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6 - 186. 군포역 (2)
군포역이 보이지 않는다는 한세아의 말.
"······."
"······."
그녀의 말 덕분에 나는 아니, 우리는 그제야 아까부터 느껴지던 묘한 위화감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고가 도로를 기준으로 군포역까지의 거리는 대략 200m 정도였으니, 조금 더 앞으로 전진한 지금은 그보다 더 짧은 거리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말이 200m지, 이 정도의 거리는 길이가 길지 않다.
최적의 조건에서 인간이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가 40km 언저리인 것을 감안 한다면 비교조차 되지 않는 거리.
물론, 전방에 장애물도 많고 구름이 조금 낀 날씨인 터라 절반도 되지 않는 15km까지도 무리이지만, 200m라는 거리는 여전히 거의 코앞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냥 눈을 뜨면 전부 시야에 들어오니 말이다.
탈선한 전철 탓에 넘기 전까지는 시야가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 그러나 넘은 후에도 군포역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히 이상했다.
누가 보아도 이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나와 지수가 그런 점을 곧장 눈치채지 못한 이유는 멀리 아파트나 사옥 같은 빌딩이 어렴풋이나마 보이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눈앞의 광경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저 뇌가 받아들이는 그대로 인식을 하고 말았을 뿐.
"···세아씨, 쌍안경 좀 주십쇼."
"······여기요."
그리고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열차들이 왜 이런 모습을 하게 되었는가.
마치 무언가를 보고 급정거하다가 하나 같이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선로에서 벗어나게 된 듯한 모습. 그보다 더 이전에는 원인이 되는 요인이 있지 않겠는가.
그리 생각한 나는 객차 위에 서서 확대된 시야로 볼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까지 훑어보았다.
"···안 보여요."
"네?"
"건물들이 안 보입니다. 아니, 보이긴 하는데 아파트나 고층 빌딩 이런 것들만 보입니다. 그것도 옥상 부분들만 보이네요."
"그럼 땅이 푹 꺼지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가 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아마도."
지수, 예린, 한세아는 할 말을 잃어 버린 표정을 지었다. 내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
나는 그녀들을 백번 이해했다. 그도 그럴게, 갑자기 잘 이어져 있던 길이 뚝 끊겨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일단 가봅시다. 가서 철도길 상태 확인해 보고 빙 돌아서 가든지 그냥 넘어가든지 정하면 되니까."
"응, 아저씨."
우리는 치솟는 불안감을 애써 억눌렀다. 무슨 상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두려웠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으니까.
떨리는 눈으로 시선을 한 번씩 맞춘 뒤,
풀썩-
절그럭!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객차 아래로 내려갔다.
"윽, 기름 냄새. 갑자기 확 나네."
가장 먼저 내려간 지수가 코를 막으며 중얼거렸다. 화물 열차의 미로로 진입하자마자 한층 더 진해진 악취가 우리를 맞이한 것이다.
옆구리가 길게 찢어진 파란 원통. 거기에서 새어 나온 기름 탓인지 코를 콱 막히게 하는 지독한 쩐내가 사방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K-OIL 945110 NO SMOKING]
"···세아씨, 혹시 모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총은 절대로 쏘지 마십쇼. 저랑 지수 선에서 처리해 보겠습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한세아에게 말했다.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나 기름에 불이 붙지 않을 것이라 예상이 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의도치 않은 불은 우리의 숨통을 조여올 것이니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불길이 소화제에 의해 금방 진압이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인 이야기였다.
"지수 너도 도끼 휘두를 때 금속 부분끼리 부딪치는 건 최대한 피해야 하는 거 알지?"
"걱정 하지마, 아저씨. 빗나가지 않게 한 방에 보내버리면 되잖아."
지수는 짐짓 자신만만하게 말했으나 그녀의 꼬리가 뻣뻣하게 굳어 있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한 쌍의 귀도 미동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적잖게 긴장한 모양이다.
이윽고.
휙- 휙-
내 신호에 따라 지수, 예린, 한세아는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내디뎠다.
잘그락- 절그럭-
찌직- 찍-
자갈들이 밀려날 때마다 진득하게 엉겨 붙어 있던, 검게 변한 기름 덩어리들이 짓눌린다. 찢어지지도 않고 그저 길게 늘어지는 것들은 신발 밑창을 검댕이로 물들였다.
꾸욱-
굳기 직전의 황토 찰흙을 밟는 듯한 감촉. 아마 며칠 전에 내린 비 탓에 살짝 무르게 변한 듯했다.
첫 번째 장애물인 유조차를 지나자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어김없이 탈선한 상태인 평판차.
그리고.
길게 쭉 뻗은 포신, 두꺼운 한 쌍의 바퀴, 몸체를 지지하는 다리, 국방색으로 페인트칠 된 겉면.
···바로 견인 곡사포였다.
한대가 아닌 최소 10대가 넘는 포들이 엉망진창으로 선로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뒤집히면서 파손된 곡사포들 사이사이에 고정 사슬들이 찰그럭거리며 소리를 낸다.
"뭐야, 이거? 대포?"
"정확히는 대포가 아니라 견인포라고 하는 건데···."
"하는 건데···?"
"나도 거기까지 밖에 몰라. 난 포병이 아니었거든. 저 위에서 북한이나 좀 봤지."
총을 쏘는 일이면 모르겠으나, 포 관련된 것들은 내 분야가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 견인포에 자세히 안다고 쳐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컨테이너에 깔려 있기도 한 포들을 꺼낼 수도 없거니와 어찌어찌 꺼낸다고 해도 단순한 고철에 불과할 뿐이니까.
바로 그때.
"엇? 오빠, 언니! 저기 앞에!"
예린이 나와 지수의 손을 잡으면서 앞을 가리켰다.
아이가 가리킨 것은 국군수송사령부 문구가 쓰인 평판차 아래에 끼어 있는 시체 한구.
"···군인이네."
나는 도끼를 꽉 쥔 채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지수도 말없이 내 뒤를 따랐다.
간신히 군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잔뜩 헤진 군복은 이것이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단순한 시체인지 나무 인간이 휴면 상태로 있는 건지 확인 사살을 하기 전까지 알 수 없는 탓에, 나와 지수는 머리와 몸을 분리시키는 확인 과정을 진행하기 위해 도끼를 천천히 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나무 인간 특유의 냄새는 안나. 아저씨, 죽은 건 확실해. ···이제 보니 뼈만 남았었네."
지수가 코를 킁킁 거리면서 한 말에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만.
시체 썩는 냄새가 나지 않았던 이유는 냄새를 풍길 살점이 남아 있지 않았던 까닭이었겠지. 그나마 뼈에서 나는 냄새는 사방에서 풍기고 있는 기름 쩐내가 지웠을 것이고.
"가까이 왔는데도 반응 안 하는거 보니까 안심해도 되겠다, 지수야."
"응, 다행이야."
시체가 갑자기 나무 인간으로 변해 움직인다고 해도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을 듯했다. 하반신이 열차에 깔려있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나는 시체를 살펴보았다.
백골로 변한 몸, 군복 밑을 파고든 넝쿨, 이마에 생긴 동그란 균열, 상의에 붙은 작대기 3개 약장과 이름표.
'···박재준.'
위로 이동하던 군인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래도 이마에 남은 탄흔은 그에게 안식을 가져다준 동료가 있었을 것이다, 라는 걸 짐작하게 만들었다.
그의 목 부근에 걸려 있어야 할 인식표가 보이지 않는 것도 내 추측에 확신을 더해주고 있었고.
"오빠···. 이 사람 편하게 만들어 주면 안 돼요? 검은 입자가 달라붙으려고 하는데···."
어느새 바싹 다가온 예린이 내게 말했다. 아이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 알았어."
나는 예린을 살짝 뒤로 밀어내며 군인을 내려다보았다. 시체를 양분 삼아 하얀 색 꽃을 피운 줄기들이 보인다.
'수고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안타깝게 죽은 군인에게 푸른 불을 날렸다.
순간 불을 날리기 직전에 뇌리를 스친 기름때에 불이 옮겨붙는 상상에 몸이 움찔 떨렸다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푸른 불이 일반적인 불이 아니라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에 대사고가 터질 뻔했다.
화르륵-
푸른 불꽃이 그의 주변을 점거하고 있던 넝쿨과 꽃을 태운다. 그리고 그것은 백골도 마찬가지였다.
···풀썩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것들이 사라지자 군복은 숨이 죽어 납작하게 변했다. 그러한 모습이 왠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다는 느낌은 기분 탓일까.
"얻을 건 없네."
지수는 도끼 끝으로 넝마가 되어 버린 군복을 뒤적거렸다. 하얀 재가 흩날리는 주변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나오는 물건들은 없었다. 죽은 군인의 동료가 쓸 만한 건 전부 챙겨 간 모양이다.
이윽고.
"지수야 그만 뒤지고 가자. 계속 걸어야지."
"알았어!"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다시 앞으로 향했다.
그 뒤로, 여러 시체들이 나왔고 우리는 그럴 때마다 걸음을 잠시 멈추고 안식을 선물해주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여긴 까닭이다.
화물 열차의 미로 속에 있는 시체들은.
하나 같이 군인들이었고,
하나 같이 이마가 뚫린 백골이었으며,
하나 같이 인식표가 걸려 있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 같이 시체 주변에는 수원 고등학교에서 보았던 꽃들이 피어 있었다.
눈보다 하얀 꽃잎과 피보다 붉은 수술을 가진 불길한 꽃들이 말이다.
일행에는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바뀌게 되었다.
미로의 마지막 관문인 컨테이너들을 넘고 나서 보이는 풍경은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진짜 가지가지하네."
"아저씨, 여기 건너갈 수··· 있나? 이게 되나?"
"무서워요, 언니···."
"이리 와, 예린아."
군포역이 보이지 않는 이유.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건물이 왜 옥상 부분만 보이고 있었는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으니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최악인 상황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