 이런 자원들이 담긴 열차들이 서울로 향하려는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군인들이 전투에 쓸 물자들을 차출한 것이 아니겠는가.
전쟁.
그래, 나무 인간들과의 전쟁에 쓸 물자들 말이다.
마침 우리가 지나온 길에 컨테이너 단지가 있기도 했고, 군인들이 의왕역을 통과하기도 했었으니 그럴 가능성이 매우 컸다.
싸우기 위해서는 단순히 몸과 총기만 있는 것이 아닌, 그것들을 뒷받침해주는 식량이나 탄약 같은 보급이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하니까. 물자 보급이 없다면 군인들은 그저 쇠막대기 하나를 든 속 빈 강정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굳이 군인이 아니더라도 동일한 이야기였다.
비록 지금의 모습은 기껏 차출한 물자들이 제대로 보급되기도 전에 중단되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지만.
모든 것이 부족해 암울한 상황 속에서 싸웠을 군인들을 떠올리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예린아, 여기 주변 좀 훑어 줄래? 뭐가 있으면 바로 말해주고."
그것도 잠시, 나는 상념을 애써 털어내고, 예린에게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음······."
예린은 눈을 반짝이면서 신중하게 좌에서 우로 시야를 옮겼다. 무엇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막 누더기 변종처럼 무서운 건 없어요! 진한 검은 입자 덩어리들은 안 보이거든요. 근데 나무 인간들은 잘 모르겠어요. 알려줄 친구들도 안 보이고···."
예린이 눈가를 비비면서 말했다.
누더기 변종급만 없어도 나름 안심이다. 소수의 나무 인간들이 있더라도 지금의 우리에게는 큰 위협이 되진 않겠지. 방심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의 이야기지만.
'그나저나 친구들?'
또다시 나온 예린의 친구들 이야기에 나는 속으로 의문을 표했다. 캠프 아이들을 말하는 건 줄 알았건만.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지금 한가롭게 대화를 시작할 여유는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여유가 날 때 아이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가져야 할 듯했다. 알아서 잘하겠거니 싶은 생각에 그동안 신경을 써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조심해서 가보죠."
내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한 발 내디뎠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자, 잠깐만요! 근데······군포역은 어디 갔어요?"
한세아가 순간 당혹성을 내뱉으며 발길을 붙잡지 않았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