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87화 (188/497)

Chapter 187 - 187. 군포역 (3)

그동안 끊긴 도로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우리 앞의 풍경은 도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었다.

대략 폭 200m의 크레바스(crevasse).

그것이 우리의 발걸음을 지상에서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실수로라도 발을 뗀다면 바로 아래로 곤두박질 칠 것 같았으니까.

깊고 깊은.

······저 아래로.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차라리 절벽 대신 수십의 나무 인간들과 조우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순간 들 정도였다.

꼴깍-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전방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바퀴에 끼어 있는 선로, 홀로 외로이 흔들리는 전선줄, 길게 늘어진 화물 열차, 암벽 곳곳에 튀어나온 나무뿌리, 중간에 걸려 있는 파란 금속판.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

마치 지각이 똑 떨어져 분리된 듯한 광경은 우리가 현실에 있는 것이 맞는지 의심케 했다. 그러나 눈을 계속 끔뻑거려 보아도 달라지지 않는 풍경. 그것은 이내 아찔한 현실감으로 다가와 숨을 턱 막았다.

'······이런 건 다큐에서만 볼 줄 알았는데.'

여기를 넘어갈 생각하니 벌써 현기증이 머리를 잠식하는 기분이 들었다.

"···현우씨, 군포역 저기 있네요."

한세아가 떨리는 손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군포 ②출입구]

그녀가 가리킨 것은 내가 아까 보았던 파란 지붕에 붙어 있던 간판이었다. 우습지도 않았다.

그저 살짝 벌어져 있던 입이 꾹 다물렸을 뿐.

'우회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좌우로 찢어진 대지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만큼이나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져 있었으니까.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서 있는 이곳이 건너편까지의 거리가 제일 짧아 보였다.

그러한 점은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불행인 것은 절벽 아래로 추락하지 않는 화물 열차만이 유일한 다리라는 점이었다.

열차의 바퀴를 지지해주는 선로도 제 역할하지 못하고 그저 간신히 끼어 있기만 한 채로, 단순히 길게 연결된 평판차들만이 겨우 버티고 있는 모습.

보통 레일의 길이는 25m에 불과할 진데, 아직 선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걸 보면 고속철도 레일인 모양이다. 고속철도 레일은 길면 2km까지 늘린 걸 쓰니까.

끼기긱···

위에 올려져 있던 컨테이너들은 전부 아래로 떨어져 사라지고, 객차를 이어 주는 연결 고리가 힘겹게 서로를 붙들고 있는 모양새는 마치 끊어지기 직전의 동아줄 같았다.

화물 열차와 철도가 아직까지 용케 버티고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객차들이 거의 1km에 달할 정도로 길게 연결된 덕분일까.

"여, 여기를 어떻게 지나가···."

지수가 뒷걸음질 치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는 쉴 새없이 떨리고 있었다.

"······."

"······."

우리는 침묵을 유지했다. 지수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백번 이해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바로 그때.

"어?! 오빠! 언니들!"

한세아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곁눈질을 하고 있던 예린이 고개를 획 들면서 우리를 불렀다.

"저기 봐요! 열차 가운데!"

나, 지수, 한세아는 아이의 시선을 따라 열차를 바라보았다.

"···로프잖아?"

아래로 늘어진 국방색 평판차를 가로지르는 국방색 로프 하나가 보인다. 하필이면 열차 바닥에 딱 달라붙어 있어서 이제서야 보인 것이다.

"세아씨, 쌍안경 좀."

"여, 여기요."

나는 확대된 시야로 로프를 쭉 따라갔다. 손때가 잔뜩 탄 로프는 사람의 손길이 닿았다는 것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로프의 끝은 건너편 너머의 도로에 단단히 고정된 전신주에 묶여 있었고, 시작은 내가 서 있는 위치를 기준으로 전방 20m부근의 객차에 묶여 있었다.

"······?"

아마도 후속 병력이었을 군인들. 그들이 왔을 때는 이미 이 선로는 끊어진 상태였겠지. 서울로 향해야 하는 그들은 로프에 몸을 묶고 넘어갔을 것이고.

끊어진 대지를 잇는 국방색 로프의 존재를 보니 먼저 지나간 군인들이 그랬을 것이다, 라는 건 추측이 되었지만. 왜 하필 저기서부터 묶은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무슨 연유로 로프가 중간부터 묶여 있는 것인가.

건너편처럼 시작점도 전신주에 묶어두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겠나.

나는 입술을 짓씹으면서 고심했다.

'···땅이 점점 벌어지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시야를 멀리 확장시켰다.

반파된 건물, 무너진 고가도로, 절벽가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차량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닌가?'

지금 보이는 것 정도로는 많은 걸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만 다시금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건너편까지 연결된 로프가 있습니다. 아마 군인들이 그랬겠죠."

나는 뒤로 돌아서 지수, 예린, 한세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그게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었다.

"단단하게 묶여 있으니 거기에 몸을 묶으면 적어도 떨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넘어간다는 이야기네. 아니, 당연히 넘어가긴 해야 하는 건데. 아, 진짜 미치겠네."

지수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꼬리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경직된 상태였다.

"다들 봐서 알겠지만, 그나마 이 길이 제일 짧아요. 애초에 이쪽 길밖에 없기도 하고. ···여기서 멈추면 모든 게 끝입니다."

"후우···, 그래요. 여기서 멈추면 지금까지 걸어온 게 아깝죠."

한세아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일단 이걸로 각자 몸에 서로 묶어요. 떨어지지···, 후우···. 그러면 안 되지만, 혹여 떨어지더라도 끌어올릴 수 있게요."

그녀는 이내 등산 로프를 꺼내 차례대로 몸에 묶기 시작했다.

고민은 길었지만, 행동은 빨랐다.

이윽고.

"흐으, 흐으. 아저씨···."

눈을 질끈 감고 딱 달라붙은 지수를 데리고 우리는 절벽가 앞에 섰다.

휘이이이이-

끼익- 끼긱-

어서 가라는 듯 후방에서 나, 지수, 예린, 한세아의 몸을 미는 바람에 팻말 하나가 흔들린다.

자갈밭에 간신히 고정되어 있는 나무 팻말에는 이러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경고>

※ 열차가 들어올 때는 위험하오니 안전을 위해서 한 걸음 물러서 주십시오.

※ 고객 여러분의 부주의로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는 한국철도공사가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 철도공사의 승낙 없이 선로에 내려가는 경우에는 철도안전법 제48조 및 제 81조에 의거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한국철도공사 KORAIL-

철도길을 걸으면서 자주 봤던 경고문이지만, 중간에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이번에는 유독 눈에 밟혔다.

과태료고 뭐고, 다 지급할 테니 우리를 안전하게 넘어가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희망 사항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지수야, 힘들면 내가 업어 줄 테니 그렇게 갈래?"

"아니! 그게 더 무섭다고···. 차, 차라리 다리가 바닥에 닿는 게 낫지···."

"···예린이는?"

"······세아 언니 손 꼭 붙잡고 갈게요, 오빠. 저도 제가 걷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국방색 평판차에 발을 올렸다. 이제는 저 위험천만한 열차 아니, 외나무다리를 건너가야 할 때다.

"다들 최대한 아래는 보지 마십쇼."

"···네, 현우씨."

"흐으윽-."

해는 어느새 중천에 떠 있는 상황. 아직 목표 거리의 절반도 넘지 못했으니 더 이상 서로를 안심시켜 줄 대화를 나눌 시간도 충분치 않았다.

우리는 녹이 슨 금속 판 위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었다.

1차 목표는 20m 전방에 있는 국방색 로프.

···끼긱 ···끼긱

일행이 각자 내딛는 발걸음에 금속판이 비틀리는 소리를 낸다. 단순히 소리만 그러할 뿐, 바닥이 뒤틀리는 일은 없었지만 숨은 점점 가빠졌다.

아래를 보지 말라고 말은 했으나 시야가 계속해서 아래를 향하게 되는 것도 긴장감을 더하는데 한몫하고 있었다. 고지대에서 저지대로 내려가고 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흐으, 흑. 흐으···."

간신히 나를 따라오고 있는 지수는 어떻게든 아래를 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는 힘의 세기를 더해 나갔다.

우리가 점점 앞을 향해 나아갈수록 객차 밑으로 보이는 어둠은 크기와 농도를 부풀렸다. 그나마 걸을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한 것이 다행이었다.

찌익···

중간중간 검은 이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시야 한쪽을 차지했다. 밟으면 점성 있는 액체가 나오기 때문에 최대한 피해서 걸음을 내딛는 수밖에 없었다.

지수가 심호흡을 한 후, 검은 이끼를 넘었을 때.

휘이이이잉-!

돌연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강풍이 화차를 뒤흔들었다. 금속판에 몸을 전부 맡기고 있는 우리도 뒤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

"꺄아아아악!"

"지수야, 손 놓지마!"

나는 지수를 붙잡고 즉시 몸을 낮췄다. 한세아와 예린도 마찬가지였다.

그그극- 그그그극···

단순히 비틀리는 것을 넘어선 출렁거림이 느껴진다. 동시에 우리의 시야도 함께 흔들렸다.

끼기기긱···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흔들다리도 이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화차 바닥판에 움푹 파여 있는 홈에 손을 집어넣어 바람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흑, 흐윽."

지수는 아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팽창할 만큼 팽창한 동공은 그녀가 얼마나 겁에 질려 있는지 몸소 알려주었다.

"괜찮아, 지수야. 안 떨어져."

"아, 아저씨···. 흑!"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서로의 허리가 등산 로프로 묶여 있어 떨어져도 끌어올릴 수 있지만, 그러한 사실은 안전하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못했다.

그도 그럴게, 그건 정말 최소한의 조건이었으니까.

적어도 로프에 이어 휘어지지 않는 손잡이라도 달려 있어야 최소치의 안전을 느낄 수 있으리라.

당장 나조차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고. 화차가 기울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마다 심장이 터지다 못해 부서질 것 같았다.

갑자기 로프가 끊어지면 어떡하지.

갑자기 화차가 뒤집어지면 어떡하지.

갑자기 열차를 잡고 있는 연결부의 고정이 풀려서━

···떨어지면 어떡하지.

온갖 불길한 상상력이 일행을 한없이 불안 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윽고.

휘이이···

바람이 잠잠해지자 나는 하얗게 질린 지수의 손을 이끌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새 힘이 풀린 다리가 후들거린다.

···텅 ···텅 ···텅 ···텅 ···텅

작게 울리는 바닥 소리.

중간에 삐걱거리는 소리가 섞인다.

후두둑- 툭- 투둑···

화차 위에 있던 자갈이 아래로 밀려나 떨어지는 소리.

끝에 닿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다들 정신 차려요. 군용 로프가 있는 곳까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나는 무심코 추락하는 자갈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급하게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밑에 자리 잡은 어둠이 나를 빨아들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수원역에서 보았던 심연보다 짙은 어둠은 떨어지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상관하지 않고, 소리 없이 잡아먹겠지.

내가 일행에게 한 말은 그녀들만을 위한 것이 아닌 사실상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한 말이었다.

속에서 되뇌이는 것을 입으로 내뱉지 않는다면, 턱 끝까지 차오른 생각이 내 숨통을 콱 막을 것 같았으니까.

우리는 다시 한번 바람이 강하게 불기 전에 군용 로프에 몸을 묶겠다는 일념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절대로 급하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조금 더 빨리 가겠다는 움직임은 실수를 유발하고, 실수는 명줄을 재촉하는 법이니 말이다.

스윽- ···텅- 스윽- ···텅-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타악-!

우리는 또 하나의 생명줄을 붙잡을 수 있었다.

앞서 나간 군인들이 설치해 놓은 것으로 추정되었던 국방색 로프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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